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삭하고 고소한 모둠 빈대떡
바삭하고 고소한 모둠 빈대떡

“여기가 우리가 오십 년 전 다니던 그 열차집이야!”

머리 희끗한 노신사들 여럿이 문을 열고 왁자지껄 들어선다. 아이들처럼 들뜬 표정의 그들은 빈대떡 한 접시에 학창 시절 추억을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인다. 그런가 하면 다른 쪽 탁자에선 젊은이들이 머리를 맞대고 막걸리 한 잔에 그들만의 추억을 진지하게 쌓고 있다. 그러다 목적지에 다다라 열차에서 내리듯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서고 어느새 또 다른 손님들로 북적인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빈대떡집 ‘열차집’은 추억을 파는 주점이다. 언제 문을 열었는지 정확하지는 않다. 6·25전쟁이 끝난 뒤 초토화된 서울 거리에 피란민들이 하나둘 돌아오던 1950년대 초, 안덕인씨(작고) 내외가 지금의 교보문고 맞은편 중학천 길거리에서 빈대떡을 부쳐 팔던 게 첫 시작이었다. 어느 집 처마 밑의 양쪽 끝을 판자로 막아 만든 자리가 기찻간처럼 길다고 하여 손님들이 기차집이라고 불렀다.

이후 종로 피맛골 초입으로 옮기면서 ‘열차집’이라는 간판을 걸었는데, 골목 가득 퍼지는 고소한 빈대떡 냄새에 넘어가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특히 시인, 소설가 같은 문인들에게 인기 있는 공간으로 피맛골의 전설이 되었다. 열차집은 빈대떡과 막걸리로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재개발의 여파를 피해가진 못했다. 피맛골의 빈대떡 골목이 사라지자 2010년 공평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열차집은 서울 종각역 제일은행 본점 뒷골목에 자리하고 있다. 큰길에서도 언뜻 간판이 보이는 골목 초입이다. 안으로 들어서면 입구의 커다란 철판에서 지글지글 빈대떡 부치는 고소한 냄새가 피어오른다. 벽에는 수많은 손님들의 정겨운 낙서가 가득하고, 찌그러진 양은주전자들이 주렁주렁 걸려 있다. 피맛골의 옛 모습을 담은 빛바랜 사진들이 이 집의 오랜 나이를 말하고 있다. 이 집은 작은 테이블에 의자 등받이가 없어 여전히 서로 등을 맞대고 옹기종기 앉아야 한다. 날이 따스해지면 좁은 골목에 탁자를 펴기도 한다. 테이블 몇 개 들어가는 아담하고 따끈한 방도 있으니 단체 모임하기도 괜찮겠다 싶다.

메뉴는 빈대떡, 굴전, 해물파전, 조개탕, 두부김치 등과 주류로는 전국의 유명 막걸리들과 안동소주를 맛볼 수 있다. 대표메뉴인 빈대떡은 원조, 고기, 김치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골고루 맛보고 싶다면 모둠으로 주문하면 된다.

3대 대표 윤상건씨와 어머니 우제인씨
3대 대표 윤상건씨와 어머니 우제인씨

자손 아닌 이웃 주민에게 물려줘

원조빈대떡은 말 그대로 창업 때부터 내려온 메뉴로 녹두 간 것에 돼지고기 채썬 것을 두세 점만 올려 호떡만 한 크기의 황금색으로 부쳐낸다. 돼지기름으로 부쳐낸 빈대떡을 젓가락으로 떼어 한입 맛보면 마치 집에서 만들어먹는 빈대떡처럼 순하면서 굉장히 고소하다. 돼지고기 채썬 것을 넉넉히 넣은 고기 빈대떡과 잘 익은 김치를 섞어 반죽해 부친 김치빈대떡도 하나같이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우며 고소한 풍미가 대단하다. 빈대떡은 간장에 절인 아삭한 양파를 얹어 먹어도 좋지만, 매콤하고 감칠맛 좋은 조개굴젓을 올려 주면 그 조화로움이 가히 환상이다. 여기에 막걸리 한 사발 쭈욱 들이켜면 속이 시원해지고, 세상 시름이 다 잊혀질 것만 같다.

