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AF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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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 큰 인기를 누려온 토끼 캐릭터 ‘미피’를 탄생시킨 네덜란드 아동작가 딕 브루너(Dick Bruna·1927~2017)가 지난 2월 15일 고향 위트레흐트 자택에서 향년 90세로 별세했다. ‘미피’는 딕 브루너가 가족과 함께 바닷가 인근에서 휴가를 보낼 때 모래굴 속에 있는 토끼를 본 뒤 아들을 위해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피의 원래 이름은 ‘네인셔(Nijntje)’이다. 네덜란드에서는 미피 대신 네인셔라고 불린다. 말을 갓 배운 아기들이 토끼를 귀여운 어감으로 부르는 표현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발음하기 쉬운 이름으로 불리길 원했던 작가의 의도대로 네덜란드 외의 국가에서는 ‘미피’로 소개되었다.

딕 브루너는 네덜란드에서 가장 큰 규모의 출판사였던 가업을 물려받을 뻔했지만 그림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영국 추리작가 이언 플레밍의 ‘007시리즈’와 벨기에 작가 조르주 심농의 ‘매그레 반장 시리즈’의 일러스트를 그리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브루너는 1940년대 파리를 여행하면서 프랑스 화가 앙리 마티스와 페르낭 레제의 영향을 받았다. 브루너의 디자인 철학은 ‘단순명료’이다. 흰 바탕에 큰 두 귀, 눈을 표현한 두 점, X 모양 입을 가진 ‘미피’에는 그의 철학이 담겨 있다. ‘미피’ 시리즈는 다홍색, 녹색, 파란색, 노란색 등 몇 개 안 되는 절제된 컬러만을 사용했다. 이 색깔은 브루너 컬러로 불린다. 브루너는 이 컬러들을 사용할 때 정확한 수치를 제시하고 인쇄하도록 지시했다.

미피 시리즈는 다른 캐릭터와는 달리 옆 모습은 단 하나도 없고 오직 정면만 바라보고 있는 컷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이는 미피를 바라보는 어린이 독자들과 정면으로 눈을 맞추기 위한 작가의 의도이다. 토끼의 입을 단순하게 X로 표현한 것은 미피가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들이 스스로 말을 걸게끔 하기 위한 기호였다. 쫑긋 서 있는 두 귀 또한 아이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들어주고 싶다는 표현을 담아낸 것이다.

어느 캐릭터보다도 단순명료하지만 60년의 시간 동안 한결같이 사랑을 받는 이유는 작은 부분에까지 아이들을 생각하는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담겨 있어서일 것이다. 의미를 알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환갑’이 넘은 토끼친구의 앙증맞은 눈과 입이 더욱더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1955년 첫선을 보인 ‘미피’는 ‘지극히 단순해서 오히려 아이들이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비평가들의 우려와는 달리 선풍적 인기를 끌었고, 시리즈는 5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돼 현재까지 8500만권 이상이 팔렸다. 책 이외에도 애니메이션이나 다양하게 디자인된 실용품들로도 친근하게 만나볼 수 있다. 작가는 아이들에게 위험하지 않은 것, 혹은 교육적인 제품에만 미피 캐릭터를 쓸 수 있도록 허락해왔다. 2014년 은퇴한 후에도 새로운 그림책 작업을 해온 ‘미피’의 아버지 브루너. 하얀 토끼친구를 탄생시킨 그는 어려운 형편의 아이들을 위해 유니세프를 비롯해 각종 구호활동에 정기적으로 기부하는 삶을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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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재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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