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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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도에 숨어 있는 우리 땅, 우리 역사가 156년 만에 세상 밖으로 나와 사람들을 만나게 됐다. 대동여지도는 실측지도 이전에 나온 조선시대 최고의 지도로 꼽힌다. 철종 12년(1861)에 제작된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실제 대동여지도를 본 사람은 많지 않다. 설사 지도를 들여다본다고 해도 한자 투성이에 암호 같은 기호들을 이해하기는 힘들다.

누구나 쉽게 보고 읽을 수 있는 ‘해설 대동여지도’(진선출판사)가 나왔다. 대동여지도에 수록된 한자 지명은 1만1680개. 모든 지명 옆에 한글을 덧붙이고, 지도가 한눈에 들어올 수 있게 색을 입혔다. 지도 우측에 지명과 지형지물에 대한 역사와 해설을 곁들였다. 또 대동여지도에는 미처 그려넣지 못한 우산도(于山島·독도)와 삼도(三島·거문도)를 추가해 전국 지도를 완성했다. 책의 맨 끝에는 지명, 지도표 분류, 색인부호 등을 수록해 현대 지도와 같은 형식으로 대동여지도를 찾아보기 쉽게 만들었다. 묵직한 책의 무게가 그 안에 들인 시간과 노력을 짐작게 했다.

‘해설 대동여지도’는 최선웅 한국지도제작연구소 대표와 민병준 전 ‘사람과 산’ 편집장이 의기투합해 3년여 공을 들였다. 고지도 연구가인 최선웅(73) 대표는 50년 동안 지도를 제작해왔다. 민병준(54)씨는 20여년 전부터 대동여지도를 들고 백두대간을 비롯해 전국의 산하를 누비고 다녔다. 구글 지도로 풀 한 포기까지 앉아서 볼 수 있는 시대에 새삼스레 왜 고지도를 꺼내들었을까. 대동여지도에 해설을 붙인 민병준씨를 책이 출간된 직후 만났다.

“웹소설 시대에도 고전은 여전히 읽힙니다. 지도의 고전은 대동여지도입니다. 아무리 구글 어스로 속속들이 들여다본다고 해도 대동여지도의 가치는 변하지 않습니다. 지도는 그 시대의 정신입니다. 그때를 살았던 사람들의 숨결까지 느낄 수 있습니다.”

민씨는 대동여지도와 현재의 지도를 비교하고 달라진 지명 등을 확인하기 위해 전국 곳곳을 샅샅이 훑고 다녔다. “지도에 점 하나를 찍으려면 논문 하나가 있어야 할 정도로 정교해야 한다”는 것이 민씨의 말이다. 특히 북한은 찾아가 확인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지명 하나 찾기 위해 온갖 자료를 뒤지다 밤을 꼬박 새는 것은 보통이었다.

지명이 사라진 경우도 많다. 대동여지도에는 함경북도 길주군 북쪽에 장백산(長白山)이 있다. 북한이 핵실험을 한 풍계리 근처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지지’에도 기록돼 있는 이 장백산이 현대 지도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해당 영역에는 현재 만탑산, 괘상봉, 관모봉, 그리고 한반도에서 두 번째로 높은 관모봉(2541m) 등 2000m가 넘는 고봉들이 줄지어 솟아 있다. 온갖 자료를 통해 지금의 ‘만탑산’ 위치라는 것만 짐작할 뿐이다.

지도는 종합예술이고 종합학문

자료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뜻밖의 수확도 많았다. ‘삼수갑산을 가도 할 말은 한다’. 결연한 의지를 보일 때 흔히 쓰는 말이지만 ‘삼수갑산’이 어디인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삼수, 갑산은 함경남도 개마고원 지역에 위치하는 오지 중 오지로 조선시대 유배지이다. 삼수는 무과에 급제한 초급 장교들의 첫 근무지이기도 하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첫 부임지도 삼수였다. 1576년 삼수의 동구비보 권관(종9품)으로 첫 발령을 받아 3년을 근무한 기록이 나온다. 문제는 동구비보의 위치가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것. 민씨는 임진왜란 직전 김성일이라는 무관이 순찰 기록을 남긴 자료 속에서 동구비보라는 단어를 확인했다. 군관들이 위치를 옮겨야 한다고 건의한 내용을 유추할 때, 동구비보는 자작구비보에서 오매강(현 장진강) 15리 상류 지점인 어면진의 중간 지점 강 언덕으로 추정된다는 것이 민씨의 주장이다.

