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한·중수교 때의 일입니다. 노태우 대통령은 덩샤오핑(鄧小平)을 만나고자 했습니다. 중국은 완곡히 거절했습니다. 대신 “국가주석인 양상쿤(楊尙昆)을 만나고 가라”고 했습니다. 우리 정부는 떨떠름했지만 그 말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1992년 9월 28일 베이징 인민대회당 복건청에서 노태우와 양상쿤의 역사적인 한·중 정상회담이 이뤄졌습니다. 중국에서 대외적으로 국가를 대표하는 건 분명 국가주석이지만 그가 ‘정상(頂上)’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정상’이라고 했던 양상쿤도 한·중 정상회담 이듬해인 1993년 덩샤오핑의 한마디에 팽(烹)당했습니다. 우리 정부는 깜짝 놀랐습니다. 중국의 진정한 실권자가 누구인지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김영삼 대통령도 1994년 방중 때 덩샤오핑을 만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김영삼 대통령 역시 인민대회당 복건청에서 장쩌민(江澤民) 주석과 정상회담을 하는 데 만족해야 했습니다. 결국 1997년 사망한 덩샤오핑을 만난 한국의 정상은 아무도 없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유고(有故)로 연기된 한·일·중 정상회의는 2008년부터 시작했습니다. 중국은 이 연례 정상회의에 한 번도 정상을 보낸 적이 없습니다. 후진타오(胡錦濤)와 시진핑(習近平) 대신 원자바오(溫家寶)와 리커창(李克强)이 등장해 이명박·박근혜 대통령과 사진을 찍었습니다. 중국에서는 그 누구도 원자바오와 리커창을 ‘수뇌(首腦)’라고 하지 않습니다. 상대국으로서는 명백한 푸대접이 분명하지만 여기에 대한 진지한 문제제기가 나온 적은 없습니다.

오늘날 한·중관계의 불균형은 1992년 한·중수교 때 잘못된 좌표 설정에서 기인합니다. 한·중수교 때 중국은 ‘하나의 중국’을 아예 협상 대상에서 제외하고 기정사실화했으나, 한국은 쉽사리 ‘두 개의 코리아’를 인정했습니다. 그 이후 중국은 줄곧 한국과 북한이란 두 개의 유용한 패를 쥐고 ‘이이제이(以夷制夷)’ 전술을 쓰고 있습니다. 이는 한국과 북한을 두루 경험한 서울 명동 주한 중국대사관의 국장급, 부국장급 외교관이 위세를 부릴 수 있는 토양이 됩니다.

올 초 방중한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왕이(王毅) 외교부장을 만나고 왔다”며 자화자찬했습니다. 일본의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는 집권 민주당 간사장 시절 방중해 후진타오를 직접 만났습니다. 데리고 간 143명의 의원들을 후진타오와 일일이 악수시켰습니다. 오자와는 “후진타오가 직접 나와 의원들과 일일이 악수할 것”을 방중 전제조건으로 내걸었습니다. 우리 민주당 의원들의 배짱과 배포가 오자와 정도만 돼도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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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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