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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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을 두드리는 타악기 리듬에 맞춰 살사 음악이 무대를 열어젖힌다. 남녀 파트너가 ‘퀵 퀵 슬로’ 스텝을 밟으며 런웨이에 등장한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크리스털 장식의 드레스가 눈부시다. 반도네온의 무거운 듯 경쾌한 선율이 흐르고 아르헨티나 탱고의 관능적인 몸짓이 무대를 휩쓸고 지나가면, 웨스턴부츠를 신고 카우보이 복장을 한 댄스팀이 나와 신나는 라인댄스를 선보인다.

오는 10월 21일 서울 남산 그랜드하얏트서울호텔 그랜드볼룸에서 이색 패션쇼가 열린다. 이날 무대에서 선보이는 옷은 여느 패션쇼에서 볼 수 있는 옷이 아니다. 살사, 룸바, 파소도블레, 자이브 등 라틴·모던 댄스스포츠 10개 종목의 드레스이다. 런웨이를 누빌 모델들도 특별하다. 댄스스포츠 국가대표 출신 박성우·조수빈, 살사 스타 백호, 라인댄스한국지부장이자 국제심판인 윤정혜씨를 비롯해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프로·아마추어 댄서 60여명이 총출동한다. 패션쇼에 이은 2부에는 무대·객석 구별 없이 2시간30분 동안 댄스파티가 열린다. 특별시범쇼와 함께 춤 못 추는 관객도 함께 즐길 수 있다. 국내에서 처음 시도되는 댄스복 패션쇼이자 춤추는 패션쇼다. 머슬매니아도 무대에 오른다. 보디피트니스 패션을 보여줄 모델은 지난해 아시아 챔피언이자 올 한국 챔피언인 이진원씨. 패션쇼의 사회는 ‘살사 여신’으로 알려진 배우 문정희가 맡는다. 문정희는 ‘마리’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며 해외 콩쿠르에까지 출전할 만큼 뛰어난 살사 실력을 자랑한다.

종목별 교류가 없는 댄스스포츠계에서 최고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다. 이들이 무대에 선 이유는 이번 패션쇼의 주인공 최린규(48·댄스룩 대표) 디자이너 때문이다. 대부분 최씨의 ‘댄스룩’을 입고 춤을 배우기 시작해 현재는 프로선수나 지도자로 활약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나라 댄스스포츠 초창기부터 함께했으니 ‘댄스룩’도 선수도 함께 성장한 셈이다. 그만큼 댄스스포츠계에서 최씨는 독보적이지만 일반 패션계에는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무명의 최씨가 대규모 패션쇼를 열게 된 것은 세계적인 크리스털 회사인 프레시오사의 후원작가로 선정됐기 때문이다.

600년 역사의 체코 프레시오사는 스와로브스키와 함께 세계 크리스털 브랜드의 양대산맥이다. 루이비통, 샤넬 등 세계적 브랜드에는 프레시오사의 크리스털이 사용되지만 주로 비투비(기업간 거래)를 하다 보니 스와로브스키에 비해 일반 소비자에게는 낯설다. 프레시오사는 조각가·화가 등 전 세계 작가를 후원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2년 전부터 아티스트를 찾던 중, 한국 독점 수입업체인 태광주얼리를 통해 최씨의 작업을 보고 후원작가로 선정한 것이다. 특히 각 나라별로 작가 한 명씩만 선정해 크리스털 재료 후원을 해온 전례를 깨고 패션쇼를 협찬하는 파격 지원이다. 그만큼 최씨에게 거는 기대도 크다.

최씨는 최근 몇 달간 패션쇼 준비로 하루 걸러 밤샘 작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있는 최씨의 작업실은 빨강, 파랑의 원색 드레스들로 화려했다. 한쪽 쇼윈도 안에는 지난해 미스유니버스대회에 참가한 한국 대표가 입었던 드레스가 전시돼 있었다. 하늘하늘한 레이스 천 위에 어깨부터 몸의 곡선을 따라 흘러내리듯 크리스털 장식이 붙어 있는 드레스는 한 벌 만드는 데 한 달이 넘게 걸렸다고 한다. 깨알처럼 작은 크리스털을 일일이 손으로 붙여야 하는 수공예 작품이다. 전 공정이 수작업인 만큼 시간도 공력도 인내를 요구한다. 이번 패션쇼에는 댄스스포츠 의상을 비롯해 이브닝드레스, 보디피트니스복 등 70벌 가까이 공개된다.