도읍지인 한양 중심부와 성 밖 10리까지 담은 한양 광역지도 ‘경조오부’ 편도 흥미롭다. 조선의 대동맥인 한강 물줄기를 따라 나루터와 포구 등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활인서(빈민의료기관), 모화관(사신 영빈관), 전생서(제물용 가축을 기르던 곳) 등 관청을 현재의 위치와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고 이태원, 용산, 성북동, 가좌동, 평창 등 낯익은 동네 이름도 보인다.

지명뿐만 아니라 행정, 경제, 교통, 군사와 관련된 시설 등이 기호와 함께 자세히 기록돼 있다. 특히 봉수(군사통신제도), 영아(병마절도사의 군영), 창고(곡식·무기 저장), 진보(방어를 위해 쌓은 진지) 등 군 관련 시설이 눈길을 끈다. 군인이 보초를 서는 ‘파수’의 위치까지 삼각형으로 표시돼 있다. 민씨는 “대동여지도는 군사지도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민씨와 대동여지도와의 만남은 20여년 전이었다. 대학 시절 산악부 활동이 졸업 후에 일로 이어졌다. 산악 월간지 ‘사람과 산’ 기자로 입사해 고지도 전문가인 이우형(1934~2001)씨를 취재한 것이 인연이 됐다. 한국일보 문화부 기자 출신인 이우형씨는 우리나라 최초의 제주 관광지도를 만들고 산악잡지 ‘산수’를 창간했다. 무엇보다 잊혀진 대동여지도를 세상으로 끄집어냈다. 박물관과 인사동 일대를 쫓아다니며 흩어져 있는 대동여지도 원본을 찾아내 복원하고 1985년 복간본을 펴냈다. 친일파로 알려진 김정호 바로 세우기에도 앞장섰고 후손이 없는 김정호의 제사도 지냈다. 덕분에 ‘현대판 김정호’로 불렸다. 일제 때 없어진 조선시대의 지리 개념 ‘백두대간’을 찾아내 산악인들을 통해 설파한 것도 이우형씨다. “인생의 스승입니다. 스승이 없었다면 ‘해설 대동여지도’도 없었을 겁니다. 이우형 선생이 평생 머릿속에 정리해 놓은 것을 제가 글로 옮기기로 했는데 기록 작업을 하던 중 안타깝게도 돌아가셨습니다.”

대동여지도는 대량 보급을 위해 목판으로 제작했다. 목판은 일부만 남아 있다. 목판의 크기는 가로 43㎝, 세로 32㎝. 양쪽에 판각을 한 것이 60여장에 이르는데 현재 12장(보물 1581호)이 국립중앙박물관, 숭실대학교에 소장돼 있다. 고산자는 지도 제작을 위해 발로 뛴 것이 아니다. 백두산을 수차례 올랐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조선은 지도의 강국이었다. 현감으로 부임하면 그 지방의 지도를 그려서 정부에 올리는 것이 일이었다. 그 지도들을 하나로 집대성한 사람이 고산자이다.

민씨는 고산자가 얼마나 위대한 인문학자이고 화가이며 조각가였는지 대동여지도를 들여다볼수록 감탄스럽다고 말했다. 고산자의 권위에 슬쩍 한 발을 얹은 것 같아 송구하지만 대동여지도를 대중화했다는 뿌듯함도 크다고 했다. 책에 담지 못한 내용도 많다. 수많은 자료를 뒤지면서 축적한 자료는 그의 자산이다. 그 자산을 바탕으로 대동여지도에 숨겨진 가치를 찾아 더 깊이 연구할 계획이다.

“지도는 종합예술이고 종합학문입니다. 지도 속에 역사, 문화, 전통이 다 들어있습니다. 지도를 보면 우리 땅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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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은순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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