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세유 항구에서 흥겨운 음악을 연주하는 청년들. ⓒphoto 이승원
마르세유 항구에서 흥겨운 음악을 연주하는 청년들. ⓒphoto 이승원

떠나기 전에는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가 다녀온 뒤에는 ‘왜 이 도시를 이제야 갔을까’라고 후회하게 만드는 곳들이 있다. 예컨대 알프스를 품어 안은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나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이 그런 곳이었다. 도시 구석구석 숨은 매력이 많은 곳은 다시 또 찾아가도 새로운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프랑스 남부의 항구도시 마르세유는 꼭 한 번 다시 가고 싶은 도시다. ‘왜 진작 가지 않았을까’ 하고 뒤늦게 후회하게 된 도시, 좀 더 일찍 가지 못해 안타까운 도시이기도 하다. ‘다음에 가자, 시간 많을 때 여유 있게 가지 뭐!’라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뒤늦게 가 본 것이 못내 아쉽다. 여행책자에는 대부분 ‘프랑스에서 치안이 가장 안 좋은 도시, 소매치기를 조심해야 함’이라는 식으로 악평이 주를 이루는 곳이었기에 자꾸만 ‘다음에 가자’고 미뤄왔다. 하지만 큰맘 먹고 막상 가 보니, 내게는 파리 못지않게 흥미롭고 매혹적인 도시가 되었다. 다음에 가기엔 너무 아까운 도시, 가 보면 사진이나 여행책자의 이미지보다 백배 좋은 도시가 바로 마르세유다.

항구에서 바닷속을 살펴보며 ‘햇살바라기’를 즐기는 아이들. 마르세유 항구에서는 줄 하나만 드리우면 금방 낚시터가 된다. ⓒphoto 이승원
항구에서 바닷속을 살펴보며 ‘햇살바라기’를 즐기는 아이들. 마르세유 항구에서는 줄 하나만 드리우면 금방 낚시터가 된다. ⓒphoto 이승원

남부 유럽의 핫플레이스로 급부상

리옹에서 며칠 머무르다가 마르세유로 가는 기차를 탔다. 테제베를 타면 2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테제베를 타고 가면 파리에서 리옹까지가 2시간, 리옹에서 마르세유까지가 1시간40분 정도 걸린다. 파리에서 마르세유까지 직행하는 테제베로는 3시간30분 정도, 완행열차로는 5시간16분이 소요된다. 파리에서 마르세유까지 승용차를 이용하면 무려 7시간이 넘게 걸린다.

한밤중에 마르세유 기차역에 도착하면 초행길인 데다가 파리처럼 불야성의 도시는 아니라 조금 무서운 생각이 들지만, 낮에 도착하면 전혀 위험한 도시로 보이지는 않는다. 사실 ‘치안이 나쁜 도시, 급격한 슬럼화가 진행되는 도시’라는 오명은 마르세유의 과거를 향한 것이다. 지금 마르세유는 그야말로 남부 유럽의 새로운 핫플레이스로 급부상하고 있다. 유로-지중해 프로젝트(Euro-Mediterranean Project), 즉 마르세유를 유럽과 지중해의 중심도시로 만들려는 대대적인 도시계획이 성공하면서 마르세유는 ‘쇠락한 옛 항구도시’의 구태의연한 이미지를 벗고 여러 국제기구와 기업들을 적극적으로 유치하고 있으며 건축가들의 다양한 실험 또한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최근 몇 년간 마르세유는 일대 변신을 꾀했다. 과거의 ‘복잡하고, 지저분하고, 치안이 좋지 않은 항구도시’의 이미지로부터 탈피하여 남부 유럽의 새로운 문화적 중심이자 신구의 아름다움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흥미로운 도시로 변화하고 있는 중이다. 인구의 4분의 1이 이주민이나 외국인 출신이라는 것이 과거에는 불화와 위험의 신호로 여겨졌지만, 지금은 변화와 다양성의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다.

프랑스 본토 출신이 아닌 이주민들 중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사람들은 바로 한때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 사람들이다.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폴란드, 터키, 루마니아, 포르투갈, 이탈리아 등 다양한 국가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마르세유. 그에 따라 가톨릭, 이슬람교, 유대교, 개신교, 힌두교, 불교 등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고 있다. 마르세유는 다양한 인종과 종교가 어우러져 더욱 변화무쌍한 볼거리를 만들어내는 풍요로운 문화접변의 도시가 되었다.

