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백하고 푸짐한 족발
담백하고 푸짐한 족발

서울 장충동 하면 사람들은 으레 족발을 떠올린다. 전국의 수많은 족발집 간판에 등장하는 장충동! 족발의 메카로 불리는 그곳에 가면 간판 문구가 참 재미있다. 족발의 시조, 원조의 원조, 원조 1호라는 문구까지 등장한다.

장충동 족발 거리의 역사는 6·25전쟁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장충동에 정착한 이북 실향민들이 원래는 빈대떡 같은 간단한 요깃거리를 팔았다. 1963년 인근에 장충체육관이 개관하면서 운동선수들과 관람객들이 몰려들어 든든한 안줏거리를 찾자 실향민들이 이북에서 먹던 식으로 족발을 삶아내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장충체육관에서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족발집 문이 터져나갈 정도로 호황을 누리면서 한때는 족발집이 열두 곳까지 늘었다. 세월이 달라져 이제 여섯 곳만 남았지만 저녁시간이면 족발 매니아와 애주가들로 문전성시다.

반백년 역사를 자랑하는 장충동 족발골목에서 네 번째로 문을 연 ‘족회관’은 인근 직장인과 네티즌들의 호평을 받고 있는 족발 명가다. 창업한 지 43년째지만 몇 년 전 새로 단장한 외관이 깔끔하다. 안으로 들어서면 입구의 커다란 함지박에 담긴 먹음직스러운 족발들이 눈길을 끈다.

“자신 있으니까 앞에 내놓지요!”

자그마한 체구에 피부가 유난히 고운 창업주 강길자(74)씨가 능숙한 솜씨로 족발을 척척 썰어낸다. 낡은 도자기 접시에 봉긋하게 쌓아 푸짐하게 담아낸 족발. 지난 세월과 함께 주인장의 넉넉한 인심이 느껴지는 이 집 족발은 무엇보다 빛깔이 과하게 진하지 않아 안심이 된다.

“우리 집은 캐러멜 같은 거 안 써요.”

빛깔만큼 맛도 자연스럽고 깔끔하다. 족발을 새우젓에 적셔 한 점 맛보면 탱글탱글 쫄깃한 식감이 남다르고 씹을수록 고소함이 입안에 가득 퍼진다. 요즘 흐물흐물하게 삶아 껍데기와 살이 분리되는, 달고 기름진 족발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양념이 강하지 않아 자꾸 먹어도 물리지 않는 순하고 담백한 맛이랄까. 그래서 상추에 족발을 놓고 새우젓과 굵직한 무생채, 마늘, 고추, 쌈장 등 취향대로 양념을 올려 싸먹으면 더욱 조화로운 맛을 즐길 수 있다. 특히 이 집 돼지 발가락은 콜라겐 덩어리로 쫀득하면서도 부드럽고 촉촉한 맛이 유별나게 좋다. 게다가 피부미용, 노화방지, 숙취해소에도 좋은 보양음식이라니 이 맛에 자꾸 족발을 찾게 된다.

쟁반국수도 인기 메뉴다. 쫄깃한 면발에 아삭한 야채와 상큼한 과일소스가 어우러져 족발과 궁합이 딱 맞는다. 쟁반국수에 족발 살점을 올려 호로록 먹는 맛도 좋고, 족발을 다 먹고 난 뒤 산뜻한 입가심으로도 제격이다. 주전자에 뜨끈하게 준비해서 떨어지기 전에 부지런히 보충해주는 콩나물국도 얼큰하고 개운하다.

대표 강길자씨와 아들 신동섭씨
대표 강길자씨와 아들 신동섭씨

단골들의 음식 취향 거의 기억

강씨는 장충동 족발 골목으로 시집와 맨 처음 이곳에서 족발을 팔던 원조 할머니를 알게 되었다. 그 할머니에게 족발 요리법을 배우고, 족발 삶는 육수를 나눠 받아 족회관을 열었다. 서른한 살 젊은 나이에 술안주인 족발을 판다고 하니 처음엔 주변의 반대가 심했지만 강씨는 특유의 꼿꼿하고 다부진 성격으로 족회관을 명가로 일궈냈다. 그 뒤에는 육아며 온갖 대소사를 원만하게 처리해준 남편의 든든한 외조가 있었다. 강씨는 원조집의 비법에 특유의 솜씨와 정성을 더해 자신만의 차별화된 족발 맛을 완성했다.

