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통’, 몸의 한 부위나 장기가 물리적으로는 없음에도 있는 것처럼 느끼는 감각을 말한다. 신체의 일부가 절단된 후 잃은 부위에 가려움이나 통증을 느끼는 이들을 지칭하는 의학용어다. 또한 이것은 1992년생 작가가 문학동네대학소설상 대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소설의 제목이기도 하다. 스물넷의 이희주 작가는 작가 소개 페이지에서 “복잡한 세상에서 한 아이돌 그룹의 한철과 그 시절 팬의 일상은 아무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서 더 기록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무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이 일에 대해 그가 기록한 이유는, 책 속에 잘 담겨 있다.

“원래 타인의 사랑은 웃음거리가 되곤 하지만, 우리의 사랑은 거기에 더해 비난의 대상이 돼요. 단지 특수직업군에 있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말예요. 우리의 말이나 행동은 나이에 걸맞지 않은 일이나 혹은 질병처럼 다뤄지지요. 방송국 앞에서, 사람들이 경멸에 찬 눈으로 보거나 욕을 하고 지나갈 때마다 나는 생각합니다. 당신은 평생 이 정도로 사랑하는 감정을 알지 못할 거야, 라고요.”(11쪽)

‘환상통’은 아이돌을 사랑하는 여자 m과 만옥에 대한 이야기다. 이 작품은 ‘팬질’이라는 한마디로 제대로 된 담론의 대상에 들지 못했던 아이돌 팬덤문화에 대해 본격적으로 탐구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낸다. 심사를 맡은 강지희 문학평론가는 “아이돌을 향한 사랑은 역사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사건이 거의 말소된 세대의 새로운 집단 경험”이라고 했다. 실제로 지난 8월 20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빅뱅 10주년 콘서트에는 6만5000명의 관객이 모였다. 연령층도 1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했다. 이들은 자신의 시간과 돈 그리고 정성을 들여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이 자리에 모였다.

빠순이 함부로 차지 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한다. 입구에서는 경호원들의 강력한 제재와 의심 어린 눈초리를 받고, 길거리에서는 지나가는 행인들의 경멸에 찬 눈빛과 혀 차는 소리를 듣는다. 실제로 지난 2월 엑소의 밴쿠버 콘서트 현장에서는 매니저와 경호원들에게 폭행과 폭언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올라왔다. 이에 대해 한 팬은 “우리는 팬이자 기업의 관점에서 소비자이며 이 모든 소비는 ‘팬심’에서 비롯된다. 팬심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지만 지금과 같이 아무 보호장치도 없이 계속 절벽으로 몰아붙여진다면 그 끝은 대체 어디란 말인가”라고 적었다. 이들은 현재 하나의 문화를 이끄는 세력임에도 불구하고 ‘불가촉천민’ 혹은 ‘감정이 있는 ATM’ ‘엔터테인먼트 종사자들의 밥줄’ 취급을 받는다. 외부자의 시선으로 볼 때 빠순이는 ‘계몽해야 할 대상’이다. “너는 상술에 놀아나고 있다. 네 사랑은 삐뚤어져 있다”는 말을 수시로 듣는다. 빠순이는 ‘오빠 순이’의 준말로 좋아하는 연예인, 운동선수 등을 따라다니는 팬들을 일컫는 낮은 말이다.

