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관 오늘은 한국 영화 ‘밀정’(감독 김지운)을 다루도록 하지.

배종옥 아주 흥미로운 시간이 될 듯해.

신용관 우선, 50년 넘게 살아오면서 ‘밀정’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아본 적도, 글에 써본 적도 없을 게 분명한데 ‘밀정’이란 제목이 전혀 낯설지 않아서 신기했어.

배종옥 맞아. 제목 잘 지었어. ‘스파이’라는 표현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일제강점기 분위기가 물씬하잖아.

신용관 지금 20대들은 이 말을 잘 모르더군. ‘密偵(밀정)’을 ‘密情(밀정)’, 즉 ‘밀애(密愛)’ 정도로 추측하더라고.(웃음) 판권 수출용 영어 제목을 적절히 잘 붙였어. ‘디 에이지 오브 섀도(The Age of Shadows)’, 어둠의 시대.

배종옥 비슷한 시기를 배경으로 한 ‘암살’(감독 최동훈)의 제목도 그렇고, 단도직입적으로 주제를 강렬하게 드러내는 게 인상적이야.

신용관 ‘암살’이 스토리 라인으로 영화를 이끌어간다면, ‘밀정’은 등장인물들 간의 팽팽한 긴장이 영화의 밀도를 높이고 있는 셈이지. 이정출(송강호 분)과 김우진(공유), 이정출과 하시모토(엄태구), 히가시(쓰루미 신고)…. 이정출이 이 모든 긴장관계의 중심에 서 있는데, 심지어 카메오로 등장하는 정채산(이병헌)과도 짧고 강렬한 탐색전을 벌이잖아.

배종옥 같은 배우로서 송강호라는 배우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어. 우리나라에 송강호라는 배우가 있다는 게 복이야.

신용관 더 이상의 칭찬이 없을 정도의 극찬이네.

배종옥 송강호가 캐릭터(이정출)의 언어를 벗어나 일상 언어를 쓰는 장면이 몇 군데 있는데, 그게 그렇게 절묘하고 자연스러울 수가 없어. 가령 열차 안에서 김우진과 만나 던지는 “이렇게 자주 부닥치면 나더러 어쩌란 말이야?” 같은 딕션(diction)은 이정출 아닌 송강호의 언어인데, 전혀 튀지가 않잖아.

신용관 김우진과 처음 가진 술자리에서 “앞으로 형이라 부르겠다”는 김우진의 말에 대한 대응으로 “그러든가, 그러지 마시든가” 같은 대사를 말하는 거군. 이정출의 여비서로 나온 배우의 딕션도 현대적(가령 “퇴근 안 하세요” 때의 발성)이었는데, 그렇게 처리한 이유를 모르겠긴 했지만.

배종옥 여비서가 그랬나? 어쨌든 송강호의 경우 캐릭터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왔다가를 자유자재로 한다는 소리야. 들어보니 송강호는 본인 촬영이 없는 날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촬영장에 나와 어찌 돌아가는지를 지켜봤다고 하더라고. 배우 생활을 해본 사람은 알지만, 그러기 쉽지 않거든. 첫 촬영에서부터 마지막 크랭크업까지 그 인물, 그 영화 안에서 살겠다는 의지, 그렇게 살고 싶다는 희망의 표현이야.

신용관 ‘밀정’에서의 송강호가 정말 대단한 것이, 이른바 ‘미친 존재감’의 대표적 사례로 ‘다크 나이트’(감독 크리스토퍼 놀란·2008)의 조커 역 히스 레저를 드는데, 그의 연기가 탁월하긴 했지만 그로테스크하기 짝이 없는 조커 분장의 비중이 크게 작용한 게 사실이거든. 그런데 송강호는 별다른 분장도 없이 콧수염 하나만 붙인 채 오로지 표정 연기만으로 화면을 장악하고 있으니까.

배종옥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한국의 남자 배우들이 너무 부러웠어. 저런 영화를 할 수 있다니 얼마나 행복한가, 하고. 여배우들은 설 곳이 아주 제한돼 있잖아. 극히 일부의 타고난 배우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연기자는 훈련을 통해 훌륭한 배우가 되는 건데, 그 훈련이라는 건 좋은 영화에 출연해 좋은 감독과 호흡을 맞추면서 이뤄지는 거거든. 그런 면에서 송강호라는 배우가 너무 부러워.

신용관 하긴 김지운 감독과는 ‘조용한 가족’(1998)으로 처음 만나 ‘반칙왕’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등 화제작을 찍은 인연이 ‘밀정’으로 이어진 거지. 뿐인가. 봉준호 ‘살인의 추억’ ‘괴물’ ‘설국열차’, 박찬욱 ‘공동경비구역 JSA’ ‘복수는 나의 것’ ‘박쥐’, 이창동 ‘밀양’, 이준익 ‘사도’ 등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감독들과 전부 작업을 했으니 그 내공이 어떻겠어.

배종옥 마지막 부분 재판 장면에서 “나는 일본 경찰로서 내 직분에 충실했을 뿐”이라며 흐느끼는 장면은 압권이었어. 그 대사엔 어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본능이 낳은 거짓과 의열단에 어쩌다 엮이긴 했으나 나 이정출은 일본 경찰로서 할 일을 했다는 진심이 섞여 있을 테니까. 송강호라는 배우, 다시 보게 되더라. 이거, 여자들이 왕창 등장하는 영화도 나와야 하는데 말이야.(웃음)

신용관 영화의 스타일은 어땠어?

배종옥 미장센이 정말 좋더군. 장면 하나하나가 아름답게 느껴질 정도였어. 특히 미장센이 스토리에 녹아들어가 있던 게 마음에 들었어. 영화 중에는 미장센을 위한 화면에 신경 쓴 티가 역력한 작품이 적지 않거든.