최씨는 1996년 프랑스 에스모드 파리에 입학해 무대의상을 전공했다. 한국에도 분교가 있는 에스모드는 미국 파슨스와 함께 세계적인 패션전문학교로 꼽히는 곳이다. 이과 출신으로 광고회사를 다니다 뒤늦게 도전한 일이었다. 창의력을 요구하는 무대의상은 최씨와 잘 맞았다. 패션을 전공하지 않아 오히려 독특했다. 최씨는 의상에 접근하는 방법이 달랐다. “저에겐 박물관이 스승이었어요. 매일 학교가 끝나면 박물관으로 달려갔습니다. 역사적인 흐름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무대의상은 트렌드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상상 속으로 들어가 만들어내야 하거든요.”

프랑스어도 안 돼 영어권 친구들의 숙제를 베끼던 최씨는 곧 두각을 나타냈다. 유럽의 속옷 기업이 주최한 대회에 학교 대표로 나가 입상을 하고 졸업전시회에 낸 작품이 눈에 띄어 파리 오페라하우스 인턴으로 뽑혔다. 비자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온 후 국립극장, 김자경오페라단의 작업을 함께 하는 등 프리랜서로 뮤지컬, 연극 무대의상을 하던 그가 현실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인맥으로 움직이는 무대 뒤는 열악했다. “무대의상 공장에 갔다 우연히 댄스복 만드는 것을 봤어요. 돈이 되더라고요. 용돈벌이나 해볼까 싶어 인터넷에 라틴·살사 댄스복을 만들어 올렸어요. 정가가 표시된 온라인 판매는 최초였어요. 설마 싶었는데 3개월 만에 지방에서 옷을 사겠다고 찾아왔어요.”

2000년의 일이다. 외국의 중고 드레스를 구입해 해부를 해가며 연구를 한 끝에 자신만의 디자인을 만들어냈다. 기능성 옷이기 때문에 활동성이 중요했다. 보석만 붙인다고 되는 게 아니다. 디자인에 눌려서도 안 되고 입은 듯 안 입은 듯 가벼워야 한다. 춤을 출 때 멋있게 보이기 위해서는 원단의 무게, 폭, 착용감 등 움직임에 따른 다양한 계산이 필요하다. 옷의 느낌을 알기 위해 댄스스포츠도 2년여 배웠다. 마침 댄스붐이 일면서 동호회를 중심으로 댄스인구가 급증했다. 3~4년 지나자 매니아층이 생겼다. 매일 새벽별 보면서 퇴근해야 할 만큼 그를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무대는 자연히 멀어졌다. 2002년 월드컵 개막식의 무대의상 제작에 참여한 것을 비롯해 연극 무대 작업은 가끔 참여했지만 뮤지컬처럼 장기 공연은 엄두를 낼 수 없었다. 그동안 댄스복을 만드는 업체는 우후죽순 늘었다. 최씨처럼 제대로 전공을 한 사람들이 뛰어드는 바닥이 아니었다. 패션 업계에도 끼지 못하는 ‘음지의 옷’이었다. 최씨가 이번 패션쇼를 기획한 이유이다.

“댄스복도 무대의상의 한 장르입니다. 패션의 한 분야로 끌어올리고 싶습니다. 건강한 춤, 건강한 옷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요. 또 종목별로 나뉘어 있는 댄스계 사람들이 이 무대를 계기로 한데 모였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댄스스포츠가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도록 역할을 하고 싶어요.”

시대가 바뀌고 댄스스포츠의 위치도 변했다. 뒤에서 추던 사교댄스가 아니라 동네 문화센터에서 건강을 위해 배우는 생활체육이 됐다. 똑똑해진 소비자들은 외국 옷만 따라하던 ‘묻지마 패션’에서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옷을 찾고 있다. 최씨도 패션쇼를 계기로 새로운 도전을 한다. 그동안 ‘댄스룩’ 뒤에 자신을 숨기고 있었다면 ‘린큐(RINQ)’라는 이름을 브랜드로 내세우고 트렌드에 맞춰 다양한 라인을 만들 계획이다. 댄스스포츠를 훌륭한 문화콘텐츠로 만들겠다는 그의 꿈이 런웨이에서 본격적인 워킹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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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은순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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