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미지의 세계에 도전하는 탐험가이자 극한 환경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히말라야 등반가다. 베이스캠프에서 정상 등정을 위해 가장 중요한 장비, 보온의류 등을 챙겨 넣으면 배낭은 이내 묵직해진다. 결국 배낭 무게를 맞추기 위해 식량의 양은 줄어들게 되고 기본적인 수분·염분·당분만 몸에 공급하며 산을 오른다. 이렇게 등정을 마치고 베이스캠프로 돌아올 때는 체중이 보통 6~10㎏ 빠진다. 그러니 히말라야 등산이란 자신의 몸을 태워 오르는 행위였고, 나에게 음식은 단지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

나는 지난 29년 동안의 극한(極寒) 활동에서도 살아남았다. 대학 산악부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선후배 50여명은 그렇지 못했다. 동상으로 손가락과 발가락을 잃은 동료들도 많다. 평지의 3분의 1밖에 안 되는 산소량과 영하 30도의 저온에서도 나는 잘 적응해왔다. 나는 조상이 유라시아대륙 어느 고원의 유목민이 한반도로 이주해온 후예인지도 모르겠다.

내 몸은 따듯하다는 표현보다는 뜨겁다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린다. 한여름에는 찬물로 샤워를 여러 번 해야 할 정도였다. 히말라야에서 침낭 하나로 비박(노숙)을 할 때면 동료들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형 몸은 너무 따뜻해요.”

그때마다 그 이유가 뭘까를 혼자 곰곰이 생각해 보곤 했다. 혼자 내린 결론은 이랬다. 부모님이 주신 선천적인 몸과 성인이 될 때까지 먹었던 엄마의 흑염소탕이 아닐까.

백두산에서 솟은 백두대간이 남쪽으로 내리뻗다 잠시 숨을 고르는 평온한 땅, 경상북도 예천이 내가 태어난 곳이다.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상투 튼 할아버지가 동네에 계셨고 ‘子曰 爲善者 天報之以福 爲不善者 天報之以禍’ 하며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명심보감’ 계선 편을 넘기느라 나는 애를 썼다.

그때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풍족하지 못한 가정형편이었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첫서리가 내리면 ‘아부지’는 집에 키우던 흑염소를 두어 마리 잡았고 ‘어무이’는 삶은 고기를 찢어서 볕 드는 채반에다 말렸다.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염소 친구를 잃은 상실감에 꼬마는 여러 날 눈물을 훔쳤다. 염소고기는 마치 권투 샌드백처럼 광목 자루에 담겨 처마 밑에 매달렸다.

“아부지요~ 밥 잡수이소~.”

저녁 나절이면 꼬마는 동네 떠나갈 듯 산들에 나간 아버지를 부른다. 곧 아버지가 돌아오시면 흑염소탕이 밥상에 올라왔다. 이 음식은 겨우내 그리고 봄까지 우리 가족의 특식이었다. 나는 그렇게 18년간 그 음식을 먹고 자랐다. 염소고기는 예부터 허약한 사람과 몸이 찬 사람에게 좋은 식품이라고 한다. 그러한 책의 내용을 안 것은 나중 일이고 어릴 때는 누린내에 거부감이 있던 기억이 더 크다. 하지만 높은 고산지대에서 인간의 몸이 적응해 나가듯이 흑염소탕의 구수한 맛에 이내 빠져들었다. 당시 흑염소탕은 때마다 조금씩 다르게 요리해 먹었다. 곰국처럼 그냥 고기와 소금만 넣고 끓인 뽀얀 국물의 흑염소탕, 토란대·고사리·마늘·생강과 같은 갖은 양념을 한 흑염소탕도 있었다.

저녁밥을 먹고 내 방에 들어가면 모르는 사람들이 밥상을 받고 있었다. 동네에서 우리 집은 지나는 길손이 묵어가는 집이었다. 길손은 주로 스님, 걸인, 상이군인이었다. 특히 애꾸 선장처럼 쇠꼬챙이를 손에 낀 상이군인은 그 자체가 무섭고 싫었다. 그분들도 아마 흑염소탕을 한 그릇씩 드셨을 터이고, 내가 탐험하던 파미르고원의 원주민들처럼 ‘손님은 신이 주신 선물’이라 엄마는 생각하셨던 것 같다. 동네 사람들은 으레 그러한 길손이 동네에 들면 “저 김씨네 집으로 가이소”라고 말하곤 했다. 어무이는 손을 치르셨다. 그중 ‘깜장’ 고무신에 소 ‘구르마’를 타고 다니셨던 소백산 절의 주지스님은 단골손님이었다.

“이놈은 크면 저 너른 세상을 좁다 하고 쏘다니겠는데~.”

스님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고 무병장수하라고 ‘창선’이라는 아명까지 지어주었다. ‘창선’은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집에서 불렀다. 스님의 예견처럼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운동선수로 다른 지역으로 나가다니기 시작했다. 또 높은 산 뒤에 어떤 세상이 있을까 하는 호기심에 냄비에 쌀 퍼들고 친구들과 며칠간 탐험을 떠나기도 했다. 그 첫 원정은 음식이 떨어지고 비에 흠뻑 젖은 채로 끝내야 했지만.

나는 이후 한국의 명산들을 모두 섭렵했다. 더 나아가 새로운 세상에 대한 호기심은 히말라야에까지 이르렀다. 그곳의 산과 사람들이 좋아 파키스탄의 카라코람산맥과 파미르,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의 힌두쿠시산맥에서 홀로 탐험하며 1700여일을 보낸 적도 있다. 한번은 파미르의 와키종족이 사는 곳에서 빙하와 산을 탐험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체중이 15㎏이나 빠져 쓰러졌고 기다시피 해서 동네에 내려왔다. 그 집 주인장은 염소젖과 염소젖으로 만든 치즈, 그리고 호두와 살구씨를 먹게 했다. 며칠 후 내 몸은 가뿐해졌다. 그들도 감기가 들거나 기력이 약해지면 염소고기를 먹는다고 했다. 언어와 종교는 달라도 통하는 것이 있었다.

이제 한국에서 흑염소탕은 부산 산악인들과 훈련하며 금정산 산성마을에서 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됐다. 하지만 어머니가 해주신 흑염소탕은 뭔가 다른 것이 있었다. 히말라야와 같이 추운 데에서 잘 견뎌냈고, 며칠을 굶어도 걸어갈 수 있는 체력은 탕과 함께 우려낸 어머니의 사랑 덕분이었을 것이다. 또 저 히말라야 산골짜기에서 배를 주리지 않고 밥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가 길손에게 베풀었던 복을 내가 대신 받았음이니라.

나는 어릴 때부터 먹은 흑염소탕 덕분에 기운생동(氣韻生動)한데 어머니는 허리가 굽어 점점 키가 작아진다. 곧 히말라야로 떠나니 주말에 흑염소탕이나 한 그릇 먹었으면 좋겠다.

김창호 산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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