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 리쭝우 초상. (우) ‘후흑학’ 표지.
(좌) 리쭝우 초상. (우) ‘후흑학’ 표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 문명은 우리에게 바르고 의롭게 살도록 권면한다. 특히 동양의 유교는 선량한 내면뿐만 아니라, 그것을 외부로 드러내는 표출 방식까지 일일이 규율한다. 따라서 동양에서는 인(仁)과 예(禮)가 더불어 강조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유교 사회에 ‘얼굴이 두껍고 마음이 검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문제작이 등장하여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바로 중국 청나라 말 리쭝우(李宗吾·1879~1944)의 ‘후흑학(厚黑學)’이다. 그는 1912년 무렵부터 신문 칼럼 등을 통해 ‘후흑’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중에 핵심적 내용을 소개한 소책자가 1917년 청두에서 발간되었다. 또한 좀 더 체계적인 내용을 담은 단행본이 1936년 베이징에서 나왔다. 이를 통해 그는 일약 전국적 인물이 되었다.

리쭝우는 쓰촨성 청두 근방에서 중농(中農)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중국의 고전과 역사서를 두루 독파하고 ‘후흑학’이라는 독특한 학설을 세웠다. 그는 평생 ‘후흑교주’를 자처하며, 열정적으로 자신의 사상을 설파했다. 이처럼 ‘후흑학’이란 그의 저서의 제목이자, 동시에 그의 학설 자체를 가리킨다. 그의 사후에는 1936년판 ‘후흑학’을 포함하여 그것과 관련된 글들을 한데 모은 선집(選集)이 또한 ‘후흑학’이라는 제목으로 다양하게 출판되기도 했다.

‘후흑’이란, 글자 그대로 ‘면후(面厚)’와 ‘심흑(心黑)’을 합성한 말이다. 이것은 대략 ‘뻔뻔함’과 ‘음흉함’을 뜻한다. 그러니 후흑은 유교적 가치와 도무지 타협점을 찾기 어려워 보인다. 당연히 숱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마치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권모술수 또는 마키아벨리즘으로 매도되었듯이, 그의 ‘후흑학’도 ‘뻔뻔함과 음흉함을 앞세운 처세술’ 정도로 치부되곤 했다. 하지만 그것을 곰곰이 따져 보면 결코 그리 간단하게 단정할 일이 아니다.

‘후흑학’은 사뭇 도발적인 문구로 시작한다. “나는 글을 배워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영웅호걸이 되고자 했다. 사서오경을 읽었으나 아무 소득이 없었다. 제자백가와 24사(史)를 통해 방법을 얻고자 했으나, 이 또한 아무 소득이 없었다.” 이처럼 리쭝우는 기존의 고전이나 사서에는 위인이 되는 방법이 담겨 있지 않다고 단언한다. 여러 해 ‘침식도 잊은 채’ 궁리한 끝에, 그는 드디어 역사적 위인들의 행태 속에서 그 방법을 스스로 발견한다.

조조(曹操)는 “내가 남에게 버림을 받느니 차라리 내가 먼저 버리겠다”고 말한다. 이는 심흑, 곧 음흉함에 해당한다. 유비(劉備)는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상대를 붙잡고 대성통곡을 하여 자신의 뜻을 관철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는 면후, 곧 뻔뻔함에 해당한다. 이처럼 심흑이나 면후 중 하나만 제대로 갖추어도 그들처럼 상당한 영웅호걸이 될 수 있다. 한편, 항우(項羽)는 인(仁)에 집착하여 속이 시커멓지 못하고, 수모를 참지 못하여 뻔뻔하지도 못하다. 그는 후세에 욕을 먹을까 두려워 홍문(鴻門)의 연회에서 유방을 죽이지도 못한다. 항우야말로 박백(薄白)의 대표적 인물이다. 반면 유방(劉邦)은 항우가 자신의 아버지를 삶아 죽이겠다고 협박하자, 그 국물을 한 사발 달라고 대꾸한다. 또한 개국 후에는 공신들을 태연하게 토사구팽(兎死狗烹)시킨다. 유방이야말로 후흑의 대표적 인물이다.

