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김선미, 김매자, 정혜진 ⓒphoto 염동우 영상미디어 기자
왼쪽부터 김선미, 김매자, 정혜진 ⓒphoto 염동우 영상미디어 기자

41년 전인 1975년 서울 명동예술극장 무대. 머리를 뒤로 빗어 넘긴 곱상한 젊은 여성이 삼베 저고리 차림을 한 채 휘이휙 물 흐르듯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국무용’이라 했는데, 한복은 입지도 않았다. 더구나 맨발이었다. “이사도라 던컨 흉내를 내나? 한국무용을 한다면서….” 여기저기서 비난이 쇄도했다.

“‘지랄춤’이라고도 불렸지요. 한국무용은 한복을 입고 버선을 신어야만 한다는 고정관념이 강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당시 나이 32세의 혈기방장했던 나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 조선시대에 버선을 신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됐을까, 양반과 귀족만을 위해 복무하는 게 예술은 아니지 않은가, 하고요”

한국 창작춤을 대표하는 최고의 춤꾼 김매자(74)씨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여전히 곱고, 기운이 넘쳤다. 특유의 눈웃음과 함께 미소를 띨 땐 ‘낭랑 18세’ 소녀였지만, 한국무용계의 현실에 대해 열변을 토할 땐 영락없는 ‘아마조네스 전사(戰士)’였다.

김매자씨가 이끄는 창작무용집단 ‘창무회’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민간 무용단이다. 창작춤의 불모지였던 한국무용계에 파격적인 도전과 실험정신을 더해 창작춤의 모태가 된 창무회가 창단 40주년을 맞았다. 이를 기념한 ‘창무 큰 춤판’(10월 4일~12월 28일) 공연이 홍익대 인근 포스트극장에서 진행되고 있다. 창무회 출신 19명 안무가의 릴레이 공연이다.

“그동안 척박한 환경 속에서 공연을 만들어왔습니다. 이번 역시 크라우드펀딩으로 어렵게 마련했습니다. 가까운 일본이나 대만만 해도 정부 차원의 순수 예술가 지원이 엄청납니다. 우리나라는 어떤가요? 그림자처럼 예술가들 등 뒤에 붙어 있는 경제적 어려움에 절망을 겪으면서도 우리는 매일 춤을 추고 연습을 놓지 않습니다. 춤이라도 끊임없이 추고 있어야 희망도 있을 것 같기 때문이지요.”

강원도 고성에서 태어난 김매자씨는 12세 때 처음 춤과 인연을 맺은 후 부산과 서울에서 우리 전통음악과 춤 무대기법을 익혔다. 이화여자대학교 체육과(한국무용 전공) 졸업 후 1970~1991년 모교 무용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이번 공연에는 김매자씨의 삶이 그대로 투영됐다. 그는 1976년 제자 5명과 함께 창무회를 창단했다. “대학 3학년 때 서울시민회관에서 미국 무용수 엘빈 에일리의 내한공연을 봤어요. 자신을 온통 드러내 꿈틀거리는 그의 몸짓에 감동했습니다. 그동안 춤을 그저 예쁘게만 추려고 했던 나를 되돌아보게 됐지요. 기존 전형적인 춤에서 벗어나 시대의 변화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춤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창단 후 김매자는 ‘전통’을 주제로 한 인문학 토론에 꾸준히 참가하고 민속의 원형을 간직한 굿, 농악, 탈춤 등 전통춤을 연구하며 자신의 춤에 녹여냈다. 쪽 찐 머리, 비단 옷감으로 만든 단아한 의상과 정제된 동작이 우리 춤의 전부로 인식되던 1970년대에 그는 맨발에 삼베 저고리를 입고 자유분방한 춤사위를 선보였다.

김매자의 춤이 40년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한국 전통춤을 연구·복원하는 일을 시작으로 그 전통의 토대 위에 한국 창작춤의 틀을 마련하는 작업을 진행해왔기 때문이다.

그 일환으로 김매자씨는 1980년대 후반에 발표한 ‘춤본(本)’ 시리즈를 통해 한국무용 동작의 구조적인 모형화 및 정형화 작업을 추구했다. 승무의 염불, 타령, 굿거리 등을 기초로 만들어진 ‘춤본 I’(1987)과 ‘춤본 II’(1989)가 그 결과물.

사비 털어 무용단 꾸려와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발행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김매자’ 편에서 “한국무용의 구조적인 결정체 만들기(‘춤본 I’)와, 즉흥성의 효과적인 수용을 추구(‘춤본 II’)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적고 있다. 그는 또 1988년 서울올림픽 폐막식 때 안무한 ‘떠나가는 배’와 2002년 요코하마월드컵 폐막식 기념 오페라 ‘춘향’ 안무를 통해 세계인에게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각인시키기도 했다.

창무회는 ‘한국적인 춤의 언어를 만들어내는 것’을 모토로 그동안 국내 무용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79년 뉴욕 공연을 시작으로 ‘뉴욕 리버사이드 댄스 페스티벌’, 핀란드 ‘쿠오피스 댄스 앤드 뮤직 페스티벌’, 인도 ‘국제 무용제’, 프랑스 ‘리옹 댄스 비엔날레’, 폴란드 ‘셀레지안 컨템포러리 댄스 컨퍼런스’, 일본 ‘도쿄 국제 연극제’ 등 해외 무대에도 활발히 참여해왔다. 2006년 창무회와 프랑스 루베국립안무센터 공동제작으로 김매자와 카롤린 칼송의 공동안무 작품을 한국과 프랑스 양국에서 올리는 등 지금까지 국내외에서 6000여회를 공연했다.

김매자씨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그의 제자들이다. 창무회 출신만 200여명에 이른다. 그는 “제자들을 통해 몰랐던 것을 깨닫고, 새로운 것을 깨우치기도 했다. 제자들의 피와 땀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창무회를 끌어올 수 있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번 창무회 40주년 공연도 그의 제자들, 또 그 제자의 제자들이 펼치는 무대다.

1982년 창무회에 입단한 정혜진(57) 숙명여자대학교 전통문화예술대학원 객원교수는 이번에 태평무를 모티브로 한 ‘신맞이 05’라는 작품을 선보인다. “창무회에서 제 춤의 근간을 만들었어요. 다양하고 실험적인 창작 작업을 통해 제2의 ‘춤 교육’을 받은 곳이죠. 언제나 창무회 출신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달하-달의 강’이라는 공연을 올린 김선미(57) 창무예술원 예술감독은 창무회에 입단한 지 올해로 34년째를 맞는다. “창무회에서 활동하는 선배들을 보며 내가 춤출 곳은 무조건 창무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곳에서 선후배들과 춤에 대해 토론하고 연구하는 과정이 너무 좋았어요. 함께 활동했던 선배들이 하나둘 자기 길을 찾아 떠났지만 제가 있어야 할 곳은 이곳이라고 여겨 지금까지 오게 됐죠.”

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김매자 대표가 “자, 인터뷰는 이 정도로 하고 연습하러 가야지!”라며 목청을 높였다. 그는 “60년 넘게 무대에 오르고 있지만 지금도 여전히 무섭다”며 “연습이 모자란 춤은 관객을 속이는 일”이라고 일갈했다. 그 옆에서 나이 60을 앞둔 애제자 둘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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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정민 조선pub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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