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리 골드워터
배리 골드워터

미국 대선이 코앞이다. 아무리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도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는 여전히 세계적 관심사이다. 그런데 미국은 누가 대통령이 되든 대통령 개인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나라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입법 권력이 막강한 가운데, 공화·민주 양당은 각각 이미 확립된 이념적 노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미국 정치의 특징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짚어 보아야 할 고전이 있다. 바로 배리 골드워터(Barry Goldwater·1909~1998)의 ‘보수주의자의 양심’(The Conscience of a Conservative·1960)이다. 그는 무려 30년 동안 연방 상원의원을 지냈으며,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기도 했다. 유감스럽게도 그의 보수주의는 우리나라에 ‘깡보수’로 알려져, 학계나 출판계로부터 외면을 받았다. 이 책도 우리말로 번역조차 되지 않고 있다.

아마 ‘깡보수’라는 말을 알아듣는다면, 그는 주저없이 “그래, 맞다! 내가 깡보수다!”라고 외칠 것이다. 그만큼 그는 보수이념에 미련스러울 정도로 투철했던 인물이다. 대통령선거에 나서서도 어떻게 이기느냐보다 어떻게 소신을 고수하느냐에 열중했다. 결과는 참패였다. 하지만 그의 보수주의는 차츰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미국 정치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로 인해 그는 ‘가장 영향력 있는 낙선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잘 알다시피 자유와 평등은 인류의 이상이다. 그러나 양자는 상호갈등적인 탓에 현실적으로 적절한 조합이 불가피하다. 바로 그 조합의 방식이나 수준이 한 국가나 정당의 이념적 정체성을 결정한다. 대체로 자유를 강조하는 경향이 보수주의이고, 평등을 강조하는 경향이 진보주의이다. 시대나 국가마다 그 양상은 각각 상이하다.

미국의 경우 공화당이 보수를, 민주당이 진보를 표방한다. 유럽에 비해 미국 정당의 이념적 차이는 미미하여, 어느 당이 집권해도 차이는 별로 크지 않다. 하지만 양당의 정책방향만큼은 확연히 다르다. 공화당이 작은 정부·연방예산 억제·감세·사회보장 축소 등을 내세우는 반면, 민주당은 큰 정부·연방예산 증액·증세·사회보장 확대 등을 내세운다.

이처럼 이념이 다르면 정책방향이 상이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념은 정책의 플랫폼(platform)이기 때문이다. 설사 자신의 정책이 유권자에게 인기가 없더라도 근본을 함부로 바꿀 수 없다. 또한 상대방의 정책이 아무리 인기가 있더라도 그것을 쉽게 모방할 수도 없다. 정당은 각각 자기 고유의 정책을 가다듬고 국민은 그때그때 필요한 정당을 선택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정권교체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미국도 이러한 정치 시스템이 저절로 구축된 것은 아니다.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에 걸쳐 미국은 ‘자유’의 시대를 구가했다. 산업자본도 이러한 자유를 만끽하며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이룩했다. 반면 자본의 횡포, 만성적 공급과잉, 노동자 권리 침해, 시민사회 위축 등의 문제가 깊어졌다. 이러한 모순이 대공황으로 폭발했다. 이를 계기로 민주당이 루스벨트와 트루먼을 앞세워 1932년부터 20년간 내리 집권하며 뉴딜정책을 강력하게 전개했다.

뉴딜정책은 큰 정부를 통해 공적 부문의 역할을 강화하고 평등을 지지하는 노선이었다. 1952년부터 8년간 공화당의 아이젠하워가 집권하였으나 (골드워터가 보기에는) 뉴딜정책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더구나 1960년 대선에서 민주당이 다시 정권을 탈환할 기세였다. 이때 골드워터는 미국의 보수주의가 커다란 위기에 빠졌다고 진단했다.

그는 이런 인식에 기반하여 ‘보수주의자의 양심’을 목청껏 토로했다. 그는 이렇게 자유가 위축된 환경에서 ‘자유를 수호하고 확대하는 것’이 바로 보수주의자의 책무라고 역설했다. 그는 보수주의에 ‘따뜻한’ 등의 수식어를 붙이는 것조차 비판하며, 보수주의자는 보수적 가치에 철두철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순식간에 미국 보수주의의 기수로 떠올랐다.

1964년 그는 록펠러 등 명망가 그룹을 물리치고 극적으로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후보 수락연설에서도 자신의 가치를 재차 확인하며 “자유의 수호에 있어서 극단주의는 결코 악이 아니다”라고 외쳤다. 본선에서도 거침없이 소신을 피력했지만 그의 비타협적인 태도가 곳곳에서 반발을 초래했다. 결국 ‘극단주의’라는 오명을 들으며 참패하고 말았다.

‘보수주의자의 양심’ 초판 표지
‘보수주의자의 양심’ 초판 표지

그러나 시간이 조금 흐르자, 그의 목소리는 차츰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했다. 특히 그의 보수주의는 로널드 레이건 등 차세대 정치인들이나, 에드윈 퓰러 전(前) 헤리티지재단 이사장 등 젊은 지식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1980년 레이건의 집권으로 그의 보수주의가 한껏 빛을 발하게 되었다. 미국인들에게 ‘위대한’ 대통령으로 기억되는 레이건의 이념적 스승이 바로 골드워터인 것이다. 그는 평생 공화당의 정신적 지주로 존경받았다.

‘보수주의자의 양심’은 1960년 초판이 나온 이래 수백만 부가 발간되었다.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이 책의 내용은 다소 거칠고 낡았다. 그러나 ‘자유시장, 작은 정부, 개인의 자유, 강력한 국방’ 등 핵심적 메시지는 여전히 생동적이다. 이러한 가치들이 바로 미국 보수주의의 기반이자 공화당 노선의 전범(典範)이 된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오늘날 미국 양당정치의 가치체계가 정립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는 이념대립이 과도하니 차라리 이념을 버려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언뜻 보아 일리 있는 주장 같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기본 가치를 중심으로 이념이 정상적으로 토론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이념은 늘 기형적으로 전개되었다. 심지어 그것은 ‘내용’이 아니라 ‘행태’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변질되기도 했다.

이런 허술한 이념으로는 정책적 플랫폼을 만들 수 없다. 정책은 즉흥적이고, 심지어 상대의 정책을 베끼기도 한다. 이렇게 탄생하는 정책들은 지속적이지 못하고, 정당들의 정체성은 더욱 모호해진다. 이러한 정치는 포퓰리즘적 경쟁으로 흐를 우려가 농후하다. 말할 나위도 없이, 잘못된 기형적 이념은 타파(打破)해야 한다. 그러나 견실한 이념을 우리 실정에 맞게 확립(確立)하는 일은 오히려 절실한 과제이다.

‘보수주의자의 양심’은 미국의 보수주의가 흔들릴 때 보수적 가치를 열정적으로 일깨웠다. 이를 통해 상대 진영의 가치도 보다 명료해졌다. 이처럼 한 진영의 건전한 발전은 궁극적으로 국가 전체의 발전으로 이어진다. 이런 사례는 우리에게 타산지석(他山之石)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정치도 더 늦기 전에 ‘이념이란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해 보아야 한다.

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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