돌이켜보면 월왕 구천(句踐)이야말로 후흑의 원조 격이다. 구천은 오왕 부차(夫差)에게 패하자, 자신의 처를 부차의 첩으로 바치고 신하가 되기를 맹세한다. 그리고 나서 10년 동안 장작더미 위에서 잠을 자며 쓸개를 빤다. 이것이 그 유명한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고사이다. 그가 부차를 무찌르자, 이번에는 부차가 처를 바치고 신하가 되겠다고 머리를 조아린다. 하지만 구천은 가차없이 부차를 죽이고 마침내 패자의 자리에 오른다. 사실 낯가죽은 불과 몇 치밖에 안 되고 속마음은 한 줌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안을 들여다보면 낯가죽은 끝도 없이 두껍고 속마음 또한 비할 데 없이 깊다. 리쭝우는 세상사가 그러한 면심(面心)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우리가 ‘더할 수 없는 보물’을 몸에 지니고도 쓰지 않으면 어리석은 일이라고 주장하며, 면심을 체계적으로 연마하여 유용하게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그에 따르면, 후흑에는 대략 3단계의 연마 과정이 있다. 첫째는 낯가죽이 성벽처럼 두껍고 속마음이 숯덩이처럼 시커먼 단계이다. 이는 초보적인 수준이다. 자칫 상대에게 의중을 읽히기 쉽다. 둘째는 낯가죽이 두꺼우면서도 단단하고 속마음이 검으면서도 맑은 단계이다. 이는 중간 수준이다. 이 단계에만 이르러도 조조나 유비처럼 많은 사람들을 모을 수 있다.

셋째는 낯가죽이 두꺼우면서도 형체가 없고 속마음이 시커먼데도 색채가 없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 이르면 하늘은 물론, 후세 사람들마저 그 사람을 후흑과는 완전히 정반대인 불후불흑(不厚不黑)의 인물로 여기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누구나 쉽게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이다. 그는 “오직 옛날의 대성현 중에서 이러한 인물을 찾아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사실 대성현들이야말로 후흑의 달인일 것이라는 그의 지적은 곰곰이 되새겨 볼 만하다.

통상적인 도덕에 비추어 보면, 항우가 유방보다 인격적으로 훨씬 더 훌륭하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귀족 출신으로 매사에 용맹함과 정당함을 고집한다. 하지만 ‘얇고 하얀’ 항우는 도저히 ‘두껍고 검은’ 유방의 적수가 되지 못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과연 항우처럼 현실적으로 패배할지언정 끝까지 명분을 고수해야 할까. 또는 유방처럼 명분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현실적인 승리를 취해야 할까. 물론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선택이 다를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왜 승리해야 하는가이다. 단순히 사리사욕를 위해 현실적인 승리만을 목표로 한다면 비열한 처세술에 불과하다. 그것은 주위에 피해를 주고 적을 만들어, 결국에는 파멸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후흑은 개인적 이익을 초월하여 반드시 세상을 구제하는 일에 쓰여야 빛을 발한다. 이것이 바로 리쭝우가 구국후흑(救國厚黑)을 외치는 이유이다. 이처럼 ‘후흑학’은 도덕이나 명분에 연연하지 말고 면심(面心)을 강하게 단련하라고 주문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통상적인 도덕으로는 도저히 성취할 수 없는 고상한 공적 가치를 실현할 수 있다. 여기서 ‘후흑학’은 저절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연상시킨다. 양자는 섣부른 이상주의를 지양하고, 현실주의적 접근을 통해 공익을 수호·확대할 것을 촉구한다.

오늘날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이나 북한은 한결같이 후흑(厚黑)하다. 이에 반해 우리는 대체로 박백(薄白)하기만 하다. 더구나 새 정부의 외교안보팀이 박백 일색이라는 지적마저 없지 않다. 제대로 후흑해야 작금의 난국을 능히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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