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스 베네딕트
루스 베네딕트

삼일절이다. 또다시 일본을 생각해 본다. 모든 전쟁에서 패전국의 수뇌는 가혹한 처벌을 면치 못하게 마련이다. 2차대전의 원흉인 히틀러나 무솔리니도 자살 또는 타살로 생을 마감했다. 반면 히로히토(裕仁)는 개인적 안전뿐만 아니라 대대손손 영속까지 보장되었다.

이처럼 승전국인 미국은 그를 단순한 전범으로 처분하지 않고 ‘특별한’ 존재로 처우했다. 당시 이러한 미국 측 대응과 판단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알려진 고전이 있다. 바로 루스 베네딕트(1887~1948)의 ‘국화와 칼’(The Chrysanthemum and the Sword·1946)이다. 이 책은 ‘국화’와 ‘칼’이라는 물건 또는 상징을 통해 ‘일본 문화의 패턴’을 명쾌하게 파헤친 것으로 유명하다. ‘일본 문화의 패턴’은 이 책의 부제이기도 하다.

베네딕트는 대학에서 인류학을 연구하다가 1943년 국무부 산하 전시정보국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의 주요 임무는 교전상대국의 문화적 특징을 연구하여 미군의 전쟁 수행 또는 전후 대응에 도움을 주는 것이었다. 특히 미국은 전쟁 중에 일본군이 보인 비합리적 행동을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일본을 점령했을 때 일본인들이 어떻게 대응할지 궁금했다. 이런 요구에 부응하여 베네딕트는 1945년 5월부터 8월 초까지 ‘일본인의 행동 패턴’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곧이어 전쟁이 끝나자 그는 이 보고서를 대폭 수정·보완해 이듬해 11월 ‘국화와 칼’을 출간했다. 이 책은 미국에서 비상한 관심을 끌며 무려 35만부나 팔렸다. 또한 일어판은 오늘날까지 250만부 이상 팔렸다.

그는 무엇보다 일본이 카스트적 계급사회라고 진단한다. 특히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통해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국가적 위계구조를 완성한다. 그 속에서 일본인들은 각자 자신의 ‘알맞은 위치’를 인식하고, 철저히 그 위치에 ‘합당한’ 행동을 해야 한다. 심지어 그들은 이웃나라들에까지 ‘알맞은 위치’를 부여하려고 한다. 그것이 소위 대동아공영권 구상인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구조 속에서 다양한 ‘온(おん·恩)’을 입고 산다고 생각한다. 온은 단순히 은혜가 아니라, 반드시 갚지 않으면 안 되는 채무이다. 온의 원천은 천황, 부모, 조상, 주군, 스승 등 다양하다. 이처럼 그들의 위계구조는 또한 조상과 동시대인이 함께 포함되는 온의 거대한 그물조직이기도 하다. 그 속에서 그들은 온을 갚기 위해 각각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한다.

온을 갚는 것이 바로 ‘기무(義務)’와 ‘기리(義理)’이다. 기무는 충, 효, 임무 등 아무리 해도 갚기 어렵고 시간적으로도 한계가 없는 채무이다. 반면 기리는 자신이 받은 만큼 갚으면 되고 시간적으로도 제한된 채무이다. 바로 이러한 ‘기리’ 개념에 일본인의 사고방식이 가장 잘 드러나 있다. 그들은 어떤 사람이 기리를 다하지 못하면 그가 ‘파산’했다고 여긴다.

기리는 ‘세상에 대한 기리’와 ‘이름에 대한 기리’로 나눠 볼 수 있다. 전자는 주군이나 주변에 대한 기리이다. 후자는 이름, 즉 명예를 지키는 기리이다. 이것은 모욕이나 핀잔을 받으면 그 오명(汚名)을 씻기 위한 기리, 즉 복수의 기리를 가리킨다. 이러한 복수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 어떠한 수단을 쓰더라도 전혀 불법적이지 않다.