영화 ‘밀정’의 이정출(송강호 분)과 김우진(공유 분).
영화 ‘밀정’의 이정출(송강호 분)과 김우진(공유 분).

신용관 맞아. 나는 이 영화의 조명에 너무 놀랐어. 완벽하게 컨트롤되고 있더라고. 야외 로케이션 장면도 ‘혹시 세트 촬영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빛이 단단하게 조절되고 있더라고. 그 덕분인지 당연히 2D 영화인데도 마치 3D 영화를 보는 것처럼 입체감이 느껴지더라니까.

배종옥 너무 칭찬 일색이네. 균형감(?)을 위해 단점도 지적해보자고.(웃음)

신용관 우선 스토리상의 난맥(亂脈)이 있어. 극 중반까지만 해도 정채산을 잡기 위해 혈안이던 일경(日警)들이 열차신 이후 김우진 체포에 열을 올리는 건 아무리 김우진의 자백을 통해 정채산을 잡기 위해서라고 이해해도 매끄럽지 못한 전개라고 봐.

배종옥 기차 안에서 김우진이 그렇게 뻔질나게 돌아다니는데, 눈알이 빠져나올 듯이 뒤지는 하시모토에게 걸리지 않는다는 것도 억지스럽더라. 안경 하나 걸쳤을 뿐인데 그걸 못 알아본다니 말이 돼? 비밀 공작을 하는 연계순(한지민 분)은 또 웬 빨간 모자래? 완전히 “나 잘 보여?”던데.(웃음)

신용관 김우진이 민둥산 속 오두막에 은신하고 있었다는 것도 말이 안 되지. ‘나 잡아잡수’밖에 더 되나? 지리산 빨치산 은신처처럼 첩첩산중도 아니고.

배종옥 나도 그건 이상하게 여겼는데, 어쩌면 로케이션 헌팅에 문제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 그런 일 흔하거든. 막상 현장에 가보니 소문과 달랐다든가, 막판에 예산에 쪼들렸다든가.

신용관 밀고자 때문에 의열단원들이 줄줄이 체포되고 사살되는 과정에서 루이 암스트롱의 음악이 흘렀던 게 나는 영 껄끄럽더군. 빼돌린 폭탄으로 이정출이 일제 요인들 테러에 성공할 때 사용된 웅장한 교향곡은 적당했지만. 누아르 영화에서 심심찮게 차용하는 기법인데, 일제강점기하에서 무장투쟁을 하는 인물들에겐 안 맞는 거 같았어.

배종옥 그래? 난 좋던데, 그런 음악 이용이. 영화 전반적으로 음악이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아주 적절했어. 독특하기도 했고.

신용관 나로선 엔딩이 기대에 못 미쳤어. ‘대원들 이곳에 다녀가다’라는 감방 벽에 새긴 글자도 좀 그렇고, 그 직전 이병헌의 보이스오버(V.O.)로 “이 모든 게 쌓여 더 나은 세상이 열린다” 운운도 불필요하게 다가왔어. 차라리 이정출이 자폭 테러를 앞둔 청년에게 “꼭 다시 보자”라고 말하는 장면으로 끝냈으면 어떨까 싶었어.

배종옥 한두 장면을 빼놓곤 등장인물 가족들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은 게 나로선 실망이었어. 아내와 자식 때문에 갈등하는 모습이랄지.

신용관 그 면에선 마치 서양영화를 보는 듯했지. 형제나 가족이라는 변수가 전혀 나오지 않았으니까. 밀정 노릇하면서 제일 손쉬운 알리바이가 ‘처자식’이잖아. 이전 한국 영화에서 숱하게 봐왔던. 나는 오히려 그런 요소를 깔끔히 덜어낸 게 이 영화에 대한 몰입도를 높였다고 봐.

배종옥 그 점에선 나랑 많이 다르네. 2시간20분 분량 중에서 어느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었어?

신용관 이정출과 김우진이 처음 대면하던 장면. 서로의 정체를 빤히 알면서 모른 체하며 툭툭 던지는 말들과 표정에 정말 숨이 막히는 줄 알았다니까. 특히 송강호가 턱수염을 쓰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모든 외부 소음을 차단한 채 두 배우의 육성만으로 신을 이끌어가는 데에 놀라움을 넘어 경이로움마저 느꼈다니까.

배종옥 흥미롭군. 그 신이 그렇게까지 다가왔단 말이지?

신용관 이 영화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를 말해볼까? 이 영화 보면서 눈물을 흘리거나 콧잔등이 짠해진 장면이 있었어?

배종옥 아니, 없었어.

신용관 맞아, 나도 없었어. 가마니에 덮인 연계순 시신을 알아보고 “(시체가) 어찌 이리 작소?”라며 오열을 하는 송강호의 모습에도 우리 관객은 눈물을 흘리지 않아. 감독이 결코 ‘신파’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해. ‘암살’에서 결전을 앞두고 기념 촬영을 하는 단원들(전지현·조진웅·최덕문) 모습에 눈물이 절로 솟는 것과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지점이지.

배종옥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네.

신용관 영화 보고 나서 ‘이 영화가 실화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어. 나는 ‘밀정’이 올해 최고의 영화라고 봐.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모두 받을 만한. 8·15 광복절에 중고생들에게 반드시 보여줄 영화이기도 하고.

배종옥 그래 수작임은 분명해. 내 별점은 ★★★★. 한 줄 정리는 ‘우리나라 남자 배우들, 정말 부럽다.’

신용관 난 ★★★★★ 만점. ‘김지운 만세, 송강호 만만세!’

신용관 조선뉴스프레스 인터넷뉴스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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