01 거대한 거울 조형물은 마르세유의 상징이 되었다. 또 하나의 거대한 바다가 공중 위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이 신비롭다.<br></div>02 마르세유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자리 잡은 뮤셈 박물관. 단지 박물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휴식 공간이자 마르세유의 전망대 역할도 한다.<br>03 노트르담 성당 내부의 화려한 실내 장식.<br>04 노트르담 성당 밖에서 노는 아이들. 성당의 부지가 워낙 넓기 때문에 거대한 시민공원 같은 느낌도 준다.<br>05 노르트담 성당 전망대에서 보면 마르세유 전체가 훤히 내려다보일 뿐 아니라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공간적 배경이 된 이프섬이 보인다. ⓒphoto 이승원
01 거대한 거울 조형물은 마르세유의 상징이 되었다. 또 하나의 거대한 바다가 공중 위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이 신비롭다.
02 마르세유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자리 잡은 뮤셈 박물관. 단지 박물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휴식 공간이자 마르세유의 전망대 역할도 한다.
03 노트르담 성당 내부의 화려한 실내 장식.
04 노트르담 성당 밖에서 노는 아이들. 성당의 부지가 워낙 넓기 때문에 거대한 시민공원 같은 느낌도 준다.
05 노르트담 성당 전망대에서 보면 마르세유 전체가 훤히 내려다보일 뿐 아니라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공간적 배경이 된 이프섬이 보인다. ⓒphoto 이승원

유럽지중해문명박물관 ‘뮤셈’

새로운 혁신의 중심에 마르세유의 새로운 명소 ‘뮤셈(Mu-CEM)’이 존재한다. 2013년에 완공된 유럽지중해문명박물관 뮤셈(Mu-CEM·Musee des civilisations de l’Europe et de la Mediterranee)은 낡고 지저분한 과거의 마르세유 항구의 이미지를 단번에 날려준 성공적인 건축 프로젝트였다. 뮤셈에는 지중해 문명에 관련된 훌륭한 컬렉션과 대형서점, 미슐랭 스타를 무려 3개나 받은 스타 셰프 제랄드 파세다의 레스토랑이 있다.

평범한 공업도시였던 빌바오를 세계적 관광지로 바꾼 구겐하임박물관처럼, 뮤셈도 이 도시의 운명을 바꾸는 강력한 랜드마크가 될 것 같다. 당시 슬럼화되어가고 있었던 마르세유의 항구 부근을 대대적으로 개조하여 일종의 거대한 야외 복합문화공간으로 만든 뮤셈은 이제 마르세유의 새로운 상징으로 거듭났다. 마르세유의 ‘오래된 것들’을 상징하는 건축물이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대성당과 마조르 대성당, 롱샴 궁전이라면, 마르세유의 ‘새로운 것들’을 상징하는 건축물은 뮤셈과 파빌리온이다.

뮤셈의 테라스에 올라가 하염없이 바라보는 마르세유의 석양과 코발트빛 지중해, 그리고 거울로 만들어진 거대한 파빌리온으로 하루 종일 비쳐지는 마르세유 사람들의 역동적인 모습은 이제 마르세유에 가면 결코 놓쳐서는 안 될 명물이 되었다. 마르세유가 2013 유럽 문화수도(European Capital of Culture)에 선정되면서 지어진 이 거대한 파빌리온은 세계적인 건축가 노먼 포스터(Norman Foster)가 진두지휘하는 포스터 앤 파트너스(Foster & Partners)의 작품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무려 2600여년의 역사를 지닌 유서 깊은 도시 마르세유는 기원전 600년경 그리스 사람들이 만든 항구도시였다. 오랜 세월, 시간의 벽돌이 하나하나 빼곡하게 쌓여 그 어느 한적한 골목에도 저마다의 굵직한 사연이 숨어 있을 법한 도시다. 마르세유는 옛것과 새것, 자연의 아름다움과 인공의 세심함, 토착적인 것과 이질적인 것이 역동적으로 어우러지는 문화의 도가니가 되어가고 있다.

르 코르뷔지에의 과감한 건축 실험의 흔적인 유니테 다비타시옹(Unit d’Habitation)이 초기 아파트의 기원을 보여주고 있는가 하면, 구시가지의 애면글면한 골목 풍경이 자글자글한 시간의 주름을 피워 올리고 있는 르 파니에(Le Panier) 지역이 있다. 옛 항구 비외 포르(Vieux Port)에는 새하얀 돛대를 드리운 요트들이 한가로이 정박해 있고, 그 곁에는 아무데나 주저앉아 달랑 줄 하나로 바다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으며, 독창적인 수영복인지 지나치게 간단한 평상복인지 알 수 없는 지극히 ‘미니멀한’ 옷차림으로 걸핏하면 바다로 뛰어드는 용감한 피서객들이 있다.

아침 일찍 나오면 더욱 활기찬 마르세유를 볼 수 있다. 커다란 그물을 손질하여 물고기를 잡으러 나가는 어부들, 새벽부터 물고기를 경매하는 목청 좋은 생선장수들이 날마다 한바탕 전쟁을 치르는 활기찬 어시장도 볼 수 있다.