온진(恩人)에게 기리를 다하지 못하면 ‘하지(恥)’를 느낀다. 이것은 단순한 부끄러움이 아니라, 생사를 걸 만큼 중대한 문제이다. 그들은 “기리처럼 쓰라린 것은 없다”고 말한다. 심지어 ‘기리’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기(義·정의)’를 포기하기도 한다. 이처럼 그들에게 하지는 도저히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다. 할복을 해서라도 하지를 씻고 명예를 지키려고 한다.

‘국화와 칼’ 초판 표지
‘국화와 칼’ 초판 표지

‘국화와 칼’은 언뜻 보아 모순적이다. 베네딕트는 일본인이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예술가를 존경하며 국화 가꾸기에 몰두하는 국민’이자, ‘칼을 숭배하고 무사에게 최고의 영예를 돌리는 국민’이라고 지적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섬세한 심미적 감수성을 지녔으되, 잔혹한 무사도적 폭력성을 동시에 지닌 일본인의 모순적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매우 피상적이고 불충분하다. ‘국화’는 우아하고 아름답다. 그래서 황실의 문양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꽃잎 하나하나를 어루만지며 작은 철사로 미세한 부분까지 고정하여 국화를 가꾼다. 그들은 국화를 가꾸듯이 공동체적 가치에 어긋나지 않도록 스스로를 엄격히 규제한다. 이처럼 국화는 이중적 메타포를 갖는다.

‘칼’도 마찬가지다. 칼은 폭력성이나 공격성을 상징한다. 그러나 동시에 ‘마음의 칼’이라는 내면적 메타포를 갖는다. 칼을 지닌 사람이 그것을 녹슬지 않도록 닦아야 하듯이, 사람은 ‘마음의 칼’을 갈고닦아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이처럼 ‘국화’와 ‘칼’을 둘러싼 상징과 메타포는 다중적이다. 그것들은 모순적인 듯하면서도, 또한 일관적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일본인의 심리구조의 특징이다. 로맨틱한 연애에 빠졌는가 하면, 갑자기 손바닥 뒤집듯 가족의 의견에 무조건 복종한다. 쾌락에 빠져들고 안일에 탐하는가 하면, 극단적으로 기무나 기리를 다하기 위해 어떤 일도 해치운다. 베네딕트는 이런 특징이 일본인의 독특한 훈육방식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그들은 어려서는 자유롭게 방임되지만, 나이가 들면서 혹독한 제약을 받는다. 이러한 불연속성이 그들의 심리에 다중성을 심어준다는 것이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자, 미국은 일본을 점령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우려했다. 그러나 베네딕트는 그들을 모욕하지만 않는다면 순종할 것이라고 낙관했다. 그의 예상대로 그들은 원칙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행동했다. 천황이 전쟁을 원하면 전쟁에 뛰어들었고, 천황이 종전을 원하면 일제히 무기를 버렸다. 또한 미국이 ‘위대한’ 나라임을 깨닫자 자신에게 ‘알맞은’ 위치를 인식하고 재빠르게 미국을 정점으로 하는 신질서를 수용했다.

이처럼 ‘국화와 칼’은 미국의 대일점령정책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더구나 당시 막 시작된 냉전체제가 미국의 결정의 폭을 더욱 좁혔다. 결국 미국은 천황제를 비롯해 일본 고유의 질서를 온존시켜 활용하기로 했다. 실제로 그 질서를 통째로 허문다는 것은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기도 했다. 이리하여 ‘일본문화의 패턴’은 고스란히 유지된 것이다.

우리는 일본이 진솔한 반성을 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들은 역사와 선조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온’을 망각하고 ‘기리’을 저버리는 짓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 비추어, 위안부 문제만 해도 우리의 대응이 얼마나 어설픈지 알 수 있다. 그것은 섣불리 외교 현안으로 삼을 일이 아니다. 더구나 단숨에 해결할 일은 더더욱 아니다. 단언컨대 지일(知日)이 없으면 극일(克日)도 없다. ‘국화와 칼’이야말로 더없이 좋은 지일 교과서이다.

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