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이순신

참된 지도자가 그리운 순간이다. 아마 우리 역사상 최고의 지도자는 단연코 이순신(1545~1598)일 것이다. 그는 1598년 음력 11월 19일 겨울 바닷바람 속에서 전사했다. 마침 다음주 토요일(12월 17일)이 기일이다. 공(公)의 영전에 삼가 머리를 조아리는 바이다.

그는 임진왜란이 발발한 해(1592년) 정월 초부터 순국 이틀 전까지 거의 7년 동안 일기를 썼다. 일기에는 원래 ‘임진일기’ ‘병신일기’ 등 연도별로 그 해의 갑자명이 붙어 있었다. 그러다가 1795년 정조의 명(命)으로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가 간행될 때, 일기 전체를 ‘난중일기(亂中日記)’라고 명명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난중일기’는 언뜻 보아 무미건조하다. 날씨만 달랑 적은 날도 있고,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가 전부인 날도 있다. 워낙 핵심적인 사안만 적다 보니 날짜별로 분량이 그리 길지도 않다. 또한 그의 글은 군더더기 하나 없이 간결하다. 단 몇 장만 넘겨 보아도 그가 얼마나 정갈하게 정돈된 사고의 소유자인지 알 수 있다.

이순신은 흔히 성웅(聖雄)이라고 불린다. 이로 인해 ‘수루(戍樓)에 홀로 앉아’ 자나 깨나 나라만 걱정한 초인처럼 보인다. 실제로 그는 비범한 능력을 발휘했다. 무엇보다 공적(公的) 의식이 투철한 사람이었다. 발포(鉢浦·오늘날 고흥) 수군 책임자 시절, 전라좌수사가 거문고를 만들겠다며 관아 마당의 오동나무를 베어오라고 명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나라의 물건임을 들어, 직속상관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당시 군인들에게 활은 기본 병기였다. 그는 자신이 장군이라 하여 결코 활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전라우수사와 함께 활을 쏜 날, ‘그가 아주 형편없으니 우스운 일’이라고 걱정했다. 그는 주변사람들을 애틋하게 대했지만, 직무를 태만한 관리들을 단호하게 처벌하고 악질적 범죄에는 극형도 불사했다. 그는 자신이 솔선수범하며 항상 엄정한 군기를 강조했다.

그가 탁월한 전략가라는 점은 굳이 언급하기조차 민망하다. 그는 지리와 기후를 토대로 그때그때 적합한 전략을 세웠다. 일정한 전과를 올리면 무리한 추격을 자제하는 등 전장(戰場)을 냉정하게 관리했다. 전투 후에는 반드시 안전한 정박지를 골라 휴식했다. 그는 수십 차례 크고 작은 해전에서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전쟁사에 유례가 없는 일이다.

또한 그는 우리 역사상 보기 드물게 정보에 민감한 장수였다. 척후선과 척후병을 적극적으로 운영했다. 현지 사람들의 말이나 왜군에 잡혔다가 도망온 사람들의 말을 경청했고, 투항해 온 왜인들도 적절히 활용했다. 군중(軍中)에서 잔치를 벌일 때도 먼저 주위의 척후태세부터 점검했다. 하지만 확실치 않은 정보나 잘못된 정보는 세심하게 분별했다.

정유재란 때 조정은 일본 첩자의 거짓정보에 속아 이순신에게 출동 명령을 내렸다. 부산 쪽으로 가서 도해(渡海) 중인 적장을 공격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정보를 신뢰하지 않아 출동하지 않았다. 이것이 나중에 한양으로 끌려가 투옥되고 죽을 위기에 처하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그는 때론 왕명(王命)도 거부할 만큼 소신과 강단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포용적 리더십은 깊이 내면화된 인간적 품격에서 우러나왔다. 그것은 요란하지 않고 은근했다. 그는 수시로 사람들을 불러 밥도 먹고 술도 마셨다. 집무실을 개방하여 다양한 의견을 청취했다. 처사가 공정하여 어디를 가나 장병들과 백성들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그가 함거(檻車)에 실려 한양으로 끌려갈 때, 수많은 백성들이 몰려나와 울부짖었다.