열차집은 1976년 윤해순(79)·우제인(77)씨 부부가 대물림을 받았다. 마땅히 물려줄 만한 자손이 없던 안덕인씨는 열차집 맞은편에서 구멍가게를 성실하게 하던 윤씨 부부를 눈여겨보다가 대를 물려주었다고 한다. “창업주가 한 달 정도 나와서 전통의 맛을 세세하게 전해줬어요.” 안씨 부부가 매일 가게에 나와 빈대떡의 비법뿐 아니라 식당 운영에 관한 자세한 사항을 부모님처럼 일일이 알려주어 대를 잇는 윤씨 부부의 부담감을 덜어주었다. 당시 주방 직원들도 그대로 인수받아 변함없는 맛을 유지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40여년 전 이 집에 들어온 주방장은 오늘도 옛 방식 그대로 빈대떡을 부쳐내고 있다.

“믹서로 갈면 이 맛이 안 나요!”

좋은 녹두를 사다가 매일 아침 두 시간 정도 불려서 맷돌로 직접 갈아주는데, 다른 가루를 섞지 않고 녹두 100%로 준비한다. 또한 빈대떡만큼은 식용유가 아닌 돼지기름을 여전히 고집한다. 돼지비계 부분을 사다가 끓여서 위에 뜬 기름을 모아 원통에 담아 굳혀 놓고 사용한다. 빈대떡 부칠 때는 뒤집개로 금을 그어가며 하얀 돼지기름을 수시로 올려주고 꾹꾹 눌러 부치기에 속까지 고소함이 배어든다. 특이하게도 이 집 철판은 가운데가 살짝 볼록하게 솟아 있는 구조다. 여분의 기름이 가장자리로 흘러내리기에 빈대떡이 더욱 바삭하다.

빈대떡에 올리는 돼지고기는 비곗살에서 요즘의 추세에 따라 순살코기로 바꾸었다. 어차피 돼지기름으로 부치기에 고소한 맛은 충분하다.

빈대떡과 찰떡궁합인 굴조개젓은 일주일에 두어 번씩 직접 담근다. 조개젓을 사다가 물에 헹궈 짠맛을 좀 빼고 통영에서 올려온 생굴과 고춧가루만 넣어 버무린 뒤 3일간 숙성시켜 손님상에 내놓는다. 굴조개젓에도, 빈대떡에도 인공조미료를 넣지 않아 먹고 나면 속이 편안하다.

60년을 훌쩍 넘긴 열차집은 광화문의 산역사다. 1960년대 자유당 시절, 광화문에서 시위를 하던 학생들을 숱하게 지켜보았고, IMF 외환위기 때는 형편이 기운 많은 이들이 소박한 이 집을 찾아 시름을 달랬다. 그런가 하면 2002년 한·일월드컵 때는 TV로 온종일 경기를 지켜보는 손님들 때문에 회전이 안 되어 장사를 망치기도 했다. 요즘은 주말마다 광화문과 서울광장에서 집회가 열려 주말손님이 반짝 늘었다고 한다.

우리 곁에 오래오래 남아 있었으면 좋았을 피맛골의 빈대떡 골목. 피맛골을 제대로 복원한다는 이야기에 동네잔치까지 벌였지만, 결국 그곳의 빈대떡집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다행히 열차집은 가까이 옮겨 기분 좋게 찾아갈 수 있다. 공평동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부모님을 돕던 외아들 윤상건(50)씨가 3대 대표가 되었다. 입구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초기 열차집 사진 속에 누나와 자전거를 타고 있는 작은 아이가 바로 상건씨다. 그는 부모님이 지켜온 삶의 터전을 이어가고 싶은 마음으로 지금 자리를 사정해서 들어왔다고 한다. 다양한 맛의 빈대떡을 내놓고 전국의 유명 막걸리를 수배한 것도 상건씨다. 주방장이 쉬는 휴일엔 그가 앞치마를 두르고 정성껏 빈대떡을 부쳐준다. 연중무휴 열차집. 상건씨는 오래전 단골들이 물어물어 이 집을 찾아올 때마다 자부심을 느낀다.

언제나 그렇듯 음식은 추억이다. 우리는 음식을 통해 추억을 찾고 우리 자식들에게 남겨줄 추억을 만든다. 피맛골, 서민들의 고단함을 풀어주던 빈대떡 골목은 사라졌지만 추억의 열차집은 아직도 우리를 기다린다.

정수정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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