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물이 개운한 스파게티 봉골레.
국물이 개운한 스파게티 봉골레.

“다음엔 꼭 예약해주세요!” 몇몇 손님들이 아쉬운 표정으로 발길을 돌린다. 자리가 없어 손님을 돌려보내야 하는 주인장의 표정은 더 안타깝다. 서울에서 가장 유서 깊은 이탈리안 레스토랑 ‘라 칸티나’의 흔한 점심 풍경이다.

서울 을지로 입구에서 51년째 추억을 쌓아가는 이탈리안 레스토랑 ‘라 칸티나(LA CANTINA)’. 라 칸티나는 이탈리아어로 ‘포도주 저장창고’를 의미한다. 창업주 김미자씨가 운영할 때는 일반 양식당 메뉴에 스파게티, 피자 등 이탈리아 음식을 몇 가지 내는 정도였다. 라 칸티나가 이탈리아 음식 전문점이 된 건 1982년, 내자호텔에서 지배인을 지낸 이재두씨(작고)가 가게를 인수하면서부터다. 이씨는 친분이 있던 이탈리아계 미국인 벨라르디(Velardi)에게 주방을 맡겼다. 뛰어난 미각과 요리 솜씨를 지닌 그가 이탈리아 본토의 맛을 전수해주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한국인 손님들의 입맛을 반영하면서 우리 입맛에 맞게 토착화되었다는 평을 듣곤 한다.

베스트 메뉴 ‘스파게티 봉골레’만 해도 국물이 넉넉해서 마치 조개수프를 먹는 느낌이다. 처음부터 국물이 많은 건 아니었다. 이탈리안 오리지널 봉골레로 내놓았지만, 싱싱한 조개를 볶으면 나오는 단 국물 맛에 반한 손님들의 요청에 따라 국물이 점점 더 늘었다. 주문을 하면 특이하게 바지락이나 모시조개가 아닌 값비싼 중합을 푸짐하게 올려준다. 그릇에 찰랑찰랑하게 담긴 국물을 한술 맛보면 버터의 고소한 풍미가 살짝 감돌면서 중합 특유의 깨끗하고 시원한 맛이 입안에 가득 찬다. 이 한 그릇이면 숙취까지 확 풀리겠다 싶을 정도로 속이 개운해진다. 통통하게 살이 차오른 조갯살은 매끈매끈 입안에서 요동치고 조개 국물에 촉촉하게 젖은 스파게티는 알맞게 삶아 씹는 식감이 제대로다.

‘스파게티 봉골레’와 양대 산맥을 이루는 인기 메뉴 ‘링귀니 라 칸티나’도 국물이 넉넉하다. 바지락 살을 발라 듬뿍 올리고 새우까지 곁들여 봉골레보다 단맛과 감칠맛이 더 풍부하다. 이밖에 치즈를 올려 오븐에 구운 ‘스파게티 올드패션드’, 탈리아탈레면에 해물을 넣고 토마토 소스로 버무린 ‘탈리아탈레 페스카토레’ 등 수십 년을 내려온 인기 메뉴들이 즐비하다.

사실 이 집엔 파스타보다 더 잘나가는 메뉴가 있다. 일명 ‘삼성세트’, 메뉴판에는 없다. 깊은 맛의 양파수프에 그린샐러드, 마늘을 올린 안심스테이크, 후식이 세트로 나온다. 삼성의 고 이병철 회장이 제안해 20년 전부터 삼성 임직원들이 즐겨 먹던 메뉴인데, 합리적인 가격에 실속 있는 구성으로 일반 손님들도 많이 찾는다.

가업을 물려받은 이태훈 대표.
가업을 물려받은 이태훈 대표.

손님 90%가 단골

이곳에선 유난히 마늘빵을 주문하는 손님들이 많다. 마늘빵은 한때 이탈리아 레스토랑이면 어디나 내놓았던 메뉴였지만 이제는 고급 이탈리아 식당에선 보기 드문 ‘추억의 빵’이 되었다. 바케트보다 좀 더 부드럽게 직접 구워 만든 이 집 마늘빵은 먹을수록 자꾸 당기는 마력을 지녔다.