‘덕통사고’는 교통사고처럼 우연히 그리고 갑작스럽게 어떤 분야 혹은 사람의 팬이나 매니아, 즉 덕후가 되는 것을 말하는 신조어다. 얼마 전 방송된 ‘무한도전’에서 유재석은 엑소의 멤버들과 함께 춤 연습에 매진한 뒤 ‘댄싱킹’ 무대에 올랐다. 멤버들이 새로 들어온 막내(?) 유재석을 살뜰히 챙기는 모습이 담긴 이 방송을 보고 “새삼스럽게 엑소에 덕통사고 당했다”는 댓글이 줄을 이었다. 실제로 30대 이후에도 예능프로그램을 보다가, 드라마를 보다가, 콘서트장에 갔다가 ‘덕통사고’를 겪은 이들의 경험담은 주변에도 많다. 빠순이가 되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교통사고 같은 것이다. 전북대 교수 강준만은 ‘빠순이는 무엇을 갈망하는가’라는 책에서 “팬은 결코 유별난 사람이 아니다. 조선시대에도 ‘팬덤’이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될 정도로, 팬은 시대를 초월한 인간관계의 문제”라고 말한다. 이 책은 스스로를 빠순이라 말하는 그의 딸 강지원과 함께 썼다. 그리고 책의 첫머리에 ‘빠순이들이 누려 마땅한 인권의 회복을 위하여’라고 썼다. 이들은 빠순이가 10대 시절의 일과성 ‘통과의례’가 아니라고 한다. 그 근거가 바로 이모팬, 누나팬, 삼촌팬의 대거 등장이다.

지난 2월 열린 엑소의 밴쿠버 콘서트(위)와 지난 8월 6만5000명의 관객이 모인 빅뱅 10주년 콘서트(아래).
지난 2월 열린 엑소의 밴쿠버 콘서트(위)와 지난 8월 6만5000명의 관객이 모인 빅뱅 10주년 콘서트(아래).

빠순이가 어때서!

이보다 앞서 나온 책 ‘팬덤이거나 빠순이거나:HOT 이후 아이돌 팬덤의 ABC’를 쓴 이민희는 “사회적인 관심이나 계몽이 아니라, 취향에 대한 타인의 말 없는 존중”만으로 충분하다고 한다. HOT와 함께 사춘기를 보낸 그는 현재 음악평론가다. ‘덕업일치’는 좋아하는 일로 먹고사는 기적이라는 신조어인데, 그야말로 팬질이 직업이 된 사례다. 그는 연예인을 ‘딴따라’라고 부르지 않는 것처럼 팬을 ‘빠순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점잖게 권고한다. 한국의 팬덤은 한국 대중문화의 마중물이 되어 한류라는 거대한 물줄기를 만들었다. 팬덤문화의 정점을 찍은 동방신기의 경우 팬카페 회원 수가 80만명에 이른다. 이런 규모의 팬덤을 보유한 아이돌만 모아도 이들의 수는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소수자’로 살아간다. 서태지의 팬클럽은 그가 공백을 갖고 심지어 은퇴나 결혼을 발표했을 때도 없어지지 않았다. HOT와 젝스키스로 시작된 팬덤 1세대는 이제 30대에 접어들었다. ‘무한도전’ 젝스키스 특집에서 이들은 아이를 안고, 유모차를 끌고, 노란 옷에 노란 풍선을 들고 공연장을 찾았다. ‘휴덕은 있어도 탈덕은 없다’는 팬덤 내부의 격언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한번 팬덤문화에 발을 들이면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다만 ‘나이 들어서 뭐하는 짓이냐’는 시선을 피해 일코(일반인 코스프레) 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최근에는 이런 이야기를 모아 ‘아이돌 빠순이를 위한 자성적 담론의 시작’이라는 표제를 담은 ‘잡지 빠순’이 SNS에서 창간됐다. 20년 동안 유지되어온 한국 팬덤문화의 물리적·시간적인 데이터가 축적된 결과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환상통’은 다시 말해 매우 뜨겁고 강렬했으나 지금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잃어버린 어떤 감정에 대한 기록이다. 그리고 작가가 이 모든 것을 망각하기 전에 이를 기록해두려 애쓴 이유는, 이들의 사랑이 ‘별것 아닌 것’ ‘한심한 것’으로 치부되지 않기를 바라서다. 한국의 대중문화는 이제 일본과 중국, 동남아를 넘어 유럽과 라틴아메리카를 향하고 있다. 프랑스의 에펠탑 앞에서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울리는 만큼이나, 한류의 한 축인 빠순이에 대한 공정한 평가와 관용(톨레랑스)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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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슬기 톱클래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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