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처음 접한 것은 20여년 전이다. 뉴욕 메트로폴리탄뮤지엄 2층 이탈리아 전시관에서였다. 길이 1m 정도의 비교적 큰 유화 초상화에 그가 자리 잡고 있었다. 얼굴과 손만 뚜렷이 그려져 있을 뿐 몸과 의상은 미완성 상태였다. 모든 유화들은 세월의 흐름 속에서 검게 퇴색한다. 빛의 반사에 의해 생기는 유화 특유의 신비롭고도 신선한 3차원 질감도 시간 속으로 서서히 사라져간다. 벽에 걸린 초상화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냥 보지 말고 느끼면서 정독해야만 하는 유화다.

퇴색된 유화 속에 그려진 검은 수염은 어둠 속에서 만난 레드와인의 색감으로 와닿는다. 감정의 표현을 찾기 어려운 극히 절제된, 그러나 너무도 자연스러운 얼굴 모습이다. 굳게 닫힌 입이지만 침묵을 뚫고 터져나오는 강하고도 깊은 메시지가 전시관 전체로 울려퍼진다. 사실 초상화를 처음 만났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얼굴이 아닌 손이었다. 검게 변한 다른 부분과 달리 유독 오른손만이 반짝거리듯 흰색으로 돌출돼 있었기 때문이다.

초상화의 주인공은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대명사인 미켈란젤로다. 1544년 미켈란젤로가 70살 되던 때 제작된 초상화로, 당시 제자이던 다니엘레 다 볼테라(Daniele da Volterra)가 그린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로마 교황청 안의 시스티나 예배당(Sistine Chapel)에 ‘최후의 심판’을 완성한 뒤 그려진 초상화다. 구약성서에 기초한 최후의 심판은 주로 예배당 천장에 그려져 있다. 미켈란젤로가 60살부터 시작해 7년 동안 그렸다. 16세기 60살 남성의 체력과 정신력은 현재의 70대, 아니 80대 이상 노인에 비견될 수 있다. 100년 전까지만 해도 환갑을 넘긴 사람을 찾기 힘들었다. 쇠락해가던 미켈란젤로가 목을 꼿꼿이 세운 채 천장을 보면서 2500여일 동안 그린 성화(聖畵)가 바로 ‘최후의 심판’이다. 메트로폴리탄의 초상화는 시스티나 벽화 제작을 끝낸 지 3년 뒤의 작품이다. 유난히 빛나는 미켈란젤로의 오른손은 인류 최고의 걸작품을 바티칸에 남긴 예술가로서의 자존심과 자신감의 상징일지 모른다.

미켈란젤로가 20대에 만든 바티칸의 ‘피에타’.
미켈란젤로가 20대에 만든 바티칸의 ‘피에타’.

출세작과 최후의 작품 모두 피에타

‘론다니니 피에타(Rondanini Piet)’에 대한 얘기를 처음 들은 것은 2015년 5월이다. 당시 막 오픈한 밀라노 만국박람회 소식을 접하던 중 ‘미켈란젤로가 남긴 최후의 걸작’이란 기사를 읽었다. 88살로 삶을 마감한 미켈란젤로의 작품이 만국박람회 개장과 함께 그동안 전시됐던 고대 유물 전시관을 벗어나 따로 전시 공간을 만들어 특별전시된다는 내용이었다. 이 작품이 바로 ‘론다니니 피에타’였다.

당시 뉴스를 접하면서 머리에 떠오른 것은 두 가지다. 먼저 88이란 숫자다. 미켈란젤로가 오랫동안 예술가로 활동했다는 것은 알지만 미수(米壽)라고 불리는 88살까지 살았다는 사실은 새삼스러웠다. 21세기에 비교하자면 100세를 훌쩍 뛰어넘은 나이라고 할 수 있다. 세월과 경륜은 미(美)와 예(藝)의 세계의 기본요소다. 모차르트처럼 한순간 불태우면서 세상을 떠난 천재도 있는가 하면 하루하루 이어지는 시간이 연출해내는 넓고도 깊은 인간의 성숙미도 특별하다. 속(俗)의 한계를 뛰어넘어 성(聖)과 영(靈)으로서의 인간으로 나아가는 증거 중 하나가 바로 세월이다. 장수를 누리며 깨우치는 지혜와 경륜은 문명과 문화의 원천에 해당한다.

두 번째 주목한 부분은 미켈란젤로가 남긴 최후의 작품이 피에타라는 사실이다. 피에타는 라틴어 ‘파이어티(Piety)’에서 따온 말이다. 성스러운 상태나 신에 대한 존경 등으로 해석되지만 예술세계에서는 다르게 풀이된다. 숨진 예수를 끌어안고 슬퍼하는 마리아의 모습을 의미한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고통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피에타는 미켈란젤로를 언급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작품이다. 로마 바티칸 대성당 오른쪽 입구에 들어서 있는 좌상 조각이다. 고대 그리스를 제외할 경우 인류 최고의 조각가로 통하는 미켈란젤로의 24살 때 작품이다. 15세기 말 미켈란젤로를 르네상스 최고의 조각가로 만든 출세작이 바로 바티칸의 ‘피에타’다. 당초 프랑스 추기경이 자신의 임종에 맞춰 주문한 작품이지만 이후 바티칸이 사들였다.

