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메뉴 ‘라쿠치나 라구소스 탈리아텔레’.
추억의 메뉴 ‘라쿠치나 라구소스 탈리아텔레’.

지난 3월 초 전설의 테너 호세 카레라스가 서울 남산의 이탈리아 레스토랑 ‘라 쿠치나’를 찾았다. 은퇴를 앞두고 마지막 월드투어 중이었던 그는 바로 다음날 서울 공연을 앞두고 이곳에서 식사를 했다.

“모든 접시가 싹싹 비워져 나왔어요. 먼저 악수를 청하며 잘 먹었다는 인사를 하셨지요.”

이날 음식에 양파와 마늘을 빼고, 실내온도는 26도로 데워놓았다가 도착하면 바로 보일러를 꺼달라는 호세 카레라스 측의 주문을 식당은 세세하게 챙겼다고 한다. 2001년 오페라의 제왕 플라시도 도밍고가 내한했을 때는 세 끼 연달아 ‘라 쿠치나’에 들를 정도로 흡족해했다. 당시 도밍고가 파스타에 넣어달라고 했던 치즈를 구하기 위해 수입 재료상을 샅샅이 뒤질 정도로 최선을 다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이러한 정성은 비단 거물급 손님들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창업주 장세훈(56) 대표는 지난 27년간 로컬레스토랑으로서 호텔급에 버금가는 서비스와 맛으로 이곳을 이끌어왔다.

1980년대 미국 유학 시절 세계 여러 나라의 음식을 두루 섭렵하게 되었던 장 대표는 유독 이탈리아 음식에 끌렸다.

“한식당이 없던 그곳에서 이탈리아 음식은 제게 푸근하고 든든한 집밥 같았어요.”

귀국 후에도 그 맛을 잊을 수 없었던 장 대표는 1990년 남산 기슭, 그랜드서울하얏트호텔 맞은편에 전문 레스토랑을 열었다. 상호는 이탈리아 가정식처럼 편안한 음식을 내고 싶어 라 쿠치나(La Cucina)’라고 지었다. 이탈리아어로 ‘부엌’이란 뜻이다.

당시만 해도 유명 호텔을 제외하곤 서울에서 이탈리아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곳이 드물었다. 장 대표는 이탈리아인 셰프를 초빙해서 몇 년 동안 이탈리아 본토의 맛에 이 집만의 개성을 조화시켜나갔다. 제대로 된 이탈리아 음식의 진수를 선보이는 데다가 호텔보다 음식 가격이 합리적이어서 주한 외국인과 해외 유학파들 사이에서 먼저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전·현직 대통령들도 찾을 만큼 명성을 쌓았다.

지난해 11월 ‘라 쿠치나’는 오래된 건물을 헐고 새로 지어 재오픈했다. 미술관 건물의 지하에 있던 업장이 2층과 3층으로 올라와 이제 널찍한 창으로 사계절 아름다운 남산과 서울시내 전경을 만끽할 수 있게 되었다. 엘리베이터를 설치해 휠체어를 이용하는 손님들도 드나들기가 편해졌다. 2층의 룸들과 3층 홀 모두 실내 분위기는 모던하고 깔끔하게 변신했지만 맛과 서비스는 여전하다. 메뉴도 전처럼 전채요리·메인·후식의 코스 메뉴와 다양한 단품들이 각각 준비되어 있다.

대표 장세훈씨
대표 장세훈씨

27년간 팀워크 맞춰온 직원들에 감사

오래된 단골들이 특히 자주 찾는 클래식 메뉴는 창업 때부터 인기 있었던 ‘라쿠치나 라구소스 탈리아텔레’다. 쉽게 말해 미트소스를 올린 파스타다.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메뉴를 흔하게 맛볼 수 있지만 이 집만큼 맛있게 하는 곳이 드물다는 손님들이 많다. 주문을 하면 직접 뽑은 두툼한 탈리아텔레 생면에 고기를 갈아 만든 미트소스를 듬뿍 끼얹어 준다. 촉촉한 소스를 면에 비벼서 포크로 돌돌 말아 한입 맛보면, 다진 고기와 토마토의 진한 풍미가 입안에 가득 퍼지면서 훅 스치는 스파이시한 향이 나른한 봄의 미각을 일깨운다. 뒤이어 전해지는 생면만의 촉촉하고 부드러움! 놀라우리만치 쫄깃한 탄력에 감동하게 된다. 집밥처럼 푸근한 담음새의 파스타 한 접시에 입과 온몸을 행복하게 하는 최고의 내공이 담겨 있다.

