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야’ 앞에는 식당 문을 여는 11시 이전부터 대기 손님들로 북적인다. ‘이세야’는 저녁은 팔지 않는다.
‘이세야’ 앞에는 식당 문을 여는 11시 이전부터 대기 손님들로 북적인다. ‘이세야’는 저녁은 팔지 않는다.

짧으면 6000일, 길면 1만일 정도다. 50대인 필자에게 허가된 앞으로 살날이다. 오래, 건강하게, 즐겁게 살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 앞으로 살 6000일, 1만일을 머릿속에 새기면 그만큼 모든 것이 확실히, 그리고 정직하게 보인다.

인생이 짧다고 느끼는 사람에게는 앞으로 살날의 수에다 3을 곱하기를 권한다. 1만일 인생이라 하면 3만의 숫자가 나온다. 살면서 먹어야 할 끼니 수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포만감이 들 정도의 엄청난 식사가 인생 앞에 펼쳐져 있는 셈이다. 노년이 되면 식욕도 떨어진다고 하지만 주변을 보면 그렇지도 않다. 노인들도 왕성한 식욕을 과시한다. 최근 서울에 갔을 때의 경험이지만, 어느 식당에나 60~70대로 보이는 꽤 많은 노인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웃고 떠들며 반주도 즐기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3만번의 식사 가운데 맛과 생의 환희를 느끼며 진짜로 즐기는 식사는 얼마나 될까? 필자의 경험에 바탕한 판단이지만, 대략 30% 정도에 불과하다고 본다. 나머지는 그야말로 살기 위해 채우는 끼니들이다. 먹는 것에 특별한 관심을 갖는 것은 그 같은 이유에서다. 1만번 남은 식사를 어떻게 기억에 남을 명장면으로 만들어갈 것인가에 나는 관심을 쏟는다. 당연한 얘기지만, 인생은 추억과 기억을 통해 증폭될 수 있다. 인생에서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먹는 기억과 추억은 말할 것도 없다.

일본은 식사에 관한 한 기념비적인 추억과 기억을 증진시킬 수 있는 최적의 나라다. 스토리텔링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미쉐린 스타 레스토랑이 일본에 즐비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양적인 면뿐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일본은 좋은 음식과 식당 천국이다. 음식 수준만이 아니라 가격도 합리적이다. 미쉐린 스타를 받지 못하더라도 일반 서민들의 사랑을 받는 좋은 식당들이 즐비하다.

최근 도쿄에 있는 덴푸라 전문집 ‘이세야(伊勢屋)’를 찾았다. 2015년 12월에도 들렀던 곳이다. 일본을 떠나기 하루 전 여행을 매듭 짓는 추억의 장소로 삼기 위해 들렀지만 음식 맛도 못 본 쓰라린 경험이 있다. 1시간을 헤맨 끝에 어렵게 찾은 레스토랑 문에는 ‘보수공사로 폐를 끼쳐 미안합니다’라는 팻말이 걸려 있었다.

1층의 경우 전체 좌석이 14개에 불과하다.
1층의 경우 전체 좌석이 14개에 불과하다.

국가 유형문화재가 된 건물

이번에 식당이 문을 닫지 않았다는 걸 확인한 후 일본에 들르는 즉시 이세야로 직행했다. 점심 피크 시간 전인 오전 11시 일찌감치 찾아갔다. 이세야는 저녁을 팔지 않는다. 점심만 파는데 예약도 받지 않는다. 게다가 일주일에 한 번은 쉰다. 이세야는 도쿄 동북쪽 다이토구(台東區)에 있다. 도쿄 사람들에게는 ‘도쿄 바깥’처럼 느껴지는 일종의 오지다. 지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곳이기에 큰맘 먹지 않는 한 들르기 쉽지 않은 동네다.

이세야는 메이지(明治)시대 창업 이래 127년간 한자리를 고수하면서 동일한 메뉴로 장사를 해온 곳이다. 현재 창업주의 4대 후손이 주인이다. 창업 당시의 건물은 국가 유형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1945년 3월 10일 미군의 도쿄 대공습 때 살아남은 몇 채 안 되는 건물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당시 공습에서 숨진 사상자는 30만명에 달한다.

