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 제주도 하멜상선기념관에 있는 하멜상. (우) ‘하멜 표류기’(원본)
(좌) 제주도 하멜상선기념관에 있는 하멜상. (우) ‘하멜 표류기’(원본)

역사는 반드시 인간의 심각한 의도대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경우에 따라 아주 사소한 ‘뜻밖의’ 사건이 역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바꾸기도 한다.

1653년 8월 조선에도 아주 사소한 ‘뜻밖의’ 사건이 발생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스페르베르호(號)가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다가 제주도 해안에서 폭풍우로 난파되었다. 선원 64명 가운데 선장을 포함하여 28명이 사망하고 36명이 살아남아 가까스로 뭍에 표착(漂着)했다. 그 이후 이들은 무려 13년 동안 억류 생활을 하다가 생존자들이 탈출해 귀향했다.

이 중에는 그 배의 서기(書記)였던 헨드릭 하멜(Hendrick Hamel· 1630~1692)도 끼여 있었다. 그는 1666년 9월 조선을 탈출해 이듬해까지 나가사키에 머물렀다. 그때 그는 회사에 밀린 급료를 요구하기 위해 그동안 일행이 공무를 수행하다 겪은 재난을 연도별로 꼼꼼히 기록했다. 오늘날 우리는 이 문건을 흔히 ‘하멜 표류기’라고 부른다.

하멜 일행은 표착 직후 체포되어 제주도에 억류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조정이 통역 겸 조사관으로 파견한 사람이 바로 박연(朴淵)이었다. 그 역시 1627년 조선 해안에 표착했다가 붙잡힌 네덜란드인이었다. 본명은 얀 야너스 벨테브레이다. 그는 조선에 귀화하여 훈련도감의 장교로 있었다. 하멜은 당시 박연의 나이를 57~58세로 추정했다.

이듬해 5월, 조정은 그들을 한양으로 올려보내라고 명령했다. 호송 도중에 한 명이 사망하여 한양에 도착한 것은 35명이었다. 며칠 후 그들은 국왕(효종) 앞에 불려 나가 고국으로 송환해 달라고 간청했다. 국왕은 이를 거부하면서 대신 “죽을 때까지 부양해주겠다”고 말했다. 이튿날 그들은 박연이 소속된 훈련도감에 배치되어 호패와 화승총을 지급받았다.

당시 네덜란드는 대항해 시대를 주도하던 나라였다. 하멜 일행도 항해사, 조타수, 포수, 갑판원, 선의(船醫), 서기 등 다양한 직군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의 배에는 대포만 수십 문이 있었다. 1666년 조선을 탈출할 당시의 생존자(16명) 중에도 포수만 4명이 있었다. 하지만 조선이 그들의 근대적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고 시도한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그들을 처음 접견한 국왕은 그들에게 ‘네덜란드 식으로’ 춤을 추게 하고 노래도 부르게 했다. 이어서 그들은 ‘매일 고관들의 집을 방문하도록 명령을 받고’ 그 집 식솔들 앞에서 광대 노릇을 해야 했다. 큰 코, 붉은 머리, 흰 피부를 가진 ‘남만인’들은 당시 한양 사람들에게 대단한 볼거리였다. 그들이 어디를 가나 구경꾼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청나라 사신이 올 때마다 그들은 가택에 연금되거나 남한산성으로 격리되었다. 그런데 1655년 3월 그들 중 두 명이 몰래 숨었다가 사신의 행렬로 난입하는 충격적 사건이 벌어졌다. 조정은 사신에게 뇌물을 주어 사건을 무마하고도 상당 기간 청나라의 트집을 염려했다. 두 명은 투옥되었다가 모두 목숨을 잃었다.

이 돌발적 사건을 계기로 조정은 이들의 존재에 부담을 갖게 되었다. 청나라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일본과의 관계도 문제였다. 임진왜란 후 양국은 외국인의 표착을 상호 통보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강경파들은 아예 이들을 처형해서 없애자고 주장했으나 국왕은 호남으로 보내도록 조치했다. 호남은 청나라와 일본의 눈길로부터 가장 먼 곳이었다.

