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친정엄마가 흥분하며 일화를 들려줬습니다. 목욕탕에서 만난 꼬마아이가 엄마의 뒷모습을 보고 “할머니!” 하고 불렀다는 겁니다. 엄마는 “내가 왜 할머니냐?”면서 역정을 냈습니다. 손주들한테 할머니 소리 듣는 건 이해해도 생판 모르는 아이한테 할머니 소리를 들으니 억울하시답니다. 엄마는 68세입니다.

기대수명 90세 시대를 맞아 중년의 나이대도 넓어지고 있습니다. 최근 학계에서는 40세에서 68세까지를 중년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이 구분에 따르면 친정엄마는 아직 중년입니다. 중년의 맨 끄트머리죠. 엄마의 기억력은 깜빡깜빡합니다. 손주들 이름을 서로 바꿔 부르는 건 예삿일이고, 대화에서 ‘그거, 저거, 이거’ 대명사가 점점 늘어나고, 대화 도중 말허리를 자르고 불쑥 끼어드는 일이 잦습니다. “지금 말하지 않으면 까먹어서”랍니다.

그런 엄마의 사그라들지 않는 수퍼파워가 있습니다. ‘분위기 파악 능력’과 ‘사람 바탕을 알아보는 눈’입니다. 이 능력은 나이 들수록 점점 강해지는 듯합니다. 저희 가족은 “귀신은 속여도 우리 엄마는 못 속인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합니다. 엄마가 “저 사람 조심해라. 속 다르고 겉 다른 사람이다” 하면 꼭 들어맞습니다. “그런 사람 아니야~” 했다가 뒤늦게 “엄마 말이 맞네” 한 적이 꽤 됩니다. 통찰력과 판단력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평생을 전업주부로 살아왔으면서 직장생활의 애로사항을 털어놓으면 대승적 차원에서 기막힌 팁을 주십니다. 자녀교육서 한 권 안 읽었으면서 교육학 박사가 오랜 연구 끝에 내놓는 결론(“그냥 지켜봐 줘. 옆집 아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을 비워”)을 내리는가 하면, 자연을 예찬하는 표현은 웬만한 시인을 뺨칩니다. 종종 ‘우리 엄마는 천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난주 ‘중년의 뇌가 가장 똑똑하다’를 썼습니다. 나이 들수록 뇌세포가 감소하고 단순기억력이 감퇴하는 건 사실이지만 패턴 인지, 어휘, 귀납적 추리, 공간 감각에서 중년이 최고의 수행력을 보이는 시기라는 겁니다. 중년의 뇌는 모순덩어리입니다. 깜빡깜빡 하면서도 복잡한 상황에서 가장 탁월한 문제해결력을 보이는 시기가 중년이라는 것이지요. 뇌과학에 기반한 연구 결과가 드러나면서 ‘나이 들수록 지혜로워진다’는 속설이 과학적으로 입증되고 있습니다. 중년의 발견이라 할 만합니다.

그런데 직업시계는 거꾸로 흐릅니다. 기대수명 70세 시대에 정해진 정년 65세는 오히려 60세로 낮춰지는 경향입니다. 설문조사 결과 체감 정년은 48세라고 하니 실제 직업세계에서의 은퇴는 훨씬 더 빨라지는 것이지요. 인류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100세 시대를 향해 치닫고 있습니다. 기대수명 70세 시대에는 20년은 직업준비, 30년은 직업생활, 나머지 20년은 노후생활로 보냈습니다. 기대수명 100세 시대에는 어떤 패턴을 갖게 될까요? 인생 패턴이 대대적으로 재편되고 있습니다. 가장 똑똑하다는 ‘중년의 뇌 활용법’도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할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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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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