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하 하디드의 건축 리버사이드 박물관 ⓒphoto 이승원
자하 하디드의 건축 리버사이드 박물관 ⓒphoto 이승원

겨울여행에는 물론 그 나름의 낭만도 있지만 혹독한 추위와 함께 ‘문 닫은 곳’이 많다는 단점이 있다. 특히 영국의 겨울은 혹독하다. 추위보다도 너무 적은 일조량이 문제다. 오후 3시만 되어도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고, 슬슬 문을 닫는 상점들이 많다. 2014년 12월에 떠나 2015년 2월에 돌아온 영국 여행에서는 ‘갈 수 있는 곳’보다는 ‘갈 수 없는 곳’이 더 많을 정도였다. 케임브리지에서는 겨울비가 내려 일찍 문을 닫은 상점들이 태반이었고, 로빈후드의 고향인 노팅엄에서는 기대했던 ‘로빈후드 투어’가 겨울에는 진행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낙심했으며, 맥베스의 무대가 된 것으로 알려진 성(城)은 아예 겨울에 개장을 하지 않아 가볼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글래스고에서는 무엇이든 가능했다. “겨울이라서 문을 열지 않아요” “날씨가 추워서 오늘은 안 되겠네요” “그 그림은 지금 수장고에 있어서 보실 수가 없습니다”라는 이야기를 계속 들으며 실망의 연속이었던 다른 도시들에 비해, 글래스고에서는 겨울에도 안 되는 것이 거의 없었다. 글래스고에 머무는 동안 나는 비로소 겨울 속에 꽁꽁 숨어 있는 화사한 봄의 전령을 만난 느낌이었다.

스코틀랜드의 금융과 교통의 중심지인 글래스고 퀸 스트리트에 도착한 순간. 나는 쏟아지는 겨울 햇살 속에 보도블록이 반짝거리는 모습, 그 위로 걸어가는 사람들의 활기찬 발걸음에 이미 기분이 좋아졌다. 런던, 케임브리지, 에든버러, 버밍엄, 카디프, 인버네스, 스털링 등을 거쳐 비로소 글래스고에 도착한 나는 영국인들이 많이 앓는다는 윈터블루스(winter blues·겨울우울증)에서 조금은 벗어난 듯했다.

글래스고에 도착하자마자 그 깨끗한 거리와 탁 트인 전망에 매료되었다. 숙소에 짐을 풀고 글래스고 현대미술관으로 향했는데, 겨울여행임에도 불구하고 거리 구석구석의 밝고 화사한 외관과 인테리어 덕분에 ‘벌써 봄이 왔나’ 싶은 달뜬 기분이 되었다. 켈빈그로브 미술관&박물관에 있는 살바도르 달리의 ‘십자가 성 요한의 그리스도’부터 빨리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달리의 저 유명한 ‘하늘에서 본 예수’의 모습을 보려면 차를 타고 도심 밖으로 나가야 하기 때문에 우선 퀸 스트리트 기차역 가까이에 있는 현대미술관부터 돌아보기로 했다.

글래스고 현대미술관에는 영국 미술뿐 아니라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 등 ‘또 다른 세상에서 온 예술가들의 목소리’가 가득하다. 고갱과 뒤러의 판화도 전시되어 있으며, 내가 좋아하는 삽화가 오브리 비어즐리의 판화도 많아 반가웠다.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 ‘살로메’의 고혹적이고도 치명적인 매력을 그림으로 잘 표현한 비어즐리의 삽화들 중 애드거 앨런 포의 ‘검은 고양이’도 전시되어 있다.

글래스고대학 옆에 있는 헌터리안 갤러리에서는 ‘매킨토시의 모든 것’을 만날 수 있다. 글래스고가 낳은 세계적인 디자이너 찰스 레니 매킨토시가 그의 아내와 함께 오랫동안 살았던 매킨토시 하우스 가이드 투어는 꼭 추천하고 싶다. 그 안에 있는 가구들이 모두 매킨토시가 직접 디자인한 것들이라 가이드의 감독 없이는 함부로 전시관 안에 들어갈 수 없다. 사진도 전혀 촬영할 수 없다. 하지만 무료 가이드 투어를 통해 매킨토시 하우스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매킨토시가 디자인한 가구를 직접 만져 보고 사진도 찍고 싶어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서운하지만, 안에 있는 아름다운 가구들을 보면 ‘정말 살짝만 삐끗해도 망가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름답지만 어딘가 연약해 보이는 매킨토시의 가구들은 생활 중심의 튼튼한 실용적 가구가 아니라 일상을 예술로 승화시키고자 했던 예술가의 욕망이 강하게 느껴지는 작품들이었다.

