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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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년 전 후지모토 다쿠미씨가 처음으로 산 카메라 ‘캐논FX’.
46년 전 후지모토 다쿠미씨가 처음으로 산 카메라 ‘캐논FX’.

1970년 여름, 스물한 살의 일본 청년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다. 청년의 손엔 생애 첫 카메라인 중고 캐논FX가 들려 있었다. 렌즈가 하나인 1안 리플렉스 카메라였다. 청년이 한국에 온 목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조선의 공예를 사랑한 민예운동 창시자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가 걸었던 발자취 그대로 한국을 여행하는 것, 또 하나는 아사카와 다쿠미의 묘소를 방문하는 것이었다.

아사카와 다쿠미(1891~1931)는 한국 민예에 빠져 야나기 무네요시와 함께 경복궁 내에 조선민족미술관을 설립했던 인물이다. 조선총독부 산림과에 근무하면서 광릉수목원 등 산림녹화에도 힘썼던 아사카와 다쿠미는 “조선식 장례로 조선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조선의 땅을 사랑했던 그는 서울시 중랑구 망우리 묘역에 독립투사들과 함께 묻혀 있다.

청년이 아사카와 다쿠미의 묘소를 찾으려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한국 민예품에 관심이 많았던 청년의 아버지는 아사카와 다쿠미의 삶에 감동을 받아 ‘다쿠미처럼 살아라’는 뜻에서 아들의 이름을 다쿠미로 지었다. 후지모토 다쿠미가 청년의 이름이다. 그 이름이 청년을 한국으로 이끌었다. 후지모토 다쿠미는 일본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한국 공예의 배경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후지모토 다쿠미는 야나기 무네요시가 남긴 약도 같은 그림지도를 들고 통도사를 거쳐 경주, 전라도, 경상도 등 전국을 돌았다. 야나기가 일본 잡지 ‘공예’에 실은 30년 전 한국의 풍경이 시간을 건너뛰어 그의 눈앞에 그대로 펼쳐졌다. 완만한 구릉, 옹기종기 몸을 맞댄 초가와 돌담, 흙먼지 날리는 시골길, 우물가에서 빨래하는 동네 아낙들…. 가난하지만 따뜻한 풍경들은 그가 잡지에서 보았던 사진들과 똑같았다.

시골 오일장은 삶의 축제 현장 같았다. 팔려도 그만 안 팔려도 그만인 듯 우시장의 사내들에겐 삶의 여유가 느껴졌다. 옛 가마터에 버려진 옹기들에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상여 뒤를 따르는 상주의 상복처럼 아름다운 의상을 그때껏 본 적이 없었다. 셔터를 누르는 손이 자신도 모르게 움직였다. 그렇게 후지모토 다쿠미(67)씨는 사진작가가 됐고, 이름대로 ‘한국인보다 한국을 사랑하는 사진작가’가 되어갔다.

첫 방문 이후 그는 46년간 한국을 70차례 가까이 방문했다.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초가가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고, 다시 아파트가 올라갔다. 비포장 시골길에는 아스팔트가 깔리고, 한적한 풍경 속으로 이젠 KTX가 달리고 있다. 한국의 근대화와 함께 달라진 풍경이 시대별로 그의 카메라에 고스란히 기록됐다. 일본인의 눈으로 본 한국의 모습은 달랐다. 그의 눈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한 한국의 아름다움을 포착했다. 발전의 속도만큼 안타깝게 사라져가는 것들이 그의 사진 속에 담겼다. 포크레인이 서울 종로의 조선시대 뒷골목 피맛골을 덮치기까지 ‘길의 기록’을 남기기 위해 6년 동안 한국에 드나들며 도면을 만들고 1m 간격으로 사진을 찍어 파노라마로 연결했다.