밀라노에 있는 ‘론다니니 피에타’는 마리아가 의자에 앉아 있는 좌상 피에타가 아닌 몸을 세운 입상 조각이다. 1564년 미켈란젤로가 로마에서 숨진 뒤 당시 예술품 수집가이던 마르키스 론다니니(Marquis Rondanini)에게 넘어갔다가 이후 밀라노로 팔려간다. 1950년대 초까지 밀라노 스포르자성(Sforza Castle)에 보관돼 있던 것을 시정부가 구입하면서 비로소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된다. 일반인에 공개된 것은 1956년부터. ‘론다니니 피에타’ 특별전시 뉴스를 접하면서 미켈란젤로가 만든 피에타가 두 개나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미켈란젤로의 출세작과 최후의 작품이 모두 피에타라는 사실이 놀랍고 신비롭게 와닿았다.

청년 미켈란젤로의 출세작 ‘피에타’는 추기경의 주문에 의해 만들어진, 돈을 의식한 작품이다. 내용은 성(聖)이지만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속(俗)의 세계라 할 수 있다. 88세 때 제작된 ‘론다니니 피에타’는 그 누구도 아닌 미켈란젤로 자신과 신(神)만을 의식해 만든 성(聖)에 일관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수없이 접했던 바티칸의 ‘피에타’를 넘어서, 특별전시되는 ‘론다니니 피에타’를 만나야만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밀라노에 들른 것은 4년 만인 지난해 12월 말이다. 호텔을 잡은 바로 다음 날 아침 일찍 ‘론다니니 피에타’ 전시관으로 향했다. 때마침 전시관이 무료로 개장되는 목요일이었다. 연말인 탓이기도 하겠지만 스포르자성에 자리 잡은 전시관이 관람객들로 터져나갔다. ‘론다니니 피에타’ 전시관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필자가 생각하는 예술은 고독에서 출발한다. 고독한 인생과 예술 활동은 미켈란젤로, 다빈치, 고흐와 같은 위대한 예술가들의 공통점 중 하나다. 모두 어울리는 ‘우리의 시간’도 좋지만 우주와 신을 정면으로 응시한 ‘나만의 고독’을 통해 새로운 예술세계가 창조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는 관람객도 마찬가지다. 예술 작품을 마주할 수 있는 혼자만의 공간과 시간을 갖는 것은 예술가의 고독을 단 1분, 아니 1초라도 이해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그래서 폐장 30분 전 ‘론다니니 피에타’ 전시관을 다시 찾았다. 예상했던 대로 관람객이 거의 없다.

‘론다니니 피에타’가 전시된 밀라노 스포르자성.
‘론다니니 피에타’가 전시된 밀라노 스포르자성.

하얗게 불타는 ‘미완성의 피에타’

불타는 대리석이라고 할까? 눈이 부셔서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다. 마리아와 예수의 표정을 읽기는 더 한층 어렵다. 흰 대리석이 천장 위의 흰 조명을 통해 흰색 입자로 날아다니는 듯하다. 전시관 한가운데 서 있는 피에타를 접한 첫 느낌이다. 자세히 보려고 가까이 다가갔지만 표정을 읽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다. 대리석은 빛을 반사하는 석재다. 조명을 어둡게 하거나 조명 각도를 조절하면 명암이 달라지는 피에타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전시관 큐레이터는 불타는 흰색 피에타를 모두에게 선보인다. 왜 그랬을까. 바티칸 ‘피에타’에서 느껴지는 슬프고도 어두운 피에타가 아니다. 인간의 원죄를 자신의 피로 씻어낸 새로운 인류 역사의 출발에 어울리는 밝고도 맑은 환희로서의 피에타라고나 할까.

‘론다니니 피에타’는 미켈란젤로가 숨지기 직전까지 만든 작품이다. 몸도 가누기 어려운 88세 노인이 창조해낸, 무거운 망치와 정(丁)을 통한 육체노동의 결과다. 다리와 팔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윤곽만 찾을 수 있다. 이른바 ‘미완성 피에타’로 불리는 작품이다. 형상을 보면 마리아가 예수를 보듬는 것이 아니라 숨진 예수가 거꾸로 마리아를 업고 있는 느낌도 든다.

고통 속에서 생의 마지막을 보낸 예수의 모습이나 통곡하는 마리아의 표정도 아예 없다. 불과 30분간 지켜본 느낌이지만, 필자는 론다니니 피에타가 결코 미완성 작품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불타는 대리석을 가까이 할수록 수많은 형상의 피에타가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고통이나 슬픔이 구체적인 표정만으로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예수가 자신의 어머니를 등에 업은 채 위로하는 듯한 모습도 착시가 아니라 미켈란젤로가 의도적으로 창조해낸 결과라는 확신이 들었다.

