셰익스피어의 고향인 영국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의 구시가 거리.
셰익스피어의 고향인 영국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의 구시가 거리.

“셰익스피어를 즐길 수 없는 사람은 불쌍하다.

그는 수천 명의 유능한 사상가들을 제치고 살아남았으며,

앞으로도 수천 명을 더 제칠 것이다.”

- 조지 버나드 쇼

태어난 날과 사망한 날을 모두 기념하는 작가들이 있다. 그들이 남긴 문학이 그만큼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런 날들을 기념하는 게 오히려 무의미한 작가도 있다.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다는, 영국이 인도와도 바꾸지 않을 거라고 토머스 칼라일이 말했던, 캐머런 총리가 직접 그의 사망 400주년을 기념하며 추도사를 남긴 영국의 희곡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다. 거의 매해 전 세계가 그를 기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흥행불패’ 셰익스피어 영화들

셰익스피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많이 공연되는 극작가이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문화상품이다. 본고장 영국이 아닌 미국과 캐나다, 호주에서조차 매년 여름 셰익스피어 페스티벌이 열린다. 그의 영향력은 연극계에만 머물지 않는다. 미국 영화사들은 거의 매년 셰익스피어 작품을 영화로 만들거나 각색본을 만드는데, 대부분의 셰익스피어 영화들은 흥행불패이거나 스테디셀러로 남는다. 일부 영국인들은 할리우드의 셰익스피어 사랑 때문에 마치 셰익스피어가 미국의 유산처럼 느껴질 정도라고 불평하기도 한다. 디즈니영화 ‘라이언 킹’은 ‘햄릿’을, ‘웨스트사이드 스토리’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각색한 영화들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관객들도 여전히 셰익스피어를 차용한 영화에 빠져든다. 셰익스피어 한 사람이 모국인 영국에 가져다주는 경제적 수익을 감안하면 그는 확실히 황금알을 낳는 가장 튼튼한 거위다. 그의 고향마을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에는 매년 1000만명에 육박하는 방문객들이 다녀가고 셰익스피어 당시의 분위기를 재현한 찻집에는 일주일에 수천 명이 넘는 방문객이 18~20파운드 정도의 꽤 비싼 찻값을 개의치 않고 들른다.

흥미로운 대목은 셰익스피어 관련 관광상품을 즐기는 이들 가운데 한국, 중국, 대만에서 온 아시아 관광객들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이다. 공연예술의 문화와 전통이 다른 아시아에서조차 그가 세계 최고의 작가임을 인정한 셈이다. 셰익스피어가 고향마을보다 더 오래 살았던 런던에서는 셰익스피어의 자취를 찾는 관광상품이 매해 큰 규모로 성장하고 있다. 그가 활동했던 템스강 남쪽의 글로브극장은 말할 것도 없고 작품의 배경이 되었던 런던 시내 곳곳에서 발자취를 찾는 셰익스피어 투어는 사계절 내내 좀 더 의미 있는 관광을 하려는 방문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문화상품이다.

지구상의 수많은 작가 가운데 그가 ‘살아남은’ 이유는 셰익스피어가 활약했던 당시 영국의 역사적 배경에서 찾을 수 있다. 르네상스는 ‘리-버스(Re-birth)’를 뜻하는 프랑스어 ‘르-네상스(Re-naissance)’에서 유래했다. 15세기 후반 구텐베르크의 활자 덕분에 고대 그리스·로마시대의 고전들이 다량 인쇄되기 시작하면서 유럽인들은 고전의 가치를 재발견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가져온 문화부흥기가 바로 르네상스였다. 처음 유럽의 르네상스를 주도했던 나라는, 알려진 대로 이탈리아였다. 이탈리아가 미술과 건축, 패션 등 시각적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면 영국은 문학에서 단연코 다른 유럽 국가들의 추종을 불허하는 유산을 남겼다.