생장 요새와 뮤셈 박물관의 사이 공간. 바다와 육지 사이에서 탁 트인 마르세유의 매력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장소다. ⓒphoto 이승원
생장 요새와 뮤셈 박물관의 사이 공간. 바다와 육지 사이에서 탁 트인 마르세유의 매력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장소다. ⓒphoto 이승원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배경 이프섬

도시의 전망대 역할을 하는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대성당으로 올라가서 성당 내부를 관람한 뒤, 천천히 항구 쪽으로 내리막길을 걸어오며 마르세유의 골목골목을 음미했다. 노트르담 대성당에서는 그 유명한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공간적 배경이 된 이프섬도 아련하게 보이고(대성당 전망대에 설치된 동전 투입 망원경을 이용하면 아주 가까이 보인다), 주황색 기와집들이 빼곡히 들어찬 모습으로 더욱 친근감을 주는 마르세유의 구시가지가 한눈에 보인다.

마르세유를 대표하는 인물들의 면면 또한 다양하다. 프랑스 연극계를 대표하던 연출가이자 작가·배우였던 앙토냉 아르토가 마르세유에서 태어났고, ‘나는 너무나 못생겼으므로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평생 사랑하는 여인에게 자신의 마음을 숨기고 살아온 남자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 ‘시라노’를 쓴 에드몽 로스탕도 마르세유 출신이며, 유머와 풍자정신으로 무장한 불세출의 화가 오노레 도미에 또한 마르세유에서 태어났다.

마르세유 출신의 최고 스타는 역시 축구선수 지네딘 지단이다. 지단은 알제리 베르베르족 출신으로서 그의 아버지는 경비원 일을 하며 어렵게 지단을 키워냈다. 지단은 어릴 적에 살았던 가난한 고향 마을을 잊지 않고 찾아가 어린이들과 함께 축구를 하기도 하고, 단지 ‘성공한 이민자’로서 만족한 것이 아니라 프랑스 내의 이민자들에 대한 각종 차별에 반기를 들었으며, 극우파 정치인 르펜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을 ‘인종의 쓰레기장’이라 비난하자 르펜에 대한 분명한 반대 의사를 표명하기도 했다. 지단 선수 특유의 드리블과 회전을 ‘마르세유 턴’이라고 부를 정도로, 지단 선수는 마르세유의 자랑일 뿐 아니라 프랑스 전체의 자랑이다.

마르세유를 대표하는 음식 부야베스(bouillabaisse)는 프랑스식 생선 스튜인데, 우리나라 음식에 비유하자면 온갖 해물을 섞어 넣어 끓인 해물잡탕에 가깝다. 온갖 채소와 토마토, 사프란, 다양한 해산물을 끓인 진한 국물에 치즈와 마늘을 바른 빵을 곁들여 먹는 뱃사람들의 음식이었다. 처음에는 어부들이 팔다 남은 고기들로 만들어 먹었던 이 서민적인 음식이 지금은 관광객들을 타깃으로 하여 로브스터까지 곁들인 채 비싸게 팔리고 있다. 하지만 진짜 전통적인 부야베스에는 로브스터가 아니라 볼락, 송어, 붕장어, 쏨뱅이 등의 생선이 들어가는 것이 제맛이라고 한다.

부야베스에는 로제 와인이나 화이트 와인을 곁들여 먹기도 하고, 식전주로 마르세유를 대표하는 술 파스티스를 마시기도 한다. 부야베스는 마르세유의 로컬 맥주 카골(Cagole)과 곁들여 먹어도 잘 어울린다. 마르세유의 또 다른 명물은 올리브유와 소금을 비롯한 순수 식물성 원료로만 만드는 수제 비누인데, ‘사봉 드 마르세유’는 이 지역을 대표하는 전통식 공방에서 만들어진다. 포장도 하지 않은 채로 투박하게 벽돌처럼 쌓아올린 수제비누 뒷면에는 올리브 함유량이 표시되어 있는데, 72% 이상이 되어야 마르세유 사봉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한다. 지금도 100년이 넘은 오래된 기계로 전통 제조법에 따라 비누를 만드는 장인이 있다.

마르세유의 여름밤은 음악과 춤의 열기로 가득하다. 뮤셈 근처를 지나다가 남녀노소는 물론 온갖 국적의 사람들이 모여 그야말로 광란의 춤사위를 벌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사람들의 몸짓 하나하나가 불꽃놀이의 무지갯빛 폭죽처럼 아름답게 빛났다. 사람들은 정해진 동작의 순서에 따라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각자의 흥에 겨워 알록달록한 막춤을 추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 춤도 서툴거나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보고만 있어도 그 신명에 만취할 것만 같은, 질펀한 춤사위의 잔치 한마당이었다. 피부색도, 언어도, 옷차림도, 종교도 다른 이 모든 사람들이 ‘음악’이라는 세계 공통의 언어에 맞추어 눈부신 군무를 추고 있는 동안, 프랑스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아름다운 도시 마르세유의 여름밤은 깊어만 갔다.

정여울 작가·‘내가 사랑한 유럽 top 10’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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