사진을 찍을 수 없었기에 나는 매킨토시가 디자인한 작은 의자 미니어처를 하나 사서 아쉬움을 달랬다. 디자이너였던 아내 마거릿 맥도날드 매킨토시와 함께 집안의 계단 하나하나, 거울이나 그림의 장식 하나하나까지 모두 상의해가며 이 집을 만들었을 매킨토시의 예민한 감수성이 구석구석에 깃든 집이었다. 매킨토시가 항상 가슴에 품었던 아포리즘 중에 이런 문장이 있다. “정직한 실수에는 희망이 있지만, 차가운 완벽주의에는 희망이 없다.” 매킨토시의 집과 가구들, 그가 남긴 스케치들을 천천히 감상하며 나는 얼핏 완벽주의로 보이는 그의 디자인 속에서 살짝살짝 수줍게 드러나는 그의 인간적인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

글래스고 거리로 겨울 햇살이 쏟아져내린다. ⓒphoto 이승원
글래스고 거리로 겨울 햇살이 쏟아져내린다. ⓒphoto 이승원

켈빈그로브 미술관&박물관, 리버사이드 박물관

둘째 날 나는 그토록 꿈에 그리던 켈빈그로브 미술관&박물관에 도착했다. 오래전에 BBC에서 제작한 예술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하늘에서 본 예수’의 모습을 그린 살바도르 달리의 이야기를 알게 된 후, 이 그림만은 직접 가서 보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혔다. 달리의 ‘십자가 성 요한의 그리스도’는 그 파격적인 구도와 과감한 묘사 때문에 발표되자마자 엄청난 화제를 몰고 왔다. 관람객 중의 한 명이 이 그림을 돌로 공격해서 상처를 입기도 했지만, 금세 완벽하게 복원되기도 했다. ‘십자가 성 요한의 그리스도’가 켈빈그로브 미술관&박물관에 전시된 후 두 달 만에 무려 5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다녀갔을 정도였다. 엘리자베스 여왕과 로버트 케네디까지 이 그림을 보러 직접 이곳으로 왔다.

감히 ‘하늘에서 바라본 예수’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그렸다는 놀라운 발상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신성모독’이라고 비난하기도 하고, ‘새로운 우상숭배’라고 비판하기도 했지만,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에 대한 대중의 열광적인 지지는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이 그림에는 신비한 영적 기운이 서려 있는 것처럼 보여, 사람들은 이 그림을 보기 전에 모자를 벗고 기도를 한 후 그림을 감상하기도 했다. 실제로 이토록 아름다운 예수의 조감도를 그리기 위해 살바도르 달리는 할리우드의 액션배우를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이 그림이 전시된 방은 마치 기도실처럼 경건한 느낌을 준다.

켈빈그로브 미술관&박물관은 이 그림 말고도 수많은 볼거리들로 가득한데, 나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장중한 파이프오르간 소리에 이끌려 중앙의 홀로 나가 보았다. 과연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대한 파이프오르간 위에 백발이 성성한 오르가니스트가 앉아 있었고, 어느새 군중들로 꽉 찬 중앙홀에는 아름다운 오르간의 선율에 매혹된 관객들이 빽빽하게 모여 있었다. 나는 2층 전시관에서 이 음악소리를 들었는데, 한 중년남성이 고요한 사색에 잠겨 파이프오르간 연주를 듣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혼자서 아무 말 없이 연주를 듣다가 연주가 끝나자 크게 박수를 치며 미소를 지었다. 이 세상에 오직 음악과 자신만이 남아 있는 듯, 완전히 그 음악의 세계 속에 푹 빠져 있는 낯선 사람의 모습이 진정 아름다웠다. 이 멋진 미술작품들과 이 놀라운 건축과 이 경이로운 음악까지 모두 무료로 감상할 수 있다는 사실 또한 놀라웠다.

위에서 내려다본 켈빈그로브 미술관&박물관(좌)과 파이프오르간을 연주하는 백발의 오르가니스트(우). ⓒphoto 이승원
위에서 내려다본 켈빈그로브 미술관&박물관(좌)과 파이프오르간을 연주하는 백발의 오르가니스트(우). ⓒphoto 이승원

글래스고 방문 3일째, 자하 하디드(1950~2016)의 설계로 유명해진 리버사이드 박물관에 찾아갔다. 2004년 여성 건축가로서는 처음으로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자하 하디드는 우리에게 동대문 DDP를 디자인한 건축가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이곳도 도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지하철을 타야 했다. 교통비가 비싼 런던에 비해 글래스고는 아주 저렴한 비용으로도 전철과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전철역에서 내려 리버사이드 박물관으로 걸어가는 길 자체가 아름다웠다. 멀리서 서서히 그 위용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리버사이드 박물관의 웅장하면서도 날렵한 모습은 이제 막 하늘로 비상하려는 거대한 독수리의 몸통과 날개처럼 느껴졌다.

