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
한나 아렌트

“고문자들은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작고한 김근태 의원은 그의 책 ‘남영동’에서 이렇게 적었다. 그들은 고문하는 와중에 걸려온 딸의 전화를 다정히 받았고 아들의 진학 문제를 걱정하기도 했다. 또한 최순실 사건의 주역 중 한 사람인 안종범 전 수석은 오랫동안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런 ‘평범한’ 사람들이 어째서 그렇게 못된 일들을 저질렀을까.

이런 상념에 잠길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유명한 고전이 있다. 바로 한나 아렌트(1906~1975)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Eichmann in Jerusalem ·1963)이다. 이 책은 ‘악의 평범성에 관한 보고서(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라는 부제목으로 인해 더욱 유명하다. ‘악의 평범성’은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꿰뚫는 키워드이다.

아렌트는 독일 태생의 유명한 유대계 정치철학자이다. 대학에서 하이데거, 후설, 야스퍼스 등 석학들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나치를 피해 프랑스로 망명했다가 그곳도 나치에 점령당하자 다시 미국으로 갔다. 거기서 자유집필가로 살면서 ‘전체주의의 기원’(1951), ‘인간의 조건’(1958) 등 고전적 저작을 집필했다. 그는 1963년에 뒤늦게 대학교수가 됐다.

1960년 5월, 세계가 깜짝 놀란 사건이 발생했다. 이스라엘 정보당국이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독일인 아돌프 아이히만을 체포하여 비밀리에 이스라엘로 압송했다. 아이히만은 나치 집권 당시 국가공안본부 제4국(일명 게슈타포)의 유대인 담당부서를 실무적으로 책임졌던 자이다. 그는 전쟁이 끝나자 아르헨티나로 도피해 숨어 살던 중이었다.

아이히만은 이듬해(1961년) 4월부터 예루살렘의 법정에 섰다. 이미 ‘전체주의의 기원’을 통해 파시즘의 실체를 파헤친 바 있는 아렌트는 이처럼 흥미진진한 사건을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는 교양잡지 ‘뉴요커’의 특파원을 자청하여 재판 개시 직전에 예루살렘으로 달려갔다. 현지에서 재판의 전 과정을 방청하며 다양한 취재 활동을 벌였다.

아이히만은 1962년 5월 사형판결을 확정받고 이틀 만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 직후부터 아렌트는 ‘뉴요커’에 이 세기적 재판에 관한 특집기사를 5회에 걸쳐 연재했다. 이듬해 그 기사에 에필로그와 후기를 가필하여 단행본으로 간행한 것이 바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다. 한마디로 이것은 한 독일인이 예루살렘에 끌려와 재판받은 이야기이다.

이스라엘 정보당국은 종전 후 홀로코스트 책임자들을 끈질기게 추적했다. 아이히만도 바로 그 대상자 중에 한 명이었다. 홀로코스트는 본래 ‘완전소각’을 의미하는 보통명사였으나, 종전 후에는 아예 고유명사로 굳어졌다. 이제 그것은 나치가 대략 600만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사건을 가리킨다. 그 숫자는 당시 유럽 유대인의 3분의 2, 전 세계 유대인의 3분의 1에 해당한다.

그러나 숫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성격이다. 나치에게 이 학살은 무언가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었다. 이렇게 대량학살 자체를 목적으로 삼은 사례는 역사상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이런 만행이 정교한 관료조직과 과학기술에 의해 매우 체계적으로 실행된 점도 전대미문이다. 아이히만은 바로 그런 거대한 범죄의 실무급 책임자였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초판 표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초판 표지

그러나 그는 재판정에서 줄곧 자신은 살인범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유대인을 죽이는 일에 나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나는 유대인을 죽이라고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 그는 오로지 행정적 업무를 수행한 것이고, 법과 명령을 준수한 공무원에 불과하다고 강변했다. 정신과 전문가들이 그의 정신상태를 감정했으나, 한결같이 ‘정상’이라는 소견이었다.

본래 그는 몰락한 중산계급 출신으로 곤궁한 처지였다. 지인의 주선으로 나치 당국에 취직하여 어렵사리 새로운 기회를 얻었다. 거기서 우연히 유대인 관련 업무를 맡았다가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읽어본 적도 없고 열렬한 나치 광신자도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학살에 가담하고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

다만 그는 독특한 언어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연스러운 일상어가 아니라 나치 당국의 상투적인 언어를 사용했다. 그는 학살을 ‘최종해결’ 또는 ‘특별취급’이라고 표현했다. 그런 것들은 나치 당국이 사용하던 행정적 용어였다. 단순히 용어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말투 자체가 ‘행정적’이었다. 그는 아예 ‘관청언어만이 나의 언어’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나치가 일상언어와 관청언어를 분리시킨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그것은 말의 능력을 빼앗아 생각의 능력을 제거하려고 한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관련자들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정상적인 판단을 내리기 어렵게 되었다. 특히 악을 제대로 인식하거나 분별하지 못했다. 그들은 한쪽에서 유대인이 학살되는 와중에도 사무실에 둘러앉아 희희낙락 모차르트의 음악을 즐겼다.

아이히만 역시 거대한 관료조직의 톱니바퀴 같은 일원이었다. 그것말고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다. 이런 분석은 당연히 커다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렇다고 아렌트는 그가 무죄라고 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의 죄는 바로 이런 ‘무사유(thoughtlessness)’에 있다. 말 그대로 ‘아무 생각이 없다’ ‘아무 생각을 안 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어리석음’과는 다르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이해에 관한 한 ‘영악한’ 사람이다.

흔히 우리는 악이 미개한 곳에 ‘특별하게’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악이 오히려 시스템이 잘 발달된 곳에 ‘평범하게’ 도사리고 있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것은 나치에 대한 통렬한 고발일 뿐만 아니라 현대사회에 대한 무서운 경고이기도 하다.

요즘 나라를 뒤흔들고 있는 최순실 사건에도 수많은 공무원이 관여했다. 그들은 부당한 지시에 묵묵히 따랐다. 일부는 적극적으로 앞장서기도 했을 것이다. 어느 고위급 공무원은 ‘시켜서 한 것이 무슨 죄냐’는 항변도 서슴지 않는다. 바로 이런 작태가 아렌트가 지적한 ‘무사유’이다. 아렌트는 분명히 그것이 죄라고 단언했다.

우리는 지난 연말 청문회에서 자신의 무고함을 강변하며 상투적인 답변만 되풀이하는 ‘핵심 증인들’을 목격했다. 그들의 무미건조한 모습은 사뭇 전율적이었다. 내국인임에도 그들은 가히 ‘서울의 아이히만’이라고 할 만하다.

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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