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녘, 스트라스부르를 관통하는 일강을 왕복하는 유람선의 모습. ⓒphoto 이승원
해질녘, 스트라스부르를 관통하는 일강을 왕복하는 유람선의 모습. ⓒphoto 이승원

1950년대 미국의 도서관에서는 유례없는 ‘책의 학살’이 감행되고 있었다. 새로운 지식의 탄생을 억압하는 과거의 분서갱유(焚書坑儒)식 말살작업이 아니라 책의 미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진행된 책의 학살이었기에 더욱 기가 막힌 일이었다. 당시 도서관 사서들은 책의 모서리를 두세 번 이중으로 접어본 뒤, 만약 종이가 찢어지면 ‘이 책은 21세기가 오기 전에 부스러질 것이다’라고 결론을 짓고, 도서관에서 해당 종이책을 없애고 마이크로필름으로 대체했다.

예일대학교에서는 무려 130만권의 책이 이렇게 ‘이중접기 테스트’에 불합격했다는 이유로 서가에서 축출되었다. 그런데 몇십 년이 지난 뒤 확인해 보니, 당시 곧 부스러질 것이라고 예측되었던 종이책들은 여전히 건재한 반면 영구보존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마이크로필름은 군데군데 흠집이 생기고 기포가 일어나 제대로 글자를 읽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로버트 단턴의 ‘책의 미래’에서는 이렇듯 예측 불가능한 책의 운명이 흥미롭게 그려지고 있다.

그 이후에도 수없이 ‘종이책의 종말’을 걱정하거나 단언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커갔지만 여전히 종이책을 향한 독자들의 친밀감은 지속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인터넷 시대 이후 ‘구텐베르크 은하계(인쇄매체 중심의 세계)의 종말’을 예언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구텐베르크 은하계’와 ‘뉴미디어 은하계’가 더욱 상호보완적으로 서로를 지탱하는 형태로 나아가고 있다. 인쇄술의 발명이 없었다면, 인류의 삶은 과연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을까. 정보를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구전(口傳)의 시대를 넘어 활자의 시대로 갈 수 있었던 것도, 구텐베르크 이후의 괄목할 만한 인쇄 매체의 발전 덕분이었다. 사실 인터넷을 비롯한 뉴미디어의 세계 자체도 구텐베르크 은하계에 토대를 두고 있는 셈이다.

파리에서 기차로 두 시간

나는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본격적으로 발전시킨 도시가 스트라스부르라는 사실을 안 뒤부터 왠지 이 도시가 친근하게 느껴졌다. 스트라스부르가 독일과 프랑스의 접경지대라는 점, 한때는 독일 영토였다가 지금은 프랑스 영토가 되어 도시 곳곳이 치열한 분쟁의 흔적으로 가득하지만 지금은 브뤼셀과 함께 ‘유럽의 수도’라 불리며 통합과 화해를 상징하는 도시가 되었다는 점도 호기심을 부추겼다.

만약 인류사의 가장 위대한 발견 10가지를 꼽으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제일 먼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을 꼽고 싶다. 물론 고려의 금속활자가 구텐베르크보다 먼저 발명되긴 했지만 인쇄술을 ‘민중을 향한 정보와 지식의 전파’라는 목적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사회문화적 지원이 아쉽게도 우리에겐 부족했다. 구텐베르크 은하계의 혁명성은 활자 자체의 과학적인 발전보다도 지식과 정보의 독점을 넘어 소통의 대중화와 민주화를 이룬 것이라는 점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스트라스부르에 도착해 짐을 풀자마자 구텐베르크 광장부터 방문하고 싶었다. 파리 동역(Paris Est)에서 기차를 타면 2시간도 채 되지 않아 스트라스부르 중앙역에 도착한다. 중앙역에서 구시가지까지는 걸어가도 15분 정도 거리이므로 따로 교통기관을 이용하지 않아도 된다.

스트라스부르 구시가지에서 놓칠 수 없는 두 가지가 바로 구텐베르크 동상과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이다. 구텐베르크 동상 앞에서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회전목마까지 성업 중이기 때문에 눈에 잘 띌 수밖에 없다. 구텐베르크 동상 앞은 인파로 북적였다. 구텐베르크는 과학자나 지식인이라기보다는 ‘상인’이었기에 자신의 발명이 인류에게 미치는 역사적인 영향력보다는 ‘얼마나 돈을 벌 것인가’에 관심이 있었을 것이다.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활용해 가장 먼저 찍어낸 인쇄물이 바로 ‘면죄부’였다는 사실은 그의 재빠른 장사 수완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그는 ‘성서로 돌아가자’는 루터의 종교개혁이 불러일으킨 새바람을 타고 ‘표준성서’의 대량생산을 꿈꾸며 더욱 성공적인 상인의 길을 걸어가려 했지만 모든 것이 그의 뜻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구텐베르크는 동업자인 푸스트가 건 소송 때문에 갑작스레 사업을 접어야 했다.