나는 리버사이드 박물관에 어떤 전시가 이루어져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무조건 ‘자하 하디드의 건축’이라는 사실에 대한 호기심만으로 찾아갔는데, 그 ‘모름’ 때문에 더욱 놀라운 발견들이 많았다. 이 박물관에는 자동차의 모든 것, 자전거의 모든 것, 기차의 모든 것이 다 담겨 있다. ‘교통기관의 역사’를 쭉 훑어볼 수 있는 멋진 ‘바퀴 달린 물건들의 축제’가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은 백 년이 훌쩍 넘은 자동차나 기차 옆에서 사진을 찍기도 하고, 자유롭게 연주할 수 있는 피아노를 통통 두드려 보기도 하고, 실제 앰뷸런스 자동차 앞에서 병원놀이를 하기도 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자하 하디드의 건축이 유명한 까닭은 그 예측불가능한 디자인과 경이로운 비정형성이지만, 관람자의 입장에서 자하 하디드의 건축은 무엇보다도 여유롭고 편안했다. 중국 광저우 오페라하우스, 미국의 브로드 미술관, 2012년 런던올림픽의 아쿠아틱센터 등 기념비적인 건축 디자인을 전 세계에 각인시킨 자하 하디드. 그가 디자인한 리버사이드 박물관의 전체적인 규모는 거대하지만 세부적인 느낌은 아기자기하다. 바깥에서 바라보면 마치 하늘을 바다 삼아 노 저어가는 거대한 함선처럼 웅장하게 느껴지지만, 안에 들어오면 참 ‘숨을 곳’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직접 보고 만지고 느끼며 체험할 수 있는 전시물이 무척 많아 관람객들에게 자연스러운 친밀감을 준다. 곳곳에 전시된 옛날 자동차와 자전거들, 그 속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은 압도적인 건축물의 위용에 주눅 들지 않고, 그 박물관을 동네 놀이터처럼 편안하게 대하고 있었다. 글래스고는 이렇듯 예술과 문화와 건축으로 여행자들을 한껏 고무시키는 경이로운 도시였다. 차가운 금속으로 어떻게 이토록 살갑고 친밀한 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자하 하디드의 건축은 온통 네모진 건물로 가득한 삭막한 도시의 풍경에 역동적으로 굽이치는 곡선과 은근한 유머가 살아 숨쉬는 싱그러움을 불어넣는다. 그녀의 건축은 파격을 위한 파격이 아니라, 그 안에 인간과 세계를 따스하게 감싸는 예술가의 정신을 담고 있다. 그녀는 건축뿐 아니라 소품 디자인에도 재능을 보였다. 자하 하디드는 명품 가방을 값싼 공업용 소재인 실리콘으로 만들어 엄청난 파격을 선보이기도 했고, 담쟁이넝쿨처럼 다리를 감싸고 소용돌이치며 올라가는 유머러스한 부츠를 만들어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기도 했다. 동대문 DDP에서도 볼 수 있는 그 과감하고 유려한 곡선은 자하 하디드의 트레이드마크이기도 한데, 그것은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태어난 그녀가 유년 시절 많이 보고 자랐던 ‘모래산’의 이미지에 뿌리를 둔 것이라고 한다. 광막한 사막의 모래언덕들, 그 허허로움 속에서도 마치 그 안에 들어가 따스하게 숨을 수 있을 것 같은 다락방처럼 아늑한 모성의 이미지를 끌어내는 자하 하디드. 그의 디자인에는 강건함과 온화함, 화려함과 소박함이 교묘하게 공존한다.

리버사이드 박물관 내부 ⓒphoto 이승원
리버사이드 박물관 내부 ⓒphoto 이승원

매킨토시가 준 선물

자하 하디드의 매력에 흠뻑 빠진 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서 나는 정말 멋진 버스 운전기사를 만났다. 리버사이드 박물관으로 가는 길에는 지하철을 탔는데, 오는 길에는 왠지 아쉬운 마음에 글래스고 거리를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어 버스를 탔다. 내 책에 들어가는 여행 사진의 대부분을 찍어주는 이승원씨와 함께 버스에 막 올라타는데,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 여성이 운전대를 붙잡고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 샌드위치 좀 먹고 출발해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그녀의 씩씩함이 반가워 나도 “물론이죠!” 하고 당차게 대답했다. 그녀는 환하게 미소 지으면서, 집에서 직접 싸온 듯한 샌드위치 도시락을 맛있게 먹었다. 점심시간이 훨씬 지났는데, 바빠서 미처 식사를 하지 못한 듯했다. 십여 명 정도의 승객이 타고 있었는데, 모두들 그녀의 늦은 점심시간을 얌전히 기다려주었다.

