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화
[2453호] 2017.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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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선수 대기실에서 지켜본 아사다 마오는

▲ 지난 4월 12일 일본 도쿄의 한 호텔에서 은퇴 발표를 하는 아사다 마오. photo AFP
한국인에겐 ‘영원한 2인자’였을 수 있지만 일본인에겐 소중한 ‘피겨 여왕’이었다. 아사다 마오(淺田眞央). 지난 4월 11일 전격 은퇴를 선언했다. 갑작스러운 건 아니었다. 2014년 김연아가 은퇴한 후에도 아사다는 시즌을 이어왔지만 어쩐지 아슬아슬해 보였던 게 사실이다. 2018 평창올림픽까지 어떻게든 버티는 걸까 싶기도 했지만 세월의 벽을 이기지 못했다. 1990년생, 아사다의 나이도 벌써 스물일곱이다. 피겨스케이팅 선수로선 충분히 노장이다. 일본 내에서도 신예들에게 밀리기 시작한 지 한참 됐다. 올림픽 출전 티켓을 확보할 가능성도 낮았던 게 사실이다. 이로써 한국의 김연아와 일본의 아사다 마오의 ‘피겨 여정’은 완전히 막을 내렸다.
   
   좋은 친구보다 만나기 힘든 게 좋은 맞수라 했던가. 2004년 시작된 동갑내기 두 소녀의 10년 대결은 한·일 스포츠사에 유례없던 화젯거리였다. 두 명 각자의 스타성, 종목의 매력, 한·일 관계의 특수함, 여러 스포츠 전문가들은 앞으로 한동안은 이런 조합이 나오기 힘들 거라 예상한다.
   
   물론 한·일전으로만 놓고 보면 비슷한 예는 있었다. 차범근과 오쿠데라 야스히코가 대표적인 예다. 둘의 무대는 독일 분데스리가였다. 각자의 모국을 등에 업고 타국의 잔디를 누볐다. 진출 자체는 오쿠데라가 먼저였다. 일본 축구에서 승승장구하던 미드필더 오쿠데라는 1977년 FC쾰른에 입단했다. 스트라이커 차범근은 이듬해 다름슈타트 선수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지금은 거의 잊혔지만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두 명의 맞대결은 한·일 양국에서 큰 화제였다. 1979년 이뤄진 첫 맞대결, 차범근이 2골을 넣으며 팀의 승리를 견인했다. 이날 프랑크푸르트의 한국 식당엔 새벽까지 ‘황성옛터’가 울려퍼졌다고 한다. 차붐 일대기의 한 장면이다. 오쿠데라는 159경기 11골을 기록하며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차범근의 기록은 234경기 26골(2부리그 제외).
   
   여성 선수의 맞대결로 찾아보면 전이경-양양A가 있다.(중국 쇼트트랙계엔 양양이라는 선수가 2명 있기 때문에 이름 뒤에 태어난 달의 이니셜을 붙여 구별한다.) 두 선수의 경력 자체가 여자 쇼트트랙의 역사다. 전이경은 1994년 릴레함메르올림픽에서 여자 쇼트트랙 최초로 2관왕에 올랐다. 2년여 뒤 양양A가 뒤쫓아왔다. 1997년 나가노세계선수권대회에서 둘은 공동우승을 했다. 이후 한동안 양양의 시대가 이어졌다. 한·중 여제의 맞대결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999년 전이경의 은퇴로 끝나버렸다. 선수층이 두꺼웠던 한국 쇼트트랙의 특성이 한몫을 했다. 지금까지도 아시아를 넘어선 세계의 쇼트트랙 여제라 불리는 양양이지만 유독 올림픽 성적은 저조했다.(금메달 2개) 워낙 한국 쇼트트랙팀이 큰 경기에 강하기도 했지만, 전이경과 비교하면 큰 대회에 약한 편이었다. 아사다도 비슷했다. 김연아에 비해 유독 큰 대회에서 약한 모습을 보였다.
   