같은 미트소스로 만든 라자냐도 여전히 인기다. 다만 라자냐는 오븐에 다시 굽기 때문에 건면을 사용해서 최적의 맛을 낸다. 나이프로 한입 크기로 잘라 입에 넣으면 치즈와 미트소스를 입은 라자냐가 혀끝에서 살살 녹는다. 이곳은 조리사들의 사관학교라 불릴 만큼 양식조리사라면 한 번쯤 거친다는 그런 곳이기도 하다. 그만큼 음식의 기본이 남달리 탄탄하다.

“변화에 흔들리는 음식보다는 기본에 충실한 음식을 하고 싶어요.”

장 대표는 오랜 세월 육수나 소스 등의 맛을 제대로 지켜오면서 음식의 중후한 느낌을 강조한다. 또한 요즘의 팬시한 디스플레이보다는 풍성한 담음새, 구수한 우리네 된장찌개 같은 클래식한 음식 맛을 고집한다. 그렇다고 진부한 것은 아니다. 오랜 세월 비슷해 보이지만 현대적인 트렌드를 연구하고 계속 맛을 발전시켜왔기에 음식의 완성도가 대단하다. 미트소스도 그동안 계속 최고의 맛을 찾아 발전해왔다.

쇠고기는 고소하지만 기름기가 많은 한우와 담백한 맛이 좋은 미국산, 그리고 부드러운 맛을 내는 돼지고기를 섞어 먼저 볶아서 기름기를 제거해 고소하면서도 깔끔한 맛을 살린다. 여기에 손으로 일일이 다진 야채와 비프스톡 등을 넣어 되직하게 끓인 뒤 토마토소스를 섞어 맛을 낸다.

육수나 소스를 비롯한 모든 음식은 주방에서 직접 만든 핸드메이드다. 비프스톡 하나만 보더라도 스테이크 등 메인 요리에 쓰이는 최고급 쇠고기의 자투리를 모아서 우려내기에 육수용 고기를 사용하는 곳과는 맛의 수준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외에도 베이컨이나 생햄, 피클까지 일일이 만든다.

“무엇보다 음식의 감칠맛을 조미료가 아닌 자연 재료에서 찾는다는 데에 자부심을 느껴요.”

노력이 많이 들어가는 만큼 이 집 음식은 맛이 자연스럽고 속이 편하다. 양식에 대한 노하우가 쌓이자 2007년엔 기내식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때부터 줄곧 아시아나항공 1등석의 양식 메뉴와 요리법을 ‘라 쿠치나’에서 개발하고 있다. 세계적인 레스토랑 평가지 ‘자갓 레이티드’에서 꼽은 서울의 고급 레스토랑에 선정되기도 했다. 또한 이탈리아의 권위 있는 음식과 와인 매체인 ‘감베로 로소’의 30주년 기념 와인시음회 서울 행사에서 ‘베스트 이탈리안 와인 리스트를 구비한 레스토랑’으로도 뽑혔다.

요즘 이탈리아 레스토랑이 흔해졌다. 잘한다는 곳도 많고 멋스럽고 인기 있는 곳도 있다. 하지만 이 집처럼 할아버지, 아버지, 손자 3대가 함께 찾는 집은 드물다. 변화하는 세월 속에 ‘라 쿠치나’가 오랜 세월 꾸준히 인기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장 대표는 이렇게 답한다.

“모든 세대를 아우르는 우리집만의 깊은 음식 맛과 오랜 세월 팀워크를 맞춰온 직원들 덕분이죠.”

정수정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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