버스가 출발하고 얼마 뒤 이승원씨가 소리쳤다. “어, 켈빈그로브다!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내가 그토록 열광했던 켈빈그로브 미술관&박물관이 정말 다시 보였다. 반가운 친구를 예고 없이 우연히 다시 만난 느낌이었다. 이씨는 잠깐 내려서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물었고, 기사님은 흔쾌히 허락했다. 그가 짧은 시간 열심히 셔터를 눌러대는 동안, 기사님은 우리 승객들에게 농담을 했다. “우리, 저분 남겨두고 그냥 떠나버릴까요?” 승객들은 모두 껄껄 웃으며, “그러자!”고 했다. 나도 장난 삼아 “얼마든지 괜찮다”는 신호를 보내니, 기사는 정말로 출발하는 시늉을 했다. 버스가 정말로 부릉부릉 엔진 소리를 내자, 이씨는 기겁을 해서 허겁지겁 달려왔다.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웃었다. 기사님은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아, 정말 가버리려고 했는데, 너무 빨리 달려오시네.” 아까보다 더 큰 웃음소리가 승객들 사이에서 터져나왔다. 이씨도 그제야 기사의 장난인 것을 알고, 멋쩍게 웃었다. “아, 사진 좀 더 찍으려고 했는데.”

그 순간에는 정말 내가 외국에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아주 익숙한 우리 동네에서, 늘 친숙한 마을버스를 타고 동네 찻집에 마실이라도 나온 느낌이었다. 그 찰나에 빛나던 ‘농담의 공동체’ 속에서 비로소 그 오랜 윈터블루스에서 완전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낯선 이방인이 아니라 아주 잠깐이나마 ‘그들 중의 일부’가 된 것 같아 따스한 미소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1 켈빈그로브 미술관&박물관에서 만난 다양한 연령대의 관람객들.<br></div>2 박물관에서 그림을 그리는 소녀.<br>3 하늘에서 본 예수를 그린 달리의 ‘십자가 성 요한의 그리스도’.<br>4 버스에서 잠깐 내려 찍은 켈빈그로브 미술관&박물관 외관. ⓒphoto 이승원
1 켈빈그로브 미술관&박물관에서 만난 다양한 연령대의 관람객들.
2 박물관에서 그림을 그리는 소녀.
3 하늘에서 본 예수를 그린 달리의 ‘십자가 성 요한의 그리스도’.
4 버스에서 잠깐 내려 찍은 켈빈그로브 미술관&박물관 외관. ⓒphoto 이승원

‘삶이 푸른 잎사귀라면, 예술은 아름다운 꽃이다’라는 말을 남긴 매킨토시. 과연 그렇다. 예술가들은 끊임없이 바로 그 예술이라는 꽃을 더 아름답고, 더 생생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삶 속에서 좀 더 아름다운 것, 또는 삶 그 자체보다도 더 아름답고 오래 살아남는 그 무언가를 발굴해내기 위해. 매킨토시는 1902년 글래스고에서 열린 한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들은 푸른 잎사귀에서 솟아나오는, 아름답게 채색된 꽃, 더 리얼하고, 더 생생한 꽃을 피워올려야 한다고. 죽은 꽃이 아니라, 인공적인 꽃이 아니라, 가위로 싹둑 잘라낸 꽃이 아니라, 당신의 영혼 깊숙한 곳에서 자라나오는 예술이라는 꽃을 피워올려야 한다고. 당신은 당신 안에 있는 예술이라는 꽃을 피워올리되, 그 꽃은 고귀하고, 아름답고, 영감이 흘러넘쳐야 한다고. 그 예술이라는 꽃은 어쩌면 무미건조한 잎사귀마저 전혀 다른 빛깔로 바꿀 수 있는 그런 힘을 가진 꽃일 것이다.

내게는 엄청난 도전이었던, 모두가 말렸던 ‘겨울 영국 여행’이 푸르른 잎사귀였다면, 글래스고는 과연 그 푸르른 잎사귀들 사이에서 단연 빛나는 붉은 장미였다. 삶 속에서 남몰래 반짝거리는 예술의 순간을 발굴해내는 화가들처럼, 나도 일상이라 불리는 황량한 벌판에서 아슴푸레 반짝이는 황홀경의 순간을 발견해내는 글쟁이가 되고 싶어졌다.

정여울 작가·‘내가 사랑한 유럽 top 10’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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