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성적 충동’이란 경제용어가 있습니다. 영국의 케인스가 쓴 ‘고용·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에 등장하는 말입니다. 원문의 ‘애니멀 스피릿(Animal Spirit)’을 번역한 말인데, 결국 경제를 이끄는 것은 풍요와 쾌락을 갈망하는 동물적 본능이란 얘기입니다. 한국 경제에서 박정희 정부 때만큼 ‘야성적 충동’이 충만했던 시기는 없을 것입니다. 그중 1967년 창업해 30년 만에 재계 2위로 도약한 대우와 ‘킴기즈칸’ 김우중 회장만큼 ‘야성적 충동’을 몸소 실현한 기업과 기업인도 드뭅니다. 하지만 지난주 기자와 마주 앉은 김우중 회장은 81세의 나이 탓인지 ‘야성적 충동’이 사라진 보청기를 낀 노신사에 불과했습니다. 인터뷰 중 간혹 예리한 눈빛이 번뜩였지만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말 역시 새삼 실감했습니다.

1997년 한국 경제가 IMF(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에 들어선 이후 ‘야성적 충동’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서울대를 나와 행정고시를 패스한 모범생 경제관료들은 IMF가 권고한 것보다 한층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 한국 경제를 재설계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부채비율 200%’ 잣대입니다. 빈자(貧者)가 짧은 시간 안에 부자(富者)가 되려면 사업 밑천을 빌려 기업을 일으키는 것이 불가피합니다. 하지만 당시 관료들은 개발도상국에 불과했던 한국에 선진국 기준을 요구했고, 결국 ‘부채비율 200%’는 재계 2위 대우의 목줄을 눌러 공중분해한 예리한 칼날이 됐습니다.

1999년 김우중과 대우가 몰락한 후 한국에서 더 이상 맨손에서 떨치고 일어선 스타 기업인은 나오지 않습니다. 재계 1~5위까지는 모두 재벌 2~3세 세습기업인들로 짜여 있습니다. 물론 벤처나 IT기업인도 있다고 하지만 국민 전체를 먹여살리는 데는 엄연한 한계가 있습니다. 역사에 가정은 무의미하다고 하지만, 만약 1999년 당시 김우중 대우 회장과 이건희 삼성 회장 간에 ‘대우전자-삼성자동차 빅딜(맞교환)’이 성사됐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그랬다면 적어도 한국의 자동차산업만큼은 현대차 같은 또 하나의 강력한 자동차기업(대우차)을 갖고 있었을지 모를 일입니다.

당시 빅딜이 불발되면서 DJ정부는 대우 해체 결정을 내렸습니다. 미국의 GM(제너럴모터스)은 대우차를 헐값에 인수하는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얻었습니다. 대우사태 와중에 방한한 미국 클린턴 대통령은 “한국 대기업 구조조정이 지지부진하다”며 GM의 대우차 인수를 거들었습니다. 그랬던 GM이 미국발 금융위기 여파로 2009년 파산보호를 신청했을 때 미국 정부는 어땠습니까. 오바마 행정부는 ‘거버먼트모터스(정부차)’란 비아냥을 감수해가며 GM을 구제해 미국 기업으로 존속시킨 뒤 부활시켰습니다. IMF 권고를 금과옥조처럼 떠받든 대우사태 당시 관료들은 어리둥절했을 것입니다. 돈에는 국경이 없다지만 기업에는 국적이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떠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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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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