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야마 마사오
마루야마 마사오

요즘은 병사들이 영내에서 인터넷을 즐긴다. 생활관 침상은 1인용 침대로 바뀌고 있다. 이런 뉴스를 접하며 ‘군대가 정말 변했네’라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그러나 한편으로, 거의 사라졌다고는 해도 일부 구습(舊習)이 여전히 근절되지 않고 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정신적·육체적 가혹행위이다.

선후배 간에 짓궂은 행위는 인간사회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러나 그런 행위가 일시적 유희성을 벗어나 일상화되고 인격적 손상을 초래한다면 그것은 가혹행위가 된다. 이런 기준에 비추어, 간혹 군(軍)에서 발생하는 물의(物議)는 가혹행위라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도대체 이러한 병리현상은 어디에서 유래했을까. 우리는 막연하게 일제(日帝)의 잔재(殘在)라고 여긴다. 그러나 어떤 문맥에서 어떻게 발생한 잔재인지 좀더 심층적으로 이해해 보려는 노력은 의외로 미진하다. 사실 이 문제를 진지한 시선으로 바라본 고전이 이미 오래전에 있었다. 바로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1914~1996)의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現代政治の思想と行動·1964)이다.

마루야마는 일본 전후 최고의 정치학자이다. 그의 학문은 아예 ‘마루야마학(學)’이라는 일가(一家)를 이룰 정도이다. 그는 평생 일본정치사상사를 연구했지만, 그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연구주제 중의 하나가 국가체제이다. 이 책을 통해 그는 일본이라는 국가체제의 특징을 명쾌하게 해부했다. 그의 분석은 일본은 물론 세계적으로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도쿄대 교수였으나 정부에 비판적인 지식인으로 지목되어 1944년 7월 이등병으로 징집되었다. 그가 배치된 곳은 평양이었다. 거기서 구타와 영양실조 등으로 시달리다가 두 달여 만에 병을 얻어 귀향했다. 이듬해(1945년) 3월 다시 징집되어 히로시마로 보내졌다. 8월 6일 히로시마가 피폭(被爆)되었으나 다행히 생존하여 9월에 대학으로 복귀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는 말단 병사로서 군국주의의 최후를 온몸으로 겪었다. 그런 체험이 그의 학문과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의 고백에 따르면, 그는 논문을 작성할 때도 천황에 대한 관행상의 경어(敬語)를 쓰지 않으며 천황이라는 주술(呪術)로부터 벗어나려고 발버둥쳤다. 그는 평생 개인의 자유를 희구하는 리버럴리스트의 입장을 견지했다.

이 책에 실린 주요 논문들은 대부분 그가 대학에 복귀해서 1946년부터 1950년 사이에 쓴 것들이다. 당시 패전국 일본은 혼란 그 자체였다. 그동안 그들이 신(神)이라고 여겼던 천황(天皇)은 갑자기 자신이 인간이라고 고백했다. 모두가 우왕좌왕할 때 이런 혼란의 실체를 명쾌하게 해부해 보여준 사람이 바로 30대 초반의 마루야마였다.

잘 알다시피 유럽의 근대국가는 ‘중립국가(neutral state)’로 특징 지워진다. 중립국가란 진리나 도덕 등 내용적 가치에 대해 중립적 입장을 취하고 오로지 순수하게 형식적인 법적 기구만으로 설립된 국가를 의미한다. 그러나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일본 국가는 정치권력뿐만 아니라 윤리적 실체로서 가치내용까지 독점적으로 장악했다.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 표지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 표지

이로 인해 공적 영역이 사적 영역까지 깊숙이 침투하여, 사람들은 사적 활동조차 공적 기준으로 판단하게 되었다. 또한 국가가 도덕을 구체화한다는 생각이 내면화되어, 국가의 활동은 대의(大義)라는 명분으로 무조건 옳은 것이었다. 특히 정치권력이 윤리와 권력의 상호이입(相互移入)에 의해 정당화된 나머지, 정치의 악마적 속성은 교묘하게 은폐되었다.

일체의 권력과 가치의 원천은 천황이었다. 따라서 정치가들은 주체적인 판단과 책임을 결여하였다. 재판정에 선 전범(戰犯)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책임을 부인했다. 그들은 자신이 직접 판단하여 하지 않고 ‘받들어서’ ‘쫓아서’ 했을 뿐이다. 이런 분석을 통해 마루야마는 일본의 참전은 개인의 책임이라기보다 일본이라는 국가체제의 특징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런 환경에서 모든 일은 오로지 천황과의 접근성에 의해 좌우되었다. 특히 천황 직속의 황군(皇軍)은 천황의 권위에 기대어, 다른 부문에 대해 배타적으로 우월적 지위를 과시했다. 이것이 바로 일본이 군국주의 파시즘으로 흐른 배경이다. 그러나 그들은 천황이라는 절대자로부터 엄청난 정신적 억압을 받았고, 그 억압을 차례차례 아래로 자의적으로 이양(移讓)함으로써 정신적 균형을 유지했다.

이것이 군 내에서는 후임병에 대한 선임병의 가혹행위라는 부작용을 낳았고, 군 밖으로는 점령지에서 잔혹행위로 이어졌다. 그들에게 권력적 지배는 심리적으로 강한 자아의식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국가권력과의 합일화에 기초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권위에 대한 의존성에서 벗어나, 한 사람의 개인으로 돌아가면 그들은 그야말로 약하고 애처로운 존재인 것이다. 그것은 최고 정치가이든 말단 병사이든 마찬가지였다.

억압의 이양은 단순히 사람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대외정책에도 그대로 작동되었다. 열강의 억압에 시달린 일본은 주변국들에 그 억압을 이양하려고 했다. 그러한 팽창정책의 말단 하수인인 일반 병사들은 국내에서는 ‘비루한’ 인간이지만 점령지에서는 황군으로서의 궁극적 가치와 이어짐으로써 무한한 우월적 지위에 서게 된 것이다.

그러나 천황은 오로지 ‘유구한’ 전통에 근거한 허구적 실체에 불과하다는 점이 이러한 체제의 비극이다. 일본의 내셔널리즘은 그런 천황을 정점으로 국가권력의 극단적 확장이라는 독특한 형태로 생성·성장·몰락을 경험했다. 마루야마는 이를 두고 일본의 내셔널리즘이 ‘처녀성’을 상실했다고 비유했다. 이것은 내셔널리즘이 건강하게 전개될 바탕이 훼손됐다는 의미이다. 오늘날 일본의 모습에 ‘군국주의’ 일본이 겹쳐 보이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정신적·육체적 가혹행위가 군대의 고유한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일본이라는 국가 시스템의 총체적 가치를 반영하고 있다. 다만 군대라는 특수한 조직에서 집중적으로 발현되었을 뿐이다. 실제로 우리의 경우도 이런 잔재가 군대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두루 잔류해 있다. 우리는 일본 군국주의에 대해 분노하면서도, 정작 우리 안에 퇴적되어 있는 군국주의적 유산에 대해서는 여전히 무감각한 실정이다.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은 일본은 물론 서구에서도 일찌감치 고전이 되었다. 우리나라에는 1997년이 되어서야 뒤늦게 번역이 나왔다. 유감스럽게도 널리 읽히지는 않고 있다. 지일(知日)은 극일(克日)뿐만 아니라, 극기(克己)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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