그 비결은 바로 영국 문학이 다루기 시작한 주제의 ‘세속화’에 있었다. 유럽은 기원 후 500년부터 대략 1500년경까지 무려 1000년간 로마 가톨릭이 지배하는 중세시대를 거친다. 이 기간 동안 문학은 철학과 정치만큼이나 종교에 종속된 시녀 역할에 충실하다 보니 종교적인 주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연극도 마찬가지였다. 대다수가 문맹인 유럽인들에게 성경의 내용을 교육하기 위한 일환으로 교회나 마을축제에서 동방박사나 성인들의 에피소드를 보여주는 게 고작이었다.

1500년대 중반, 튜더왕조 시대 영국은 로마 가톨릭과의 관계를 끊는 첫 번째 유럽국가가 된다. 10대 후반의 나이로 왕좌에 오른 헨리 8세는 잦은 이혼과 재혼으로 로마교회와 갈등이 생기자 영국국교를 신설하고 로마 가톨릭과의 단절을 선언한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수백 년간 지속되어온 종교를 바꾸기란 쉽지 않았다. 메리 여왕이 왕좌에 오르자 가톨릭으로 복귀하며 영국은 급격한 사회 격변을 경험하게 된다. 셰익스피어가 태어났을 당시 영국은 바로 헨리 8세의 딸이었던 엘리자베스 여왕이 통치하던 시대였고 영국은 다시 영국국교로 회귀한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가장 돋보이는 업적 가운데 하나는 네덜란드, 프랑스, 스페인 같은 강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평화를 유지하다 1580년대 스페인과 피할 수 없는 전쟁이 터지자 스페인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둔 것이었다. 이후 셰익스피어가 활동하던 당시 영국은 그야말로 자신감을 가진 국가적 정체성으로 세계화 시대에 진입하고 있었다. 셰익스피어는 이전의 유럽무대가 다루지 않던 사랑, 젊음, 결혼, 죽음, 욕망, 배신 등 인간 세속의 근원적 문제들을 작품의 소재로 삼았다.

르네상스시대 영국인들은 바깥세상과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 대해 알고 싶은 집단적 열망이 대단했다. 셰익스피어는 대륙의 다른 나라들 이야기와 이국적인 배경을 택함으로써 영국 관객들의 세계화에 대한 욕망도 충족시켜주었다. 셰익스피어 작품 가운데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작품만 해도 열 편이 넘는다. ‘로미오와 줄리엣’ ‘말괄량이 길들이기’ ‘베로나의 두 신사’ ‘베니스의 상인’ ‘야단법석’ ‘줄리어스 시저’ ‘오셀로’ ‘티투스 안드로니쿠스’ ‘겨울 이야기’가 모두 르네상스의 발원지였던 이탈리아에 대한 영국인들의 동경과 관심을 담고 있다면, 그리스가 배경인 ‘한여름 밤의 꿈’ ‘두 귀족 신사’ ‘아테네의 티몬’은 고대 그리스문명을 이상적 유토피아로 바라봤던 영국인들의 느낌을 반영하고 있다. ‘햄릿’은 덴마크, ‘맥베스’는 스코틀랜드, ‘리어왕’에는 프랑스가 등장할 뿐만 아니라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가 배경이고 그 외에도 터키, 유고슬라비아, 스페인, 오스트리아 등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일반 영국인들이 쉽게 가볼 수 없는 이국적인 나라를 배경으로 펼쳐졌다. 극장이 꿈의 공장이고 관객들의 욕망이 투영된 무대를 보여주는 공간이라는 사실을 19세기 후반 영화가 등장하기 전부터 셰익스피어는 이미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셰익스피어 무대의 경제성