‘난중일기’(국보 제76호)
‘난중일기’(국보 제76호)

이처럼 그는 ‘성웅’이라는 칭호에 걸맞은 비범함을 가졌다. 그러나 동시에 보통 사람의 정서와 한계를 지닌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기도 했다. 자주 병치레를 했고, 늘 가족 걱정에 애를 태웠다. 주변 사람들의 일에도 세심한 애정을 보였다. 또한 거의 강박증 수준으로 정적(政敵)을 공격했다. 백의종군 시 어느 지방관의 홀대를 못내 서운해 하기도 했다.

그의 몸은 수시로 아프고 불편했다. 가끔 땀을 흘려 옷과 이부자리를 흠뻑 적셨다. 코피를 한 되 이상 흘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을 응대하며 술을 마셔야 했다. 또한 1592년 당포해전에서 ‘왼편 어깨 위에 탄환을 맞아 등으로 뚫고 나갔다’. 이 총상이 곪아터져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다. 이래저래 그는 무쇠같은 강건함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또한 그는 여느 필부(匹夫)와 마찬가지로 늘 가족을 걱정했다. 피붙이와 종을 수시로 고향에 보내 홀어머니의 안부를 알아보았다. 사정이 허락되면 자기가 직접 달려갔다. ‘하루 내내 노를 바삐 저어’ 병환 중인 어머니를 찾아뵈었다. ‘눈물을 머금고 서로 붙들고 밤새 위로하며 기쁘게 해드렸다’. 어떤 때는 ‘적을 토벌하는 일이 급해서 오래 머물지 못했다’.

언젠가 아내의 병세가 위증하다는 전갈을 받자 ‘아들 셋과 딸 하나는 어찌 살아갈꼬?’라고 탄식했다. 가족에 대한 애절함은 셋째 아들 면(葂)의 전사 소식을 접하며 절정에 달했다. 약관 20세의 청년이 고향에 침입한 왜군과 분연히 맞서다 전사한 것이다. 그는 ‘너를 따라가고 싶지만 남아 있는 식구들을 생각해 참을 뿐’이라고 오열했다.

그는 처음에는 원균(元均)과 합동작전을 벌여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시기심, 술주정, 여색(女色) 등 원균의 탈선을 목격하며 차츰 사이가 벌어졌다. 그는 곳곳에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원균에게 원색적 비난을 퍼부었다. 원균은 조정의 당파 분쟁을 이용해 수시로 그를 흔들었다. 아마 그는 이런 부당한 현실에 대해 울분을 토한 듯하다.

그를 전라좌수사로 추천한 것이 바로 유성룡이다. 감옥에서 풀려난 다음날, 그는 ‘어두울 무렵 성 안으로 들어가 정승과 이야기하다가 닭이 울어서야 헤어져 나왔다’. 그에게 적대적인 조정에서 유성룡은 거의 유일한 지지자였다. 이순신이 차가운 겨울바다에서 전사한 바로 그날, 얄궂게도 유성룡은 조정에서 쫓겨났다. 그는 낙향하여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이순신은 결코 타고난 성웅이 아니다. 과거(科擧)도 서른둘에 합격했다. 그는 평범한 인간이 부단한 단련과 절제를 통해 비범함에 이른 인물이다. 그만큼 그의 인간적 공감의 폭이 넓고 깊다. 그는 가족 걱정으로 애를 태우는가 하면, 나라 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렇다고 사(私)로 말미암아 공(公)을 그르친 적은 결코 없다. 이처럼 소탈하면서도 균형 잡힌 품성이 바로 그의 강인한 정신력의 바탕이 된 것이다.

하지만 왕조시대에 국왕과 불화를 겪으며 전쟁을 치르기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랴. ‘난중일기’는 거친 세파(世波)를 막아내기 위해 그가 밤마다 홀로 쌓아올린 방파제이다. 붓을 붙들고 마음을 다잡으려고 애쓰는 공(公)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가슴이 먹먹하다.

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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