4만6000점 국립민속박물관 기증

제주도, 울릉도까지 전국 방방곡곡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는 그렇게 남긴 4만6000여점의 필름·디지털 사진을 2011년 국립민속박물관 측의 요청을 받고 기꺼이 기증했다. 지난 9월 26일 저녁 서울 종로구 인사동 찻집에서 후지모토 다쿠미씨를 만났다. 그는 대한건축학회 사진동우회 초청으로 ‘일본 사진가가 엮어낸 한국’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기 위해 한국에 잠깐 다니러 와 틈을 냈다.

“왜 한국에 몰입하나?” 이 질문을 그는 지금까지 숱하게 받았다고 한다. 돈이 되는 일도 아니다. 일본에서 찍는 광고사진 등이 그의 주 수입원이라고 했다. 그는 “아사카와 다쿠미처럼 산다는 생각으로 살았다. 이름이 삶을 좌우한 것 같다”고 했다. 그는 “한국을 통해 사진의 매력을 알고, 사진 속 한국에 매료돼갔다”고 말하고 긴 설명을 덧붙였다.

“직업가는 돈을 받고 사진을 찍지만 작가는 자신의 돈을 들여 하나부터 만들어갑니다. 산이 없으면 산을 만들고, 안 되면 부수고 다시 만들죠. 거기에서 작품이 나옵니다. 일본에서 매년 새 인간 대회가 열립니다. 1m도 안 날아가고 떨어지는 허망함이 바로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멀리 날아가게 만드는 것은 과학의 역할이죠. 실패를 거듭하고 허망함을 맛보지만, 그 노력의 과정이 예술입니다. 전시회에 관객이 2~3명밖에 안 오고 허망함을 느낀다고 해도, 꿈을 꾸는 그 과정이 중요한 거죠. 그 과정을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돈을 밝히고 대가를 기대하는 것은 작가 정신이 아닙니다. 요즘 작가들이 ‘돈이 되는 사진’만 좇아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사진가에게 필름은 분신과도 같은 것이다. 40여년 작업을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하기까지 망설임은 없었을까. “기증 요청을 받고 처음엔 고민했습니다. ‘한국의 것은 한국으로’를 주창한 야나기 무네요시의 말을 떠올렸습니다.” 그의 대답이다. 한국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것이 자신의 사명감이 되었다고 말하는 그 앞에서 고개가 숙여졌다.

그가 앉은 의자 옆에 큼직한 배낭과 카메라 가방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배낭을 들어 보니 어찌나 무거운지 꼼짝도 안 했다. 20㎏이 넘는다고 했다. 길 위의 삶이 가방 안에 들어 있었다. 프린터기까지 싸들고 다닌단다. 무거운 가방을 숙소에 안 놔두고 왜 들고 다니나 싶었더니 이유가 있었다.

한국에 오면 일부러 값싼 여관에 묵는다고 한다. 한국인의 정서를 그대로 느끼고 싶어서다. “한국 여관은 이상하게 밤보다 낮에 손님이 더 많고 비싸요. 단골 여관이 문을 닫는 바람에 새로운 곳을 찾았는데 밤 10시 이전에 들어가면 3만원, 이후부터는 2만5000원이래요. 어제도 일찍 가는 바람에 방이 없어 한참 기다렸어요. 10시까지 인터뷰해야 해요.” 그가 웃으면서 장난스럽게 말했다. 문도 제대로 안 닫히는 5000원짜리부터 전국 여관을 섭렵했다는 그는 ‘한국 여관’을 주제로 책을 내면 아주 잘 쓸 수 있을 것 같다고 농담을 했다.

비자도 잘 안 나오던 시절부터 한국을 오갔으니 에피소드만 모아도 책 몇 권은 거뜬할 것이다. 강화도에 있는 초가 교회를 보고 흥분해서 찍다가 간첩으로 몰리기도 하고, 스탬프로 도배된 여권 탓에 카메라 장수로 오해받아 세관에서 렌즈를 압수당하기도 했다. 그는 모든 영수증을 버리지 않고 모으고 있다. ‘영수증 일기’인 셈이다. 영수증을 보면 날짜와 장소, 한 일이 모두 나오기 때문이다. 숱하게 한국을 다니면서도 한국어는 안 배웠다. 그 이유를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귀가 안 들리면 다른 감각이 발달하게 돼 있습니다. 저는 사람의 눈과 표정을 봅니다. 말보다 느낌으로 알게 되는 것이 훨씬 더 많아요. 덕분에 도와주려는 사람들도 많이 만났습니다. 너무 많이 아는 것보다 몰라서 덕을 입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방을 다니면서 “뭐하러 왔느냐” “도와주겠다”면서 다가서는 한국인의 넉넉한 인심을 수없이 경험했다. 그는 대범하고 통이 큰 한국인의 성격이 무엇보다 좋다고 말했다.

