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어린 시절 한때 여자들 틈바구니에서 자랐다. 아버지가 해외로 출장을 가시고 집에 안 계시면 집에는 여자뿐이었다. 어머니, 사촌누나, 여동생, 도우미 누나가 있었는데 엄마도 직장에 나가셨기 때문에 방과후에는 주로 사촌누나와 친하게 지냈다. 나이 차가 많이 났던 누나는 나를 끔찍이도 예뻐해줬는데 남자친구를 만날 때도 날 데리고 나갈 정도였다. 상당히 조용한 아이였던 나는 누나가 다방에 가도, 야구장에 가도 둘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듣지도 않고 무조건 조용히 따라다녔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누나랑 같이 있는 게 좋았지만 그 형(아저씨뻘)에게는 하나도 안 좋았을 것이다. 아니 귀여워해주는 척해야 하는, 무척 귀찮은 존재였을 것이다. 하지만 서울 갈현동에 살던 어린아이가 가끔 누나를 따라 버스를 타고 시내 명동도 가보고 동대문야구장도 가봤다는 건 상당히 뿌듯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내게 가장 재미있는 일은 누나가 데이트하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게 사주던 명동과 동네 시장의 순대를 먹는 일이었다. 속이 당면 같은 걸로 꽉 차 있는 이 순대를 먹는다는 건 얼마나 즐겁고 기분 좋고 행복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누나가 우리 집을 떠나 바다 건너 일본으로 시집을 가자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던 누나를 참 그리워하게 되었다. 그래서 내게 순대를 먹는다는 건 쉽사리 만날 수 없는 누나를 추억하는 일과 동의어가 되었다. 뭐 먹을 때마다 누나를 생각한 건 아니지만 그래서 난 순대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었을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누나가 사주던 걸 떠올리며 동네 시장에 가서 순대를 사먹고는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는 식중독을 경험하기도 했다. 지금 와서 보니 그것도 다 추억이다.

순대는 내가 속이 허할 때마다 먹는 음식이다. 그냥 순대와 순대국밥 중에 어떤 걸 더 좋아하는지는 우열을 가리기 힘들지만 따뜻한 것이 그리울 때 먹는 순대국밥은 정말 내게 큰 힘을 준다. 허파, 간까지 무조건 다 들어 있는 순대국밥을 주로 먹었지만 최근에는 여성들이 더 좋아한다는 ‘순대만’으로 먹기도 한다. 칼로리가 꽤 높기 때문에 자주 먹지는 않으려고 하지만 그래도 하루 걸러 생각날 정도로 좋아한다. 그리고 어느 도시, 마을, 동네를 가든 ‘순대’라고 간판에 써 있으면 일단 눈길이 가고 맛을 상상해 보게 된다. ‘저 집은 맛있을까?’ ‘좀 색다른 맛일까?’ 짧은 시간 동안이지만 갖가지 상상을 해보곤 한다.

그러다가 얼마 전 맛있고 만족스러운 순대국밥집을 발견했다. 완주의 지방행정연수원에 강의를 하러 갔다가 익산에서 원하는 시간대의 기차가 매진되는 바람에 마음 편하게 저녁이나 먹고 가자 하는 심사로 역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이때 백종원의 3대 천왕에 나왔다며 소개를 받은 순대국밥집이 바로 정순순대였다. 저녁식사 시간보다 일찍 들어가니 손님이 한 테이블밖에 없었지만 뭔가 메뉴판에서부터 포스가 느껴졌다.

암뽕국밥! 이건 뭘까? 주인장에게 물으니 돼지 암놈의 부위라고 한다. “아, 다음에 그거 먹을게요! 순대국밥 주세요!” 이렇게 대답했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기본을 먹어봐야 하기 때문이다. 처음 가본 식당의 기본을 먹어본다는 게 내 식도락의 원칙이다. 다음엔 정말 암뽕에 도전하리라! 일단 순대국밥은 국물이 담백함을 넘어 아주 순수한 순대국밥이어서 맘에 쏙 들었다.

국수사리를 같이 먹는 게 이 집의 포인트라고 들었는데 국수사리가 없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국수사리는 추가로 시켜야 한다. 그랬더니 바로 기다렸다는 듯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수사리를 주인장 아저씨가 가져다준다. 오! 이 시스템! 이 집의 순대는 피순대. 진정한 순대의 정신이 느껴졌다. 어렸을 때면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겠지만 지금 어른 입맛에는 최고다. 텁텁하지도 않고 부드럽고 좋다. 아주 흡족해 하며 아무것도 남김 없이 국물까지 죄다 비워버리고 나니 뭔가 뜨거운 것이 몸에서 올라온다. 원래 가끔 가는 좋아하는 집은 광화문 세종문회화관 뒤에 있는 순대국밥집인데 이 정순순대의 순대국밥은 방향성이 전혀 다른데 깊이가 느껴진다. 이것이 한국의 맛인가!

그런데 이런 맛을 외국에서 느낀 적이 있었다. 루마니아에 갔을 때의 일이었다. 흑해 연안의 항구도시 콘스탄차에서 연주자들과 점심을 먹으러 갔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다. 내장을 갖고 만든 수프라고 해서 주저없이 시켰더니, 맘마미아! 완전 우리나라의 양곰탕과 똑같은 음식이 나오는 거였다. 와! 이 흑해 연안 루마니아에서 양곰탕을 발견하게 될 줄이야! 서양 사람들은 양곰탕을 안 먹는 줄 알았는데 그건 나의 착각이자 단견! 밥은 없었지만 수프에 후추를 뿌린 후 빵과 함께 맛있게 훌훌 먹었고 그 후로도 두어 번 더 이 맛있는 수프를 흑해의 찬 겨울 공기를 이겨내는 비법이라 생각하며 룰루랄라 맛있게 먹었던 생각이 난다.

왜 이렇게 동물의 내장은 맛있는 걸까? 징그러워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내장은 생선이든 육지의 동물이든 다 따뜻한 온기로 나를 덥혀주는 훌륭한 음식이다. 속살 아닌가! 갑자기 내가 몽골이나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의 유목민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냥 살코기를 먹을 때와는 다른 정서가 내장을 먹을 때, 순대를 먹을 때 드는 듯싶다. 나의 영혼의 음식 순대국밥! 지금 이 글도 아내가 끓여준 순대탕(칼로리 때문에 밥은 뺐지만 순대가 알차게 많이 들어 있는)을 맛나게 먹은 후 비로소 완성이 가능했다.

장일범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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