윌리엄 셰익스피어
윌리엄 셰익스피어

그렇다고 그의 무대가 이국적인 공간들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데 공을 들이지는 않았다. 이탈리아가 천재적인 화가들에 힘입어 원근감을 살린 배경을 만들고 엄청나게 화려하고 사실적인 무대미술을 발전시켰던 반면 셰익스피어 당시 영국의 극장들은 아무 무대 장식이나 배경도 없는 빈 무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공연예술사에서 공연무대가 스펙터클하게 번성했던 나라에서는 길이 남을 만한 훌륭한 희곡이 나오는 일이 적다. 스타일리스트였던 이탈리아인들은 코메디아 델라르테, 오페라, 오페레타 같은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 발전시켰지만 그 화려한 무대 위에 주로 올린 내용은 고대 그리스·로마시대의 고전을 각색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탈리아 왕가가 프랑스 등 다른 나라와 혼인관계를 맺으며 이탈리아 문화가 유럽의 여러 나라에 영향을 미쳤던 반면 바다 건너 영국은 이탈리아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소박한 무대를 고수했다. 무대가 비어 있다 보니 그 공간은 상상력으로 채울 수밖에 없었다. 맥베스가 무대에 등장하며, “으스스한 숲속이로군”이라고 독백을 하면 관객들은 곧바로 숲속을 상상했고 ‘십이야’의 주인공이 무대 위로 나오며, “여긴 어떤 나라지? 오빠가 물에 빠지진 말았어야 하는데…”라고 말하면 그 공간은 먼 이국의 알 수 없는 섬나라가 되는 식이었다. 그야말로 관객들의 자발적 상상력이 가동되게 함으로써 연극성을 최대한 살리는 것, 그것이 셰익스피어 작품이 지닌 경제성의 핵심이다.

두 번째로 그는 희곡에 여백을 많이 두었다. 그의 희곡을 보면 앞에 장황하게 배경이나 등장인물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다. 작가의 구체적 지시를 적은 ‘지문’을 최대한 자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이 이야기를 무대에 올릴 다른 감독, 연출, 연기할 배우에게 더 많은 결정권을 준다.

오늘날 셰익스피어가 러시아, 리투아니아, 브라질, 한국, 일본 등 수많은 나라의 연출가들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번안되거나 각색되는 이유도 바로 원작 희곡이 대사, 인물 이외의 모든 요소를 생략하거나 줄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셰익스피어 희곡은 대부분 30명에 육박하는 등장인물들이 있고 이야기도 서사적인 대작들이지만 셰익스피어 당시 극단 배우들은 열 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한 배우가 보통 세 사람 이상의 배역을 맡는 게 관행이었던 것이다. 그걸 가능케 했던 것은 셰익스피어가 배우들의 동선을 효율적으로 짤 줄 아는, 무대 뒤를 꿰뚫고 있던 극작가였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 희곡의 긴 독백들은 주인공의 내면을 드러내는 기능도 수행하지만 다른 배우들이 무대 뒤에서 의상을 갈아입고 다른 배역으로 변신하는 충분한 시간을 벌어주었다.

바닥부터 성공까지

셰익스피어 고향에 있는 ‘한여름 밤의 꿈’을 형상화한 조각상
셰익스피어 고향에 있는 ‘한여름 밤의 꿈’을 형상화한 조각상

셰익스피어가 동시대의 희곡작가인 크리스토퍼 말로나 벤 존슨과 달랐던 점은 흔히 쓰는 표현대로 그가 극장의 밑바닥에서부터 차근차근 올라간 입지전적 인물이었다는 사실이다. 스물한 살의 나이로 런던에 도착한 뒤 첫 7년간의 행적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지만 가장 설득력 있는 기록에 따르면 그는 극장을 청소하고 무대 뒤 의상과 소품을 챙기는 일부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극장에 온 귀족들의 말 관리를 했다는 설, 학교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쳤을 거라는 설 등이 있는 걸 보면 그는 정말 다양한 계층의 여러 사람들과 교류하며 직업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많은 경험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극에 등장하는 왕이나 귀족들의 매사냥 방법 등을 아주 자세하게 기록한 대목부터 유모, 광대, 선원들의 걸쭉한 농담에 이르기까지 그가 얼마나 다양한 경험과 관계를 통해 정보를 얻었는지 알 수 있다.

