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국민소설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의 ‘언덕 위의 구름’이란 소설이 있습니다. 러일전쟁(1904)을 배경으로 일본 연합함대의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 러시아 발틱함대를 무찌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당시 연합함대는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이 이끄는 세계 최강의 발틱함대가 어디로 올지를 두고 우왕좌왕합니다. 결국 일본은 영·일(英日)동맹을 활용한 국제적 첩보전을 벌인 끝에 발틱함대가 쓰시마해협으로 향한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도고 제독은 쓰시마해협에 매복해 있다가 발틱함대를 동해에 수장(水葬)시키고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 짓습니다.

지난주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무적함대(Armada)’라고 칭한 핵추진 항공모함 칼빈스호의 침로(針路) 변경을 두고 국제적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취재 중 미심쩍어 해군 관계자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칼빈슨이 4월 15일 온다던데”라고 묻자, 이 관계자는 “칼빈슨이 비행기도 아니고 그때 오겠냐”고 반문했습니다. 이에 제 기사에서 ‘15일’이란 날짜를 특정하지 않았는데, 결과적으로 칼빈슨호는 인도네시아 해역에서 한참을 머물다가 오는 4월 25일쯤에야 동해로 들어온다고 합니다. 백악관 숀 스파이서 대변인은 “시점에 관해 말한 적 없다”고 발뺌했습니다.

칼빈슨호 소동을 보면서 국가 안보를 미국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새삼 실감했습니다. 조선의 대표적 예언서 ‘정감록(鄭鑑錄)’에는 ‘대박(大舶·큰 배)’이란 말이 언급됩니다. 조선 말기 박해받던 천주교 신자들은 ‘대박’이 바다에서 건너와 자신들을 구원해주길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신유박해(1801) 때 천주교도 황사영은 베이징에 있던 구베아 주교(主敎)에게 밀서를 보내 “서양 배 수백 척을 조선에 보내달라”고 간청하기도 합니다. 소설가 김훈은 이에 빗대어 “오늘날 그 대박이 항공모함 칼빈슨”이라고 했습니다.

그 와중에 방한한 미국의 마이크 펜스 부통령은 칼빈슨이란 ‘공수표’로 몸값을 끌어올린 뒤 ‘한·미 FTA 개정’이란 값비싼 청구서를 들이밀었습니다. 칼빈슨이란 ‘뻥카’에 놀라 체면을 구긴 중국에서도 제갈량이 쓴 ‘공성계(空城計)’에 빗대 “트럼프가 중국 병법서를 탐독한 것 아니냐”는 얘기도 나옵니다. 어찌됐든 적성국은 물론 동맹국마저 속이는 트럼프 행정부의 예측불허는 더 높아졌고, 외교가에 도는 ‘미·중 밀약설’이나 ‘북·중 거래설’도 무시할 수 없게 됐습니다. 남한을 배제한 채 북·미 간에 체결된 ‘제네바합의’(1994)가 재현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대선을 앞둔 현 시국을 해방정국에 비유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해방정국에 이런 노래가 유행했다고 합니다. “미국 믿지 말고, 소련에 속지 말고, 일본이 일어선다. 조선 사람 조심해라.” 요즘은 당시 국공(國共)내전으로 노랫말에서 잠깐 빠졌던 중국마저 굴기(屈起) 중입니다. 칼빈슨호의 변침(變針)을 두고 벌어진 대소동을 보면서 ‘미국 믿지 말라’는 노랫말이 절로 떠오르는 요즘입니다. 결국 정답은 러일전쟁 때 일본이 했던 것처럼 동맹에 기초해 스스로의 정보력을 키우고 스스로 강해지는 ‘자강(自强)안보’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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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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