일본인들이 기억하는 이세야는 전쟁의 참상이자 비극의 흔적에 해당한다. 당시 도쿄는 목재 건물들이 많아서 공습 후 일주일 내내 불바다였다고 한다. 그런 불바다에서 이세야가 들어선 목재 건물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일본식 2층 목재 건물로, 당시의 흔적인지 알 수 없지만 건물 표면이 전부 검게 그을려 있다. 세월의 관록으로도 느껴진다. 1년 전 수리를 했다는데, 지진이 많은 나라라는 점을 감안하면 곧 무너질듯 위태로워 보인다. 건물 앞으로 가니 ‘덴푸라’라는 한자 ‘天麩羅’가 금(金)장식으로 걸려 있다. 이세야라는 상호는 귀퉁이에 작게 걸려 있다. 이름보다 자신의 장기를 앞세우는 레스토랑이다.

점심이 시작되는 11시에 온 것은 현명한 결정이었다. 벌써 10여명이 옹기종기 기다리고 있었다. 테이블 4개에 다다미 2쪽 방 하나가 전부다. 손님을 꽉꽉 채워 넣더라도 겨우 24명밖에 앉을 수 없을 만큼 협소하다. 기다리는 동안 손님들의 면면을 살펴봤다. 근처 건설현장에서 온 인부들, 70대 노부부, 자전거를 타고 온 30대 어머니와 7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이, 호주에 일하러 간다는 두 명의 20대 여성….

가장 비싼 2500엔짜리 덴푸라 모둠의 메인코스.(위) 덴푸라 요리 이후 제공되는 밥과 국. 가볍고 담백한 맛이다.
가장 비싼 2500엔짜리 덴푸라 모둠의 메인코스.(위) 덴푸라 요리 이후 제공되는 밥과 국. 가볍고 담백한 맛이다.

127년 역사의 튀김집에 모인 손님은 일본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한자리에 모인 공통점은 노포 이세야가 만드는 튀김 요리를 즐기기 위해서다. 이세야는 검은색 우산을 대기용 의자 주변에 배치해두고 있다. 뜨거운 햇살을 피하라는 의미다. 때마침 초겨울의 햇볕이 따갑게 느껴진다. 30분을 기다린 뒤 안으로 들어갔다. 첫눈에 역사가 느껴진다. 집 내부는 물론 식탁, 의자, 창문, 지붕 등 모든 것이 연륜이 느껴지는 목재로 돼 있다. 검게 그을린 탓이지만, 실내가 무척 어둡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햇볕 속 먼지 입자가 유난히 크게 느껴진다.

일본의 대다수 노포들이 그러하듯 공간에 거품이 없다. 들어가면 바로 식탁과 마주친다. 오른쪽에는 3㎡ 남짓한 주방이 있다. 식탁 서비스를 하는 2명의 종업원과 주방 요리사 2명 등 모두 4명이 일한다.

“상석(相席) 괜찮으시겠어요?”

상석이란 합석(合席)을 의미한다. 의례적인 질문이지만, 일본의 노포에서는 상석이 기본이다. 상석과 합석은 일본과 한국의 서로 다른 세계관을 나타내는 단어 중 하나다. 한자로 풀이할 때 상석은 서로 마주 보면서 앉는다는 의미다. 합석은 마주 볼지, 옆으로 가서 앉을지, 아예 둥글게 앉을지에 대한 구별이 없다. 상석은 상대와의 공간이나 틈을 전제로 한 관계다. 합석은 말 그대로 하나로 합쳐진다는 의미다. 일본인은 아무리 오랜 친구 관계라 해도 거리감을 유지한다. 한국은 거리 자체를 부정한다. 만나서 하루 만에 친구가 될 수 있는 나라가 한국이다. 일본은 다르다.

상석에 응하며 자리에 앉았다. 전부 4명이 앉는 식탁이다. 맞은편에는 청바지 차림의 장년 2명이 앉아 있다. 식탁은 가로 90㎝, 세로 60㎝ 정도의 크기다. 필자가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은 이 중 4분의 1 정도다. 혼자 식사하는 데도 익숙하고 상석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60㎝ 앞에 전혀 모르는 사람을 마주하고 있다는 것은 상당한 고역이다. 두고 보기도 힘들지만, 음식을 입에 넣으면서 대면하기 위해서는 인내심도 필요하다. 대화 내용을 들어보니까 맞은편 두 사람은 막 퇴직한 과거 직장 동료인 듯하다. “전국의 맛집을 함께 돌아다닌다”고 했다. 미니 카메라로 음식 사진은 물론, 블로그에 올리기 위해 서로의 식사 장면도 번갈아가면서 찍는다.