바티칸의 ‘피에타’는 대리석 조각의 기본인 삼각형 구도에 기초해 있다. 안정감, 나아가 삼각형 위쪽 끝부분이 하늘로 향한다는 점에서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보수적인 구도다. ‘론다니니 피에타’는 전혀 다르다. 활(弓) 모양의 비대칭, 나아가 균형을 잡기 어려운 난해한 구도다. 바티칸의 ‘피에타’, 아니 르네상스 조각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단(異端)이라 부를 듯하다. 왜 미켈란젤로는 비대칭과 비균형, 즉 이단적인 구도의 피에타에 집착했을까? 나는 여러 날을 고민했다.

그것은 종교적 관점에서 본 완벽한 성(聖)으로서의 피에타가 아니다. 죽음을 대하는 속(俗)에서의 인간 고통과 슬픔을 활 모양 비대칭 구도로 연출해낸 것이 아닐까. 자신의 자식을 떠나보낸 어머니의 슬픔을 안정적인 삼각형 구도에 싣는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지 않을까? 88세 노예술가가 연출한 성의 절정은 바로 너무도 평범한 속의 세계일지 모른다. 대칭, 비대칭, 카오스, 불안정이 굽은 피에타 구도 속의 숨겨진 코드일지 모른다. 미완성이 아니라 완성된 그 어떤 작품도 줄 수 없는 환희와 고통 그 자체가 88세 노예술가가 남긴 마지막 메시지일지 모른다.

미켈란젤로와 다빈치

둘 다 고아 출신이었지만 생전의 위상은 달라

미켈란젤로는 조각에서 시작해 이후 시스티나 벽화까지 그린 만능 예술가로 통한다. 그림이 아니라 조각이 원래 그의 전공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잘못이다. 미켈란젤로는 원래 조각이 아닌 그림에서 출발한 예술가다. 13세 때 당시 유행하던 피렌체 집단공방(工房)에 들어가 그림을 배웠다. 어머니가 여섯 살 때 병사(病死)하면서 아버지를 떠나 거의 고아처럼 자랐다. 어머니의 정 한번 받아보지 못한 채 고아처럼 유년기를 지낸 다빈치의 삶과 너무도 닮아 있다.

다빈치가 베로키오 공방에 들어간 것은 14살 때다. 예술은 당시 의존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확실한 생존수단이었다. 공교롭게도 미켈란젤로와 다빈치의 두 아버지는 당시 피렌체의 중상류 신분이란 공통점을 갖고 있다. 메디치가(家)를 통해 피렌체에 불기 시작한 ‘예술 특수’를 예측했다고나 할까. 시대흐름을 읽은 아버지 덕분에 미켈란젤로와 다빈치 모두 공방에 들어가 종교화를 배운다.

미켈란젤로가 조각에 입문한 것은 16살 때부터다. 어릴 때 자신을 돌봐주던 유모의 남편이 조각 장인이었다는 점은 10대 소년을 대리석에 빠지게 만든 가장 큰 동인(動因)이다. 더불어 그림보다는 조각이 당시 한층 더 고수입을 보장했다는 점에서 대리석 예술에 주력했다고 볼 수 있다. 바티칸에 들어선 ‘피에타’를 통해 조각가로서의 명성을 떨친 것은 조각 입문 8년 만이다.

미켈란젤로는 20세기 이전의 예술가 가운데 자신의 초상화를 남에게 그리게 한 몇 안 되는 예술가 중 한 명이다. 다빈치는 다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같은 다빈치 초상화는 직접 그린 자화상이다. 20세기 이전에 그려진 예술가의 초상화 대부분은 자화상이었다. 돈을 주고 남에게 초상화를 그릴 만큼 여유로운 생활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바티칸에서의 성공 덕분이겠지만, 생전의 미켈란젤로는 돈이 궁한 적이 없다. 반면 일자리를 찾아 밀라노와 프랑스를 전전한 가난한 예술가가 다빈치다.

다빈치가 그러하듯 르네상스 당시 이탈리아 예술가 이름의 대부분은 가운데 ‘다(da)’를 붙이고 있다. 영어의 ‘of’ ‘from’에 해당하는 출신지를 의미하는 단어다. 같은 출신지지만 당시 귀족은 ‘da’가 아닌 ‘드(de)’나 ‘디(di)’를 사용했다. 메디치가의 문을 연 코지모의 이름은 코지모 드 메디치(Cosimo de Medici)다. 20세기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이탈리아 예술가들은 단순 노동자와 비슷한 신분으로 통했다. 살아남기 위해 뭔가를 직접 만들어내는 육체노동자로서의 예술가다. 예외없이 ‘da’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의 이름에는 ‘da’가 없다. 정식 이름은 ‘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로 ‘di’를 달고 있다. 이미 생전에 추앙받았던 예술가라는 의미다. 하지만 21세기 미켈란젤로와 다빈치의 위상을 견주어 보면 다빈치의 위상과 인기가 한 수 위인 듯하다. 그럼에도 르네상스 이후 500년간의 역사 전체를 보자면 다빈치의 우위는 수십 년에 불과하고 결국 미켈란젤로의 시대였다.

키워드

#미술
유민호 퍼시픽21 소장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