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프롬
에리히 프롬

새해가 되어도 마음이 여전히 스산하다. 따뜻한 사랑 한 조각이 유난히 그립다. 우리는 흔히 ‘사랑은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무엇을 주기 위해서는 줄 만한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이 사랑을 줄 만한 능력을 제대로 갖췄는지 따져보지 않는다. 이러한 태도는 ‘사랑은 주는 것’이라는 말을 매우 공허한 것으로 만든다.

이처럼 사랑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태도를 지적하며, 사랑의 참다운 의미를 일깨워주는 유명한 고전이 있다. 바로 에리히 프롬(1900~1980)의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1956)이다. 사실 이 제목은 마땅히 우리말로 옮기기가 쉽지 않다. ‘아트(art)’는 예술, 미술, 인문학, 기술 등 다양한 뜻을 갖는다. 또한 ‘사랑’도 명사(love)가 아니라 동사형(loving)이다. 이런 점을 고려해 제목을 아예 ‘사랑한다는 것’이라고 붙인 번역본도 있다.

프롬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유대인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하자 그는 다른 비판적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으로 망명했다. 1950년 멕시코로 이주했지만, 실제로는 미국을 무대로 활동했다. 1970년대에는 유럽으로 돌아가 스위스에서 말년을 보냈다. 그는 프로이트와 마르크스를 비판적으로 결합시켜, 자신만의 독특한 사회심리학을 구축했다.

우리는 무심코 사랑을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달리 말해, 사랑이란 우연한 기회에 대상만 생기면 ‘누구나 (저절로) 겪게 되는 즐거운 감정’쯤으로 여긴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사랑에 ‘빠지는’ 최초의 경험과 사랑하고 ‘있는’ 지속적 상태를 혼동한다. 결국 사랑에도 결단, 판단, 약속 등 의지적 측면이 있다는 점을 망각하고 만다.

이런 잘못된 인식 탓에 사랑은 거대한 희망이나 기대를 품고 시작했다가 참담하게 실패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는 돈, 지위, 권력 등의 물질적 목적을 어떻게 달성하는가를 배우기 위해서 많은 에너지를 쏟아붓는다. 하지만 사랑에 대해서는 좀처럼 실패 원인을 분석하고 성공 방법을 연구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러한 태도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우리가 음악·예술·건축·의학·공학 등의 기술을 배우듯이, 마찬가지로 ‘사랑의 기술’도 배워야 한다. 기술을 습득하는 방법은 어느 분야든 이론을 이해하고 그것을 반복적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직관을 갖춘 숙련가가 되는 것이다. 사랑도 다를 바가 없다. 사랑의 이론은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알아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인간은 언제나 하나의 본질적 질문에 직면한다. 어떻게 고립을 극복하고 자신만의 동떨어진 생명을 초월하여 타인과 일체화될 수 있을까. 토템 숭배, 제의(祭儀), 군사적 정복, 사치, 금욕, 노동, 예술적 창조, 인간 또는 신에 대한 사랑 등 그 해법은 실로 다양하다. 그러나 이 중에 가장 완전한 해답은 인간적인 결합인 사랑이다.

이러한 인간적인 융합은 인간의 가장 강력한 욕구이다. 그것은 사람들을 하나로 뭉치게 만드는 힘이다. 그렇다고 모든 결합을 무조건 사랑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 관계가 일방적, 수동적 또는 지배적이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개인의 인격과 개성을 존중하는 조건하에서 이루어지는 인간 간의 수평적 결합이다.

‘사랑의 기술’ 초판
‘사랑의 기술’ 초판

무엇보다 사랑은 수동적인 감정이 아니라 능동적인 활동이다. 그래서 사랑은 ‘주는 것’이다. 주는 것이란 무엇을 포기하고 빼앗기고 희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충만한 생명력과 힘을 드러내는 일이다. 이를 통해 자신이 활기차게 살아있다는 기쁨을 느낀다. 심지어 물질적 영역에서조차 비록 작더라도 소유를 베푸는 사람이 부유한 자이다. 소유를 잃을까 노심초사하면, 아무리 커다란 부를 가졌어도 이미 그는 심리학적으로 가난한 것이다.

그런데 물질적 영역에는 도저히 줄 수 없는 한계점이 존재한다. 당사자는 이런 가난으로 고통받을 뿐만 아니라, 주는 기쁨을 향유하지 못해 한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잃게 된다. 이에 반해, 사랑에는 도저히 줄 수 없는 한계점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인간적 영역에서 기쁨, 흥미, 이해, 지식, 유머, 슬픔 등 자신 안의 모든 생명력을 얼마든지 줄 수 있다. 이를 통해 타인을 풍족하게 하며, 동시에 자신의 생명력을 고양시킨다.

따라서 사랑은 어느 특정인에 대한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어느 대상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체 및 세계에 대한 관계를 설정하는 한 인간의 능동적 태도이다. 특정인만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배척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공생적 애착 또는 확대된 자기중심적 집착에 불과하다. 이성애 역시 본질적으로 그 어떤 사랑과 다르지 않다. 성적 결합이 일시적인 친밀감을 높여 주지만, 그것이 곧 사랑인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사랑을 어떻게 실천할까. 사랑이라고 해서 특별한 것이 아니다. 목공 기술이든 의료 기술이든 마찬가지이다.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일정한 규율, 정신집중, 인내, 관심 등이 필요하다. 현대인은 하루 8시간 노동에 집중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자제력을 잃는다. 그냥 편하게 쉬든지 오락에 열중할 뿐이다. 이러한 자본주의적 삶은 사랑하기에 부적절하다.

거듭건대 사랑은 ‘능동성’이다. 능동성이란 우리의 생명력을 사용하는 내적 활동이다. 그것은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내 자신의 문제이다. 무엇보다 내 자신이 정신적으로 활기차고 건강해야 한다. “눈과 귀를 부지런히 움직이며 하루 종일 능동적으로 생각하며 느끼는 것, 내적인 게으름을 피하는 것이 ‘사랑의 기술’을 실천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프롬은 구체적 방법으로 명상·독서·음악감상·산책 등을 제안하며, 소비적 오락을 줄이고 과식·과음도 자제하라고 권고한다. 또한 홀로 있는 법을 배워 타인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훈련도 필요하다. 이런 의도적인 노력을 통해 우리는 정신적 감수성을 체험하며, 건강한 정신력을 기를 수 있다. 그래야 비로소 사랑할 줄 아는 바탕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흔히 우리는 사랑이 자연발생적 감정이고, 대상만 생기면 저절로 사랑할 수 있다고 오해한다. 특히 자본주의적 일상이 정신적 민감성을 침해하여,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랑할 줄 모르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따라서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탐구하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프롬의 주장이다.

유감스럽게도 ‘사랑의 기술’은 우리에게 뾰족한 기법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오히려 자본주의적 생활양식에 저항하며, 삶 전반을 보다 건강하게 가꾸라는 묵직한 과제를 던져준다. 정초(正初)이다. 잠깐만 멈춰서서 ‘나는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인가’라고 자문해 보자.

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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