1990년부터 아버지 이재두씨를 돕다가 2013년 대물림을 받은 이태훈(52) 대표는 “전체 손님의 90%가 단골”이라며 “수십 년 전부터 찾아주는 단골손님들 때문에 음식을 바꿀 수가 없다”고 말한다. 그는 라 칸티나의 음식이 정통 이탈리안 스타일인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긴 세월 동안 깊은 맛으로 숙성되는 와인처럼, 손님과 직원들이 음식과 함께 추억을 쌓아가고 있다는 데 더 큰 의미를 둔다. “우리 집 음식은 결국 손님들이 원하는 음식입니다.”

무엇보다 신선한 식재료를 아낌없이 사용한다. 장바구니 물가를 좀 아는 이라면 ‘스파게티 봉골레’에 올라오는 중합이나 ‘링귀니 라 칸티나’에 올려진 바지락 양만 봐도 놀랄 정도다. 게다가 시내 한복판 치고 가격이 착한 편이다. “큰 이익은 못 내고 있지만 가게에 대한 애정 때문에 유지하고 있어요.”

음식 맛도 그대로지만, 라 칸티나는 1960년대 개점 당시 이탈리안 전원풍의 인테리어를 그대로 박제한 듯 보인다. 5년 전 내부수리를 할 때도 천장과 바닥, 주방만 말끔히 단장했을 뿐, 본래의 분위기를 그대로 살려서 작업을 진행했다. 벽돌 하나도 허투루 선택하지 않았다. 요즘 나오는 반듯한 벽돌이 아니라 울퉁불퉁 정감 있는 옛날 벽돌을 구하기 위해 논산, 양주까지 발품을 팔았다.

이태훈 대표는 가게를 리모델링하면서 라 칸티나에 대한 자부심이 더 커졌다고 한다. “리모델링할 때 아버님이 변경된 인테리어를 보고 너무 서운해하셨어요. 그래서 다시 원래 분위기로 되돌리느라 수리 기간이 길어졌죠. 재오픈이 늦어지니 언제 문을 여냐는 손님들 전화가 빗발쳤어요. 직접 공사 현장에 찾아오신 분들도 꽤 있었고요. 그때 이 가게가 나만의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추억이 깃든 소중한 공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죠.”

8개월 만의 재오픈 날, 미처 간판도 걸지 않았는데 가게는 손님들로 꽉 찼다. 이 대표는 다시 찾아준 손님들뿐 아니라 복귀해준 직원들에 대한 고마움에 콧등이 찡해졌다. 리모델링을 하면서 다들 생계가 빠듯하니 ‘좋은 직장 있으면 어디든 가도 좋다’고 한 다음 공사를 시작했는데, 열댓 명 남짓한 직원들 중 한 명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다시 출근했다.

이 집에는 30년 이상 일하고 정년퇴직한 매니저도 있다. 일흔을 넘기고 은퇴했는데, 우리나라에서 매니저로 그토록 오랫동안 일한 경우는 드문 케이스. 주방에는 30년 가까이 근속한 베테랑 셰프가 3명이나 된다. 주방 식구가 바뀌지 않으니 음식 맛도 그대로일 수밖에!

한국에서 대(代)를 이어 단골이 될 수 있는 식당은 매우 드물다. 혹시 50년 넘게 한 장소에서 영업 중인 라 칸티나가 건물주 삼성으로부터 임대료 할인 같은 특혜를 받는 건 아닌가 궁금해 하는 이들도 있다. 이태훈 대표는 임대료는 주변 건물들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한다.

라 칸티나가 오래도록 이어올 수 있었던 건 오래된 단골들 덕분이다. 고 이병철 회장을 비롯해 많은 정재계 인사들이 이곳의 단골이었다. 젊은층이 늘긴 했지만 그래도 손님들 연령대가 높은 편이다. “여기 오면 너무 편안해하세요. 십수년 넘게 모신 요리사들과 지배인들이 단골들의 기호를 속속들이 다 아니까요.”

세월은 그냥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라 칸티나’의 51년 세월도 한결같은 음식 맛과 분위기 그리고 직원들의 정성스러운 마음에서 손님들의 행복한 기억 속으로 녹아들어왔다. 그 세월의 흐름을 묵묵히 지켜온 이태훈 대표는 “모든 손님들의 추억 속에 ‘라 칸티나’가 오래도록 남아 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한다.

정수정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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