“족발 맛은 삶는 국물과 방법에 달렸어요.”

국내산 족발을 매일 100여개씩 가져와 깨끗이 손질한 다음 일반 가정집에서 사용하는 양념만 넣을 뿐 오향, 한약재 등은 일절 넣지 않는다. 돼지 누린내를 없애기 위해 대파잎, 파뿌리, 양파, 고추씨, 생강, 소주를 넣고 소금간 해서 깔끔하게 삶는데, 최고의 비결은 역시 세월이다.

족발 삶은 육수는 불순물을 말끔히 걸러내고 졸아든 만큼 물과 양념을 보충하여 다음 족발을 만들 때 사용한다. 이 과정을 수십 년간 반복하는 과정에서 육수의 맛이 깊어지고 그 맛이 족발 속에 고스란히 스며들어 세월의 깊은 맛을 낸다. 오랫동안 같은 국물을 반복해 사용한다니 언뜻 지저분하지 않을까 생각되지만 그것은 오해다. 오랜 세월을 걸어온 이 마법의 육수야말로 족발 맛을 좌우하기에 보물처럼 관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국물을 기름기나 찌꺼기 하나 없이 깨끗하게 관리해왔기에 오랫동안 담백한 족발 맛을 이어올 수 있었다.

강씨는 족발 삶는 데도 온갖 정성을 들인다. 큰솥에 족발을 넣고 30분마다 골고루 뒤적여가며 두 시간 이상 삶는데, 이때 잘 뒤섞이도록 적당한 양을 넣어야지 바쁘다고 많이 넣으면 맛과 모양새가 흐트러진다. 족발은 5분만 더 삶아도 고기가 뭉그러지기에 건져내는 타이밍이 중요하다. 그래서 거의 삶아질 무렵부터는 솥 옆에 꼭 지켜 서서 족발 상태를 일일이 체크하면서 건져내고 있다.

족발은 크게 앞발과 뒷발로 나뉘는데 앞발은 뒷발보다 근육이 많아서 쫄깃하고 발 전체에 미용에 좋은 콜라겐 함유량이 높다. 이에 비해 뒷발은 살코기와 지방이 많아 앞발보다 고소한 것이 특징이다. 대개 앞발이 뒷발보다 더 맛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꼭 그런 것은 아니다. 강씨는 앞발 위주로 썰어주되 뒷발의 맛있는 살 부분을 덤으로 얹어준다. 중요한 것은 온도다. 너무 뜨거우면 얇게 썰기가 어렵고 식감이 떨어진다. 족발은 좀 따듯할 정도로 적당히 식혀야 쫄깃하다. 한입에 쏙 들어가는 크기로 정성껏 써는 것도 중요하다. 그래서 번거롭더라도 족발을 조금씩 자주 삶아 딱 맞는 온도로 식혀 준비하고 쉽사리 다른 사람에게 칼을 넘겨주지 않는다. 직접 맛있게 썰어서 푸짐하게 담아내야 흡족하다고.

강씨는 단골들의 음식 취향을 거의 기억한다. 종업원들도 마찬가지. 연령대가 비교적 높은 편으로 대부분 10년 이상 호흡을 맞춰와 가족같이 훈훈한 분위기다. 오래간만에 찾는 손님들조차 좋아하는 부위와 양념을 맞춰 내놓곤 해서 감동의 친절 맛집으로 소문이 자자하다.

지금 점포는 살던 집을 개조해 쓰다가 2009년에 대대적으로 리모델링한 것. 지하에 널찍한 홀과 2층에 방을 갖춰 크고 작은 모임을 하기에 좋다. 분위기가 밝고 깨끗해서일까. 이 집엔 가족 단위 손님이 유난히 많다. 리모델링할 때부터 어머니를 돕고 있는 아들 신동섭(50)씨는 이벤트 회사 출신. 신씨의 말이다. “족발은 기다리는 장사예요. 예전에는 손님들끼리 합석을 해도 장사가 잘되었지만 이제 문화가 달라지고 있어요.” 신씨는 맛은 기본이고 손님이 찾아오고 싶은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각오다.

정수정 음식칼럼니스트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