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의 저녁식사 시간은 서로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이야기하는 자리이다. 하지만 요즘엔 좀처럼 주중에 집에서 가족들과 식사를 하기 힘들다. 대학을 졸업하고 막 일을 시작한 아들은 회사 회식이나 친구와 약속이 있다고 늦게 집에 들어오고, 남편은 매일 바쁜지 주말에만 집에서 식사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중에는 나 혼자 집에서 저녁을 먹어야 할 때가 많다. 그럴 때면 간단하게 누룽밥을 만들어 먹곤 한다. 간편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누룽밥을 먹으면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나는 한동안 외할머니와 같이 살았다. 그래서일까. 누룽밥을 먹을 때면 오래전에 돌아가신 외할머니와 같이 식사를 하는 기분이 든다. 항상 바쁜 엄마와 아빠 덕분에 외할머니가 우리 남매들과 같이 사시면서 돌봐주셨고 바쁜 부모님 대신에 외할머니가 우리와 식사를 같이 하곤 했다.

평소 치아가 좋지 않으셨던 외할머니는 밥 대신에 누룽밥을 즐겨 드셨고 나도 옆에서 그 누룽밥을 같이 먹었던 기억이 난다. 저녁을 배불리 먹고도 가끔은 누룽밥을 입가심으로 먹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당시 외할머니가 틀니를 하셨는데 아무래도 틀니 때문에 딱딱한 음식을 드시기가 쉽지 않으셔서 누룽밥을 드셨던 것 같다.

밥솥에서 밥을 푼 다음에 밑바닥에 조금 남은 밥을 끓여서 먹는 누룽밥의 고소함이 아직도 그립다. 예전엔 식구가 많아 솥에 밥을 많이 했다. 밥을 푸고 난 후 솥에 눌어붙은 누룽지에 물을 붓고 끓이던 누룽밥의 구수함은 요즘처럼 전기밥솥으로 바뀐 후에는 좀처럼 찾아보기가 어렵다. 이런 구수함이 좋아서 때때로 집에서 주말이면 솥에 밥을 해보지만 양에서 오는 차이인지 좀처럼 어린 시절 기억 속에 있는 구수한 누룽밥이 되지 않는다.

혼자 집에서 저녁식사를 할 때면 누룽밥을 끓이는 몇 분 동안이지만 외할머니와 함께 지내던 시간들이 머리를 스친다. 외할머니가 좋아하신 누룽밥은 오랫동안 푹 끓인 누룽밥이었는데 내가 좋아하던 누룽밥은 덜 퍼진 누룽밥이었다.

하지만 어렸을 때 식구들 여럿이 같이 식사를 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내가 먹고 싶은 대로 해달라고 하기가 어려웠고 내 누룽밥만 따로 끓여 달라고 하고 싶지 않아 푹 퍼진 누룽밥을 외할머니와 같이 먹었던 기억이 난다.

결혼을 하고 난 후에야 내가 먹고 싶은 대로 음식을 만들 수 있는 자유가 생겼다. 누룽밥을 만드는 법은 매우 간단하다. 우선 냄비를 꺼내 센 불에 물을 붓고 끓인다. 물이 끓기 시작하면 미리 만들어 냉동실에 넣어둔 누룽지를 꺼내 끓는 물에 넣고 삶으면 된다. 참고로 누룽지를 만드는 법은 남은 밥을 냄비나 프라이팬에 눌려서 만들어 냉동실에 두고 쓰면 된다. 누구나 하기 쉬운 간편한 방법이다.

또 이렇게 만들어 놓은 누룽지를 쓰는 것도 좋지만 냄비에 막 밥을 한 후 밑에 눌어붙은 누룽지에 적당량의 물을 넣고 같이 끓이면 간편한 누룽밥을 만들 수 있다.

한편, 누룽지를 만들 때는 흰 쌀밥도 좋지만 잡곡 밥으로 만들면 더 구수하다. 여러 종류의 누룽지를 만들어 냉동실에 넣고 그날그날 바꿔가며 다른 누룽지를 끓여 먹을 수도 있다. 누룽밥을 먹을 때는 좋아하는 김치를 곁들이거나 명란젓에 파를 송송 썰어 넣고 참기름을 듬뿍 뿌려 먹어도 좋고 명란을 석쇠에 구워 같이 곁들여도 좋다. 아니면 김가루를 와사비와 함께 누룽밥에 넣어 오차즈케처럼 먹을 수도 있다. 그리고 토마토를 끓여 국물을 내서 해산물을 넣고 누룽지를 넣어 국물에 끓이면 리조토와 비슷하게 만들 수도 있다. 또는 국을 끓여 누룽지를 넣고 끓이면 누룽지탕이 된다. 나는 이렇게 많은 누룽밥 조리법 중에서도 가장 간단한 방법인 누룽밥에 묵은지를 곁들여 먹는 걸 가장 좋아한다. 아무래도 가장 간단하고 전통적인 방식이 가장 나에게 맞는 것 같다.

누룽밥은 누룽지를 물에 넣고 끓이는 시간에 따라 약간 덜 익은 누룽밥과 혹은 푹 익어 퍼진 누룽밥으로 구분할 수 있다. 오랫동안 끓여 만드는 퍼진 누룽밥을 좋아하지 않는 나는 물이 끓자마자 누룽지를 넣고 단시간에 센 불에서 끓여 물이 다시 끓기 시작하면 바로 불에서 내려놓는다. 이렇게 덜 익은 누룽밥을 좋아하는 사람은 식구 중엔 나뿐이다. 시어머니와 친정 부모님은 푹 익은 누룽밥을 좋아하신다.

남편은 누룽밥보다는 누룽지를 더 즐겨하고 아이들은 누룽지나 누룽밥 둘 다 좋아하지 않는다. 누룽지를 좋아하는 남편이 출출할 때 먹을 수 있게 저녁 때 누룽지를 만들어 부엌에 놔두곤 하는데 남편은 밤에 누룽지를 다 먹고 아침이 되면 후회를 하곤 한다. 사실 누룽지는 양이 적은 것처럼 보이지만 많은 양의 밥으로 만들어져서 밥 한 공기보다 훨씬 많은 양을 먹게 되기 때문이다. 인생을 살아가며 느끼는 점은 가장 간편한 음식인 누룽밥도 사람마다 좋아하는 조리법이 다른 것처럼 일이나 생각이 나와 다른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을 점점 더 알아가게 된다.

누룽밥을 먹을 때 느끼는 편안함 때문에 나는 해외출장에서 돌아온 날이면 자주 저녁식사를 누룽밥으로 먹곤 한다. 오랜 비행 시간 동안 기내에서 주는 느끼한 식사나 외국의 식당에서 낯선 음식을 먹다가 구수한 냄새의 누룽밥을 입에 넣는 순간 비로소 집에 돌아온 것을 실감하게 된다. 요즘은 집 밖에서 음식을 손쉽게 사먹을 수 있고 그 종류도 많지만 나에게 집에 온 것처럼 편하게 느껴지는 음식은 누룽밥뿐인 것 같다.

김선정 아트선재센터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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