그가 발전시킨 금속활판 인쇄가 전 유럽으로 퍼져나가는 동안 오히려 구텐베르크는 서서히 잊힌 사람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구텐베르크가 만든 ‘42행 성서’는 아름다운 편집과 유려한 활자로 인해 여전히 활판인쇄술의 기념비적 명작으로 남아 있다. 스트라스부르의 상징이 된 구텐베르크 동상 아래에는 인쇄술의 발전에 관련된 당시의 삽화들이 생생한 부조로 조각되어 있다.

스트라스부르 기차역에서 옛 시가지로 들어가는 길을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일(Ill)강의 두 지류에 둘러싸인 그랑딜(Grande Ile) 지역을 만나게 된다. 이곳은 알자스 주도의 유서 깊은 역사 도시이다. 이 옛 시가지에 스트라스부르의 핵심 관광지가 다 모여 있다. 스트라스부르 대성당, 4개의 고대 교회, 로앙 성(추기경이 머물던 옛 성)을 비롯하여 수많은 유적들이 빼곡히 모여 있다.

무려 20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스트라스부르는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곳이기도 하다. 스트라스부르의 노트르담 대성당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심각하게 파괴되었지만, 프랑스 정부의 노력과 스트라스부르 시민의 힘으로 거의 완벽하게 복원되었다고 한다. 고딕양식의 날카로운 첨탑에도 불구하고 노트르담 대성당에 따뜻하고 부드러운 아우라를 불어넣는 것은 바로 이 건축물이 붉은 사암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b></div>01</b> 스트라스부르의 상징,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동상<br><b>02</b> 캐리커처를 그리는 화가와 모델.<br><b>03</b> 클레베르 광장의 분수대 앞에서 오후의 한때를 즐기는 사람들. ⓒphoto 이승원
01 스트라스부르의 상징,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동상
02 캐리커처를 그리는 화가와 모델.
03 클레베르 광장의 분수대 앞에서 오후의 한때를 즐기는 사람들. ⓒphoto 이승원

스트라스부르 옛 시가지, 스트라스부르 대성당

한여름의 대성당 앞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라 발 디딜 틈 없게 느껴지지만 그 와중에도 수많은 여행자가 자신도 모르게 보여주는 각양각색의 몸짓들이 눈길을 끌었다. 캐리커처를 그리는 화가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언제 봐도 흥미롭다. 캐리커처는 대상을 좀 더 멋지거나 예쁘게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개성을 유머러스하게 때로는 풍자적으로 그리는 것이기에 다 그리고 난 뒤 사람들의 표정이 그야말로 천태만상이다. 얌전하고 그윽하게 그야말로 전문 모델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던 사람들이 다 완성된 캐리커처를 손에 쥐면 배꼽을 잡고 폭소를 터뜨린다. 캐리커처를 그리는 화가 주변을 맴돌며 구경하는 사람들은 모델의 시각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미리 다 볼 수 있기에, 그들의 반응도 재미있다. 사람들은 ‘그가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지’를 이미 알고 있기에,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입을 가리기도 하고 미리부터 폭소를 터뜨려 모델들의 눈이 호기심으로 휘둥그레지기도 한다. 아무리 근엄한 사람도, 아무리 차분한 사람도, 캐리커처 화가의 붓 앞에서는 그야말로 어처구니없이 망가져버린다. 모든 엄격하고 단단한 경계를 허물어버리는 캐리커처의 힘. 그런 웃음과 풍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감각은 확장되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여유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프랑스 북동부 알자스(Alsace)주에 위치한 스트라스부르는 세 가지 언어로 도시명이 표기된다. 프랑스어로는 Strasbourg, 알자스어로는 Strossburi, 독일어로는 Straßburg이니, 이것만 봐도 스트라스부르가 얼마나 파란만장한 역사의 간난신고를 겪었는지 알 수 있다. 스트라스부르 시민들은 역사 속에서 때로는 프랑스인이었고, 때로는 독일인이었으며, 때로는 프랑스어를 쓰면서도 독일 국민으로 살고, 독일어를 쓰면서도 프랑스 국민으로 살기도 했다. 스트라스부르는 나치 체제 아래서 수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된 곳이기도 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스트라스부르는 프랑스의 영토로 귀속되었고, 1만여명의 스트라스부르 유대인 중에 무려 2000여명이 학살당하는 참극이 일어났다. 스트라스부르는 이 참혹한 상처를 딛고 일어나 이제 명실상부한 ‘유럽의 수도’가 된 것이다.

