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작품  ‘나이트 호크(Night Hawk)’
1942년 작품 ‘나이트 호크(Night Hawk)’

지난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든 사람들은 미국의 허리를 이루는 평균적인 미국인들이었다. 어떻게 이들 평균 미국인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을까?

현실을 고려해 필자가 강조하는 길은 예술이다. 미국인이 ‘꾸준히’ 좋아하는 예술가를 통해 평균 미국인의 생각을 읽는 식이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가 답이다. 설문조사를 하면 항상 미국민이 좋아하는 화가 1~2위에 오르내리는 인물이다. 명실상부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화가가 호퍼다. 호퍼는 미국인의 내면을 가장 잘 묘사한 화가로 통한다. 오바마 전 대통령 집무실에 걸려 있던 그림 중 하나도 호퍼 작품이었다.

프랑스가 인정하는 미국의 화가

호퍼는 1967년 8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흥미롭게도 올해 호퍼 사후 50주년 기념전은 미국보다 유럽에서 한층 더 알아주는 행사다. 특히 프랑스가 적극적이다. 20대의 호퍼가 그림 공부를 위해 파리에 머문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호퍼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화풍은 프랑스 인상주의였다.

내가 호퍼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눈을 뜬 것은 2012년 1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파리 샹젤리제 근처의 그랑팔레(Grand Palais)에서 호퍼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거대한 유리로 뒤덮인 그랑팔레는 미술만이 아니라 음악, 스포츠 행사도 열리는 만능공간이다. 프랑스인 친구의 소개로 얼떨결에 찾아갔지만, 당시 놀랐던 것은 엄청난 관람객 숫자였다. 날씨가 추운 12월인데도 1시간 이상 기다려야 했다. 여름철 루브르박물관보다 더 인파가 많았던 것 같다. 전시 관계자는 보통 관람 2시간 전부터 행렬이 늘어서지만 연말이라 사람이 더 많아졌다고 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3개월 남짓한 전시 기간 동안 총 80만명이 다녀갔다고 한다. 하루에 1만명이나 다녀간 셈이다. 전시회 마감일도 본래 예정보다 사흘이나 연장했다고 한다.

예술 특히 미술에 관한 프랑스인의 자존심은 남다르다. 미국 예술, 특히 미국 미술에 대한 프랑스의 평가나 관심은 아마도 아프리카를 대하는 수준일 듯하다. 하지만 호퍼는 다르다. 미국인보다 한층 더 열광한다. 이러한 프랑스의 호퍼 사랑이 너무도 신기하게 느껴졌다. 호퍼에 대한 특별한 관심은 미국의 천적인 프랑스의 위치를 재확인해주는 증거일지 모른다. 지구상 200여개 나라를 통틀어 미국에 대해 가장 논리적이면서도 이성적으로, 나아가 예술적으로 ‘대드는’ 나라가 프랑스다. 무력이나 외교적 수사로서가 아니라 머리와 지혜의 싸움이다. 워싱턴에 가장 많은 외교관을 파견한 나라 역시 바로 프랑스다. 의회담당 외교관의 경우 2~3명에 그치는 한국에 비해 프랑스는 50명이 넘는다. 영국이 미국을 가장 잘 안다고 하지만, 세계에서 미국을 가장 잘 다루는 나라는 바로 프랑스다.

호퍼의 그림 가운데 평균 미국인의 정서를 대변하는 가장 유명한 그림은 ‘나이트 호크(Night Hawk)’다. ‘밤을 새우는 올빼미족’이 나이트 호크의 의미다. 1942년 작품으로, 5년 전 그랑팔레 전시회 때도 가장 화제를 모았다. 나이트 호크는 미술을 잘 모르는 일반인도 아마 어디선가 한 번쯤은 본 작품일 것이다. 단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기억에 쉽게 남는다. 예비 지식이 전혀 없다 해도, 첫눈에 이끌릴 만한 명작이다. 시카고 예술관(www.artic.edu)이 소장한 가로 82㎝, 세로 140㎝ 크기의 비교적 큰 유화다. 사실상 호퍼를 20세기 미국 미술의 일인자로 끌어올린 작품이기도 하다.

에드워드 호퍼
에드워드 호퍼

렘브란트 좋아하는 네덜란드 이민자 출신

그림을 접하는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고독’으로 집약될 수 있을 듯하다.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작품 ‘노르웨이의 숲’을 읽고 난 뒤의 느낌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림의 배경은 맨해튼 다운타운, 뉴욕 그리니치 애비뉴(Greenwich Avenue)의 심야 다이너(Diner)다. 그리니치는 동성결혼, 마리화나 자유화와 같은 미국 리버럴 운동의 발상지로 청년들이 넘치는 곳이다. 다이너는 맥도날드나 KFC가 유행하기 전까지 인기를 끌던 미국 패스트푸드의 원조 같은 레스토랑이다. 24시간 영업하는 곳으로 현재도 곳곳에 남아 있다. 뉴욕에서는 그리스 이민자들이 운영하는 다이너가 많았다.

그림 속 시간은 추정컨대 심야 1시쯤이 아닐까? 등장인물 네 명의 시선은 전부 제각각이다. 정면 얼굴이 드러난 남녀는 새벽까지 클럽에서 춤을 추다가 호텔로 가기 전 잠시 들른 듯하다. 모자를 쓴 서비스맨은 일을 하면서 손님들을 쳐다보고 있다. 그림 속의 진짜 주인공은 등을 보인 남자다. 왜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을까? 이 사람은 누구일까? 무슨 일로 심야에 혼자 다이너에 들렀을까?