다양한 직업만큼이나 셰익스피어 작품은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여주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정치적 야망 때문에 인간성을 점차 상실해가는 맥베스, 질투에 눈이 멀어 사랑하는 아내를 죽음으로 내몰고 마는 오셀로, 딸들의 사랑을 테스트해보겠다는 노욕 때문에 결국 모든 걸 잃고 마는 리어왕 등 결국 성격이 곧 운명임을 보여주는 여러 유형의 다양한 인물들을 등장시킨다. 그의 작품이 인간의 근원적 욕망이나 딜레마에 관한 갈등을 극화하기 때문에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이야기의 구조를 엮어내는 플롯의 귀재이기도 해서 대부분의 작품에 두 가지 이상의 이야기가 씨실과 날실처럼 엮여 있다. ‘리어왕’에는 리어와 세 딸 간의 이야기와 동시에 글로체스터 백작과 그의 두 아들에 관한 이야기가 번갈아가며 등장한다.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이야기의 속도를 조절하며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 대한 주제를 증폭시켜 보여주는 것이다. ‘햄릿’에도 햄릿 집안 이야기와 더불어 오필리어, 레어티즈 집안 이야기가 등장함으로써 햄릿의 성격과 갈등을 상대적으로 더 부각시킨다. 이러한 기법은 오늘날 안방극장의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도 공식처럼 사용되고 있다.

나남출판사의 셰익스피어 선집
나남출판사의 셰익스피어 선집

“세상은 무대이고 우리 모두는 배우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한국인들이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는 셰익스피어의 위력은 그의 언어에 있다. 그는 무수히 많은 신조어를 만들어냄으로써 오늘날 영어사용자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수많은 새 단어와 표현들을 남겼다. 작가에게 가장 큰 연장은 결국 언어이고, 그 언어가 대사를 이루고 대사가 성격을 이루어 이야기가 만들어진다는 극작 원리를 가장 영리하게 파악하고 있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의 희곡이 100퍼센트 창작이 아니라 잘 알려진 고전이나 다른 나라의 민담, 설화, 역사를 편집하고 차용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차용이 작가로서의 명성에 흠으로 작용하지 않는 이유도 바로 그 놀라운 언어와 표현력 때문이다. 그 때문에 셰익스피어는 실존 인물이 아니라 옥스퍼드 백작 에드워드 드 비어나 프랜시스 베이컨일 것이라 믿는 학자들도 있다. 문법학교만 마친 그가 그런 언어 구사가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엄청난 독서량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극장에서 인간사의 온갖 희로애락을 보여주던 그는 인간의 삶을 어떻게 바라봤을까. 초창기에는 비극과 사극을 주로 썼던 셰익스피어는 런던에 흑사병이 만연하자 점차 희극을 즐겨 씀으로써 극장이 관객들에게 웃음과 여유를 주길 꿈꿨다. 그러나 말년에 접어들어 더 완숙한 통찰력을 지니게 된 이후엔 희극도 비극도 아닌 ‘희비극(Tragicomedy)’을 통해 우리네 삶을 관통하는 신비로운 섭리와 인간성의 찬미를 동시에 보여준다.

지금도 여전히 건재하며 셰익스피어 당시의 무대를 보여주는 런던의 글로브극장. 3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던 이 극장은 이름처럼 바깥세상을 그대로 반영하는 공간이었다. 6페니 정도를 낸 중산층 관객은 지정된 좌석에서 시야를 가릴 앞사람 걱정 없이 편안히 관람할 수 있었고 그만큼의 입장료가 부담스러운 일반인들은 1페니만 내고 뒷자리에 서서 볼 수도 있었다. 셰익스피어는 이 극장의 지분도 3분의 1쯤 가지고 있었기에 관객이 많이 들수록 자신의 재산도 늘어나는 기쁨을 맛봤다. 글로브 경영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긴 뒤에는 런던의 다른 극장에도 투자했을 뿐만 아니라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에 땅도 사고 집도 사두어 여생은 고향에서 꽤 편안히 보낼 수 있었다.

셰익스피어는 인간적으로도 꽤 괜찮은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우리가 그의 희곡 38편, 154편의 소넷과 두 편의 장시를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은 셰익스피어가 사망한 7년 뒤 그의 친구이자 동료배우들이 그의 작품집을 내면서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영국 극작가 버나드 쇼는 셰익스피어가 정치의식도 종교도 철학도 없는 인물이라며 신랄하게 비판했지만 적어도 셰익스피어의 명성에 대한 쇼의 예견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셰익스피어는 수천 명의 유능한 사상가들을 제치고 살아남았으며 앞으로도 수천 명을 더 제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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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미성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현 코넬대 교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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