문화의 접경지대답게 스트라스부르에는 독일의 흔적이 강하게 묻어 있다. 여기저기서 독일어가 들리고, 노트르담 대성당도 독일의 쾰른 대성당과 상당히 비슷한 외양을 하고 있다.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에 익숙한 분들에게는 스트라스부르의 노트르담 성당이 매우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은 종교개혁의 커다란 물결이 유럽을 휩쓸던 1521년에는 프로테스탄트교회가 되었다가, 1681년 스트라스부르가 프랑스 영토로 전환되면서 가톨릭교회로 되돌아왔다. 이 건물 자체가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계속된 지난한 영토분쟁의 산증인인 셈이다. 괴테가 ‘고딕 성당의 걸작’이라 극찬했던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은 프랑스에서 두 번째로 높은 첨탑(높이 142m)을 자랑하고 있으며 1439년에 완성된 이 첨탑은 한때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b></div>01</b> 구시가지를 향해 가는 길, 쿠베르 다리.<br><b>02</b> 스트라스부르의 랜드마크, 노트르담 대성당.<br><b>03</b>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 ⓒphoto 이승원
01 구시가지를 향해 가는 길, 쿠베르 다리.
02 스트라스부르의 랜드마크, 노트르담 대성당.
03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 ⓒphoto 이승원

수채화 같은 운하도시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분쟁, 제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의 상처를 딛고 이제는 브뤼셀과 함께 ‘유럽의 수도(Capital of Europe)’라는 별명을 얻은 스트라스부르. 스트라스부르를 생각하면 마치 수채화로 그린 엽서 한 장처럼 아련히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바로 운하 속으로 나룻배가 한가로이 드나드는 풍경이다. 몇백 년 동안 허물지 않고 조금씩 보수만 하며 보살펴온 집들의 벽면 색깔은 전혀 낡거나 후줄근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정성껏 칠한 파스텔톤의 페인트로 인해 집집마다 미묘하게 다른 빛깔들은 푸르른 하늘빛과 어우러져 자연과 인공의 행복한 조화를 일군다. 잡념으로 가득한 머릿속을 부드럽게 이완해주는 풍경이다. 우리의 두뇌를 맹렬하게 자극하기보다는 편안하게 이완시키는 풍경이다.

머릿속 온갖 여행의 필름들을 돌려 보니 이런 한가로운 풍경은 베니스에도 있고, 암스테르담에도 있고, 심지어 중국의 항저우나 쑤저우, 우리나라의 남해 다랭이마을에도 있었다. 무리하게 건물을 부수거나 과도하게 리모델링을 한다든지 부동산 투기를 위해 건물을 부수거나 짓는 일을 하지 않는 곳. 물론 그런 곳은 도시 전체가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든지 마을이나 도시 안에 중요 문화재가 있어서 함부로 개발을 할 수 없는 곳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꼭 그런 곳이 아니어도 사람들이 오랫동안 살아온 옛 모습을 존중하고, 꾸미지 않은 일상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물처럼 소중하게 간직하는 곳은 다 좋다. 그런 장소에 얽힌 추억은 오래오래 마음속에 둥지를 틀어 더 단단한 그리움으로 여물어갔다. 그런 장소에서 나는 깊은 해방감을 느꼈다.

스트라스부르에는 루브르박물관처럼 화려한 컬렉션도, 나이아가라폭포처럼 엄청난 스펙터클도 없지만, 현란한 구경거리들이 없이도 마음을 끄는 그 무엇이 있었다. 상처 안에 갇혀 방어의 탑만 높이 세우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상처를 딛고 일어나 더 많은 가능성과 외부인들을 향해 ‘스스로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 도시’라는 점이다. 나는 수많은 트라우마의 흔적을 딛고 유럽의 새로운 중심으로 변모해가는 스트라스부르를 바라보며 언젠가는 내가 사는 이 도시도 그렇게 상처를 극복하고 눈부시게 날아오르는 공간이 되기를 빌었다. 휴전선의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대치 중인 이 나라도, 언젠가는 스트라스부르처럼 아픔과 갈등을 딛고 통합과 화해의 도시로 다시 태어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어 본다.

정여울 작가·‘내가 사랑한 유럽 top 10’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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