1656년 봄, 생존자 33명은 전라병영(강진 소재)으로 이송되었다. 그들은 잡다한 부역에 시달리며 땔감을 구하고 심지어 구걸까지 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5~6년 동안 그들 중 무려 11명이 죽고 1662년에 생존자는 22명으로 줄었다. 재정이 피폐해진 전라병영의 요청으로 그들은 다시 여수(12명)·순천(5명)·남원(5명)으로 분산배치되었다.

당시에는 가뭄·혹한과 같은 자연재해가 잇따라 그들뿐만 아니라 조선 민중 전체가 도탄에 빠졌다. 더구나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겪은 조선 사회는 피폐하여 근본적인 변화가 절실했다. 주자학도 이미 순기능을 다했다. 그럼에도 엘리트들은 시대 변화를 외면한 채 수구적인 예학(禮學)을 통해 기득권을 강화하려고 했다. 여러 측면에서 당시는 조선의 암흑기였던 셈이다.

다시 3~4년이 흘러 생존자는 불과 16명으로 줄었다. 그들은 ‘배를 구하려고 온갖 수단을 다한’ 끝에 1666년 9월 웃돈을 주고 산 배를 타고 8명이 일본으로 탈출했다. 1668년에 잔존자 7명이 일본을 통해 송환되었다. 잔존자 8명 중 1명은 그 사이 사망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리하여 최후의 생존자 15명은 꿈에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당시 조선은 항해술, 조선술, 포술(砲術)과 같은 그들이 보유한 선진적 기술을 별로 주목하지 않았다. 또한 돌발적 사건을 겪고 나서야 부랴부랴 그들의 신병 처리를 고민했다. 아울러 사건의 대목마다 늘 온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처럼 조선은 이 사건을 둘러싸고 피상적인 호기심, 무전략, 온정주의 등으로 일관했다. 아쉽게도 세계사적 흐름에 대한 안목은 전무했다.

조선을 탈출해 규슈 해안에 표착한 하멜 일행은 일본의 개항장(開港場)인 나가사키로 압송되었다. 그들이 도착하자 그곳의 일본 행정 책임자는 그들에게 난파선 규모 및 항해 목적, 조선의 군사·경제·풍습·종교, 탈출 경위 등을 비롯해 5개 분야 총 54개항을 집중적으로 심문했다. 조선 측이 이렇게 그들을 체계적으로 조사했다는 이야기는 ‘하멜 표류기’나 조선 측 기록 어디에도 없다. 조선이 13년 동안 하지 않은 일을 일본은 단 하루 만에 한 셈이다.

하멜의 귀환 후 네덜란드는 조선과 직교역을 계획하고 코레아호라는 배까지 만들었다. 이를 통해 그들이 새로운 시장 개척에 얼마나 적극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무역 독점을 노린 일본의 반대로 그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다. 당시 일본은 대마도를 통한 중계무역으로 재미를 보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시 하멜의 표착은 매우 중요한 ‘뜻밖의’ 사건이었다. 그것은 대항해 시대가 은둔의 왕국에 불쑥 내민 초청장이었다. 하지만 조선의 엘리트들은 그것이 초청장인 줄도 몰랐다. 그들은 예송(禮訟) 논쟁과 같은 주자학적 명분 다툼에는 능했으나 정작 세계사의 생동적인 움직임에는 무지했다. 그런 점에서 ‘하멜 표류기’는 하멜의 표류기이자, 동시에 조선의 표류기이기도 하다.

흔히 역사에서 ‘만약’이라는 가정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하멜이 차라리 100년 후에 왔으면 어땠을까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요즘 나라 돌아가는 형편이 심상치 않다. 자칫 우리가 후대에 또 다른 ‘만약’을 남겨 주는 부끄러운 세대가 될 수도 있다. 어떻게든 그런 일만은 피해야 할 것이다.

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