흥미로운 것은 다이너의 전면 유리창과 내부 테이블이 보여주는 묘한 앵글이다. 그림에 관심을 갖고 있다면 누군가를 금방 떠올릴 수 있을 구도다. 프랑스 인상파 중 한 명인 에드가 드가(Edgar De Gas)다. 발레, 경마를 주제로 한 그의 그림 속에 드러난 묘한 앵글이 호퍼의 그림에서도 느껴진다. 예술 평론가들은 나이트 호크는 드가의 영향이 강하게 밴 작품이라 말한다.

호퍼는 원래 네덜란드 이민자 출신이다. 프랑스뿐만 아니라 그림 공부를 위해 네덜란드에도 오랫동안 머물렀다. 자신이 지닌 네덜란드 DNA를 통해 예술에 대한 열정과 성숙미를 확인하려 했을지 모른다. 나이트 호크 속의 색상과 빛의 조화는 바로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의 영향하에 탄생된 것이다. 호퍼 스스로도 렘브란트를 가장 존경하는 예술가라고 말한 적이 있다.

명암의 확실한 분리와 조화는 호퍼의 모든 작품에서 엿볼 수 있는 공통분모다. 네덜란드 출신 빈센트 반 고흐도 호퍼가 모델로 삼은 화가다. 구체적으로 1888년, 고흐가 아를르에 머물 때 그린 ‘밤의 카페 테라스(Caf Terrace at Night)’가 나이트 호크의 모델로 평가된다. 별이 보이는 밤하늘과 고흐 특유의 노란색과 푸른색이 조화를 이룬 프랑스 시골 카페가 20세기 맨해튼 심야 다이너의 원형이다.

1939년 작품 ‘그라운드 스웰(Ground Swell)’
1939년 작품 ‘그라운드 스웰(Ground Swell)’

미국인의 내면을 가장 정확히 표현

19세기 말 프랑스 카페는 세상사의 풍파에서 비켜서 잠시나마 안정을 찾을 수 있는 평화의 공간이었다. 1789년 프랑스혁명부터 1871년 파리코뮌(Paris Commune)까지의 카오스 80여년은 인간성 상실의 시대로 기록된다. 밖에서 보는 혁명은 아름답고도 낭만적이기까지 하지만 안에서 피부로 겪는 혁명은 잔인하고도 살벌하다. 피와 배신의 연속이었다. 1940년대 맨해튼은 그같은 혁명의 시대와는 거리가 먼, 미국식 번영과 평화로 장식된 코스모스 시대였다. 그림 속 서비스맨 바로 뒤의 대형 커피머신은 미국식 대량 소비의 상징이기도 하다. 똑같이 네덜란드 DNA를 지닌 화가였지만 고흐는 어둠 속의 밝음을, 호퍼는 밝음 속의 어둠을 표현했다고도 볼 수 있다.

프랑스에서의 호퍼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미국 내 호퍼 그림 순례에 나섰다. 워싱턴 국립예술관(www.nga.gov), 국립초상화뮤지엄(npg.si.edu), 뉴욕의 메트로폴리탄뮤지엄(www.metmuseum.org)에 들러 가장 먼저 호퍼 그림을 찾았다.

신비하게도 호퍼의 그림 어딘가에는 반드시 나이트 호크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평생 사람들과 교우관계가 별로 없던 호퍼 자신의 캐릭터 탓이기도 하겠지만, 고독과 더불어 단순 솔직함이 강하게 느껴진다. 고독, 단순, 솔직은 그 누군가 채워넣을 수 있는 결핍이 아니다. 미국인, 나아가 인간 모두가 원래부터 갖고 있는 태생적·근본적·본능적 부분이다. 호퍼의 그림이 가진 독특한 매력은 바로 미국인 DNA 속에 흐르는 원초적 부분에 대한 재발견, 재인식에서 비롯된 것일지 모르겠다. 미국인조차 잊고 지내던 내면세계를 가장 정확히 표현한 인물이 바로 호퍼다.

트럼프와 그를 지지하는 평균 미국인에 대한 이해는 호퍼가 묘사한 미국인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서 출발하지 않을까 싶다. 나이트 호크의 배경이 뉴욕 맨해튼이란 점도 미국 정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요소 중 하나다. 프랭크 시나트라가 노래한 ‘24시간 잠들지 않는 도시’ 맨해튼에서 느껴지는 적막과 외로움이다. 앤디 워홀 스타일의 팝아트가 지배하는 듯한 뉴욕이지만 진짜 내면세계는 호퍼의 나이트 호크로 채워져 있다. 화려하고 번화하고 바쁜 뉴욕에 익숙한 한국인이라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세계다. 그러나 보통 미국인들에게 그 같은 풍경은 너무도 자연스럽다. 맨해튼에서 50㎞만 서쪽으로 나가 보면 그 같은 분위기를 피부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시끄러운 트럼프가 고독이 밴 호퍼의 나이트 호크와 연결돼 있다는 데 대해 이견을 갖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트럼프는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식 교육을 받은 미국인이다. 아무리 엉터리처럼 보여도 호퍼 그림 속의 정서를 한국인보다 깊이 이해하는 사람인 것은 분명하다. 미국처럼 다양한 모습을 가진 나라의 원형을 알고 싶다면 호퍼의 그림을 권한다. 한번 스쳐가듯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유럽 명화에 비해 얄팍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잘 그린 그림이라 해도 호퍼만큼 분명하고도 확실한 느낌을 주는 그림은 극히 드물다. “그림 자체가 아니라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그림을 활용했을 뿐이다.” 호퍼가 생전에 수차례 강조했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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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 퍼시픽2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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