후지모토 다쿠미(오른쪽)와 그의 아버지. 1970년 한국 첫 방문 때 서울 망우리묘역 ‘아사카와 다쿠미’ 묘를 찾았다.
후지모토 다쿠미(오른쪽)와 그의 아버지. 1970년 한국 첫 방문 때 서울 망우리묘역 ‘아사카와 다쿠미’ 묘를 찾았다.

목표는 ‘한국 민속 50년의 기록’

그는 작품을 통해 일본에 한국 문화를 알리는 일을 꾸준히 해왔다. 일본 잡지 ‘삼천리’ ‘청구’에 한국 포토에세이를 오랫동안 연재했다. 1974년 일본에서 펴낸 ‘한국인’(초토사)을 시작으로 올봄에 한국에서 출간한 ‘내 마음속 한국’(눈빛)까지 한국과 일본에서 10여권의 사진집을 출간했다. 지난 9월 서울 종로구 관훈동 가나인사아트센터 사진전을 비롯해 양국을 오가며 전시도 이어왔다.

국립민속박물관에 작품을 기증한 후 2012년 ‘7080 지나간 우리의 일상’이라는 제목으로 박물관 측에서 전시를 준비해줬다. 전시에 앞서 그는 40여년 전 그를 사진작가의 길로, 한국 속으로 이끌었던 첫 순례길을 다시 찾아나섰다. 그 당시 촬영을 했던 똑같은 장소, 앵글에서 시간의 흐름을 담기 위해서였다. 모든 것이 변해 있었다. 돌로 된 소 여물통 만드는 석공을 만나기 위해 남원의 한 마을을 찾았던 기억을 더듬어 발걸음을 옮겼다. 기대 없이 찾은 그곳에서 그는 당시에 만났던 석공의 동생을 만났다. 석공도 죽고 돌공장도 사라지고 모든 풍경이 바뀌었지만 사진 속 바위산은 그대로였다. 40년의 시간을 넘어 석공 대신 동생을 세워놓고 바위산을 배경으로 똑같은 사진을 찍었다. 그는 그때 작품도 중요하지만 사진을 기록으로 남기는 중요함을 다시 깨달았다. 그리고 다시 목표가 생겼다. ‘한국 민속 50년誌(1970~2020)’를 내는 것이다.

그가 긴 작업을 이어오는 동안 그를 이끌어준 사람들이 많았다. 한국 고찰 순례의 길을 터준 미술평론가 석도륜, 일본 속 백제로 그를 안내해준 재일동포 작가 김달수 등이 큰 영향을 미쳤다. 그동안 한국의 모습을 담는 데 집중했던 그는 지난해부터 일본 속 한국의 뿌리를 카메라에 담고 있다. 한국과 일본의 연결 고리를 찾고 싶어서다. 지난 3월 일본 도쿄 갤러리 ‘톰(TOM)’에서 ‘일본 속의 백제촌’이라는 제목으로 전시회도 열었다. 오는 11월 18일에는 오사카 한국문화원에서도 열린다.

그의 숙박 시간에 맞춰 밤 10시 넘어 긴 인터뷰가 끝났다. 그가 웃으면서 “이젠 여관에 들어갈 수 있겠다”고 말하고 일어서는데 생각보다 몸집이 작았다. 그가 양어깨에 무거운 가방을 훌쩍 둘러멨다. 어두운 골목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이 단단해 보였다. 그의 46년 한국 사랑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작업에 대한 관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황은순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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