‘이세야’가 위치한 도쿄 다이토구는 대표적인 노인촌으로 황폐하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다. 인기 권투 만화 ‘내일의 죠’의 무대이기도 하다.
‘이세야’가 위치한 도쿄 다이토구는 대표적인 노인촌으로 황폐하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다. 인기 권투 만화 ‘내일의 죠’의 무대이기도 하다.

황홀한 장어 튀김의 맛

이미 70대로 접어드는 일본 단카이(団塊) 세대의 공통점이지만, 미식 여행은 퇴직 후 가장 즐기는 취미생활 중 하나다. 60대 중반의 남자 두 명이 펼치는 블로그 미식 기행. 뭔가 낭만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한국에서 보면 어떻게 느껴질까?

일본의 튀김 전문집에 대한 특별한 기억 중 하나로 ‘후각의 미(味)’에 관한 부분을 빼놓을 수 없다. 이것은 좋은 음식점의 공통점이다. 그러나 튀김집에서 느껴지는 후각의 미는 다른 곳과 크게 다르다. 튀김용 기름 때문이다. 튀김 기름은 요리사의 비밀이나 다름없다. 특별한 곳에서 가져온 신선한 기름을, 어떤 비율로 어떻게 섞어서 사용하는지가 관건이다. 참기름은 그중 가장 중요하다. 사실 대부분의 튀김 전문집은 후각의 미를 신경 쓰지 않는다. 찌들고 역한 기름 냄새를 풍기는 집들이 많다. 이세야에서 느낀 후각의 미는 중독성 강한 신선하고 고소한 맛 그 자체다. 밖에서 기다리는 손님들조차 시장하게 만드는 마법의 냄새다.

이세야에서 가장 비싼 2500엔짜리 ‘덴푸라 모둠’을 주문했다. 주문하는 순간 주변의 일본인들이 귀를 ‘쫑긋’ 올리는 느낌이 들었다. ‘금단의 메뉴’를 주문했다는 눈치가 와닿았다. 왜일까? 1500엔, 비싸야 2000엔짜리를 주문하는 것이 보통이다. 2500엔짜리는 너무 양이 많아서 스모 선수가 아닌 이상 ‘감히’ 시킬 수 없다는 것이 이세야 단골들의 규칙처럼 느껴졌다. 주문한 지 15분 만에 모둠 요리가 등장했다. 주문 즉시 튀긴 음식이다. 초스피드 서비스다. 두 손으로 사발을 받아든 순간 탄성이 터져나왔다. 한마디로 엄청나다. 한가운데 길게 누워 있는 장어튀김이 압권이다. 새우, 오징어, 채소로 이어지는 대형 튀김이 큰 사발에 ‘푹’ 잠겨 있다. 막 자리를 뜨려던 블로그 미식 기행가 두 명도 필자의 요리에 눈길을 보냈다.

양만이 아니라 질적으로도 훌륭하다. 튀김 맛의 핵심은 재료의 원래 맛을 얼마나 신선하게 재현하는가에 있다. 재료 자체를 튀기는 것이 아니라, 재료 밖의 겉옷(분말)만 튀기는 식이다. 따라서 겉옷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너무 얇아도 너무 두꺼워도 안 된다. 이세야의 장어 튀김을 처음 봤을 때는 겉옷이 너무 원시적으로 튀겨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입에 대는 순간 오판이란 생각이 들었다. 겉옷이 치아에 닿는 순간 터져나오는 ‘사각’거리는 느낌이 너무도 맑게 느껴졌다. 겉옷의 담백한 느낌만으로도 안재료의 맛은 충분히 알 수 있다. 튀김에서 중요한 것은 소스다. 이세야 소스는 간장을 위주로 한 달콤한 맛이다. 개인적인 기호지만, 필자는 좋은 소금을 살짝 뿌린 덴푸라를 선호한다. 소금을 주문하자 가고시마(鹿児島)산 소금을 갖고 왔다. 달콤하다. 2인분은 될 법한 튀김 요리지만, 불과 10분 만에 전부 해치웠다. 곧이어 밥과 국이 나왔다. 한국인이 그러하듯, 그 어떤 음식을 먹어도 마지막은 역시 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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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 퍼시픽2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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