   
   일본의 다섯 번째 피겨 여왕
   
   기자는 언론계에 들어오기 전, 피겨스케이팅 현장을 지켜볼 수 있는 자리에 있었다. 2009년과 2010년. 2010 밴쿠버올림픽을 앞두고 이들의 대결이 한창 꽃을 피울 때였다. 기자가 본 ‘피겨스케이팅’은 상당히 까다로운 종목이다. 추운 링크에서 운동을 하다 보니 부상에 취약하고, 단판 승부이다 보니 정신력이 관건이다. 최정상급의 선수들만 보자면, 몸을 풀며 자신의 순서를 기다릴 때 이미 승부가 결정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선수들은 한곳의 대기실에 모여 경기복과 스케이트를 착용한다. 이때 아시아 선수들, 정확히는 한국과 일본 선수들에게서 느껴지는 긴장감은 그야말로 애처로울 정도였다. 경기에 임하는 마음이 달라서였을까. 음악을 듣거나 수다를 떨며 여유로운 모습이었던 미국이나 캐나다 선수들과는 비교됐다. 아사다의 모습은 그야말로 얌전했다. 거의 매 경기 아사다의 곁에는 두세 명의 여성이 붙어 있었다. 일본연맹의 임원들이었다. 긴장한 탓인지 아사다는 이들은 물론 다른 선수들과도 별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돌아보면 당시 한·일 대중의 관심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일본 언론은 유력 정치인을 취재할 때처럼 아사다와 김연아 전담기자를 각각 정해 매 시즌 취재했다. 밴쿠버올림픽은 그 절정이었다. 일본의 한 방송국 관계자는 김연아 측에 말 그대로 백지수표를 제시했다. 경기 다음날, 아침 방송에 출연하는 조건이었다. 당연히 기업의 제안도 있었다. 김연아와 아사다를 함께 광고 모델로 기용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김연아 측이 거절했다. 관계자의 일원으로 당시엔 거절하는 게 마땅하다 생각했다. 롯데가 아사다 마오를 후원했던 걸 두고 한국 매체에 비난조의 기사가 실린 적도 있다. 돌이켜보면 그럴 것까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저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며 10대 시절을 통과하고 있던 두 소녀에게 천박한 스포츠 국수주의의 잣대를 들이댄 게 아니었을까.
   
   한국은 아사다를 김연아에게 밀린 불운한 2인자쯤으로 평가하지만, 일본에서 아사다의 인기는 대단하다. 피겨 여왕의 맥을 이어준 피겨 천재다. 일본 여자 피겨의 역사는 깊다. 여성 최초로 트리플 악셀 점프를 뛴 이토 미도리(伊藤みどり)부터 사토 유카(佐藤有香), 아라카와 시즈카(荒川靜香), 안도 미키(安藤美姬), 그리고 아사다까지 세계선수권이나 올림픽을 제패한 최정상급 선수를 5명이나 배출했다. 아사다의 인기 비결은 몇 가지로 분석해 볼 수 있다. 일단 종목 자체의 매력이다. 피겨를 꽃에 비유하면 벚꽃이다. 한순간 개화했다 통렬히 낙화한다. 경기 요소 중 핵심인 점프가 그렇고, 선수 생활 자체도 그렇다. 트리플 악셀이라는 꿈을 좇았던 아사다의 도전정신도 인기에 큰몫을 했다. 별다른 큰 스캔들 없이 자기 관리를 잘하며 선수생활을 해온 점도 일본 국민들은 좋게 봤을 터다. 아사다는 다른 최정상급 선수들에게도 지지를 받았다. 동향인 야구선수 이치로와의 인연은 각별하다. 밴쿠버올림픽 당시 이치로와 전화통화를 하며 정신력을 갈고닦았다.
   
   지난 4월 12일 은퇴 발표장에 홀로 선 아사다를 보며 아사다 교코(淺田匡子)씨가 떠올랐다. 아사다의 모친이다. 2011년 12월 딸의 시즌 중에 별세했다. 48세의 나이, 간경화였다. 안 그런 엄마가 있겠냐만은, 마오의 가장 큰 지지자였던 교코씨다. 2009년 겨울, 일본에서 열린 대회장 뒤편에서 교코씨와 마주친 적이 있다. ‘아사다의 어머님이 혼혈이었던가?’ 순간 생각했을 정도로 얼굴색이 까맸다. 빛나는 눈빛 때문이었을까, 병기(病氣)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두 해 후 교코씨는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간이식을 받지 않으면 다음 올림픽까지 살 수 없을지 모른다.’ 딸들의 간을 이식받는 게 최선이었겠지만 교코씨는 한사코 거부했다고 한다. ‘소중한 딸들의 몸에 칼을 댈 수 없다’, 마오의 언니 마이도 피겨선수였다.
   
   천재들의 조우는 그대로 역사가 된다. 별들이 지나간 궤적에서 어떤 유산을 발굴하는가는 지켜보는 이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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