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초등학교 3학년까지 경기도 광주 분원초등학교를 다녔다. 6·25전쟁이 끝난 직후였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의 삶은 매우 곤궁했다.

그러나 나의 조부께서는 농사를 크게 지어 다른 사람들보다는 여유 있게 살고 있었다. 분원은 조선백자 생산지로 유명한 곳이지만, 당시 분원 사람들은 경안천과 한강 사이의 너른 벌판에서 벼농사와 함께 무·배추를 재배해 주로 서울에 내다팔며 생계를 꾸렸다. 1970년대 팔당댐 건설로 인해 지금은 농경지 전체가 수몰되어 호수(팔당호)로 바뀌었고 분원 마을은 호수변 마을로 변해버렸다. 어머니는 내가 초등학교 입학 전에 누나와 형의 교육 때문에 일찍 서울로 올라가 사셨기 때문에 나는 할아버지·할머니와 함께 고향에 살면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장날만 되면 할아버지는 어린 나를 데리고 장터에 나가 배추된장국과 함께 나오는 인절미를 사주시곤 했다. 아마도 할아버님이 인절미를 좋아하셨던 것 같다. 배추된장국은 고기는커녕 두부 한 조각도 없는 단순한 된장국이었다. 하지만 너무 맛있어서 나는 두 손으로 국그릇을 들고 국물을 들이마시고 팥인절미 한쪽 먹고는 다시 국물 마시고 하였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마도 당시에는 식재료가 풍족하지 못한 탓에 그곳에서 농사지은 배추로 된장에 파, 마늘, 고추만 넣어 간단하게 요리를 하였던 것 같다. 그럼에도 그 시원한 맛은 어린 나를 매료시켰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두 분 다 돌아가시고 난 후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서울로 올라와 학교를 다녔다. 늘 그리워했던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나는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그런데 서울 생활과 함께 나의 입맛은 서서히 변해가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뛰어난 요리솜씨로 온갖 종류의 요리를 자식들을 위하여 만들어주셨다. 특히 어머니의 곰탕과 동치미는 친척뿐만 아니라 동네에서도 소문이 나 나는 그만 배추된장국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초겨울 날이었다. 갑자기 배추된장국이 먹고 싶어졌다. 어머니에게 배추된장국을 먹고 싶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멸치와 다시마 국물에 된장, 파, 마늘, 청고추를 넣어 된장국을 끓여주셨다. 나는 고향 마을 분원의 장날 생각을 하면서 먹었는데 그 맛이 장터에서 먹었던 것보다도 더 환상적이었다. 음식이란 무엇인가. 음식이란 좋고 비싼 재료라고 해서 꼭 맛있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요리를 하느냐에 따라 그 맛은 달라지는 것이다.

결혼 후 아내는 어머니에게 요리하는 법을 열심히 배웠다. 그러나 시간으로 숙성된 어머니의 손맛을 쉽게 따라가지 못했다. 그렇게 10년이 지나고 20년이 흘렀다. 어느 날 저녁에 아내가 생각지도 않았던 배추된장국을 끓여 먹어 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한 숟가락 떠서 먹어보고는 순간 깜짝 놀랐다. 어머니가 끓여준 그 맛과 너무 흡사했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옛날 생각이 나면서 즐거운 식사를 하였다. 이제는 아내가 재료의 성질과 그와 조화되는 조리방법을 터득했던 것이다.

건축가로서 나는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설계하면서 ‘건축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나 자신에게 끊임없이 던지며 작업해왔다. 건축도 음식 만드는 것과 같이 재료의 좋고 나쁨, 싸고 비쌈이 아니라 무엇을, 왜,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목적에 적합한 방법으로 사용했을 때 그 가치가 드러나는 것이다. 어릴 적 맛에 대한 기억과 추억이 나의 건축적 철학과 방법론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첫째, 집은 관계된 작용에 의해서 나타난 결과이다. 즉 하나의 요소가 아니라 모든 것이 서로 관계하고 작용하면서 현상하는 것이다. 장소 및 도시 구조, 땅의 조건 및 환경, 지역 문화, 사용자의 구성 및 요구 조건을 고려해야 한다.

둘째, 집은 단순히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삶과 기억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 집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공간이어야 한다. 물리적으로 필요한 공간으로만 구성될 뿐 아니라 인간의 삶은 예측 가능한 행위와 불가능한 행위가 항시 존재하며 심미성을 추구하는 인간의 의식을 담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셋째, 형태와 공간은 단순하되 다양한 의식을 생산하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건축에 있어 형태와 공간은 사용자뿐만 아니라 관자들에게 심리적·시각적으로 다양한 인식을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단순하지만 이야기가 있는 공간과 형식이 되었을 때 그 가치가 상승하게 된다. 독일의 근대 건축가 미스 반데어로에는 건축에 있어 ‘Less is more’라는 건축언어를 남겼다, 즉 적은 것이 더 풍요로운 것이다!

넷째, 물성과 함께 빛은 공간의 영혼이다. 건축에 있어 재료는 매우 중요하다. 재료에는 좋고 나쁨이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장소, 어떤 용도인가에 따라 그에 적합한 재료를 사용하여야 한다. 재료가 지니고 있는 물리적 특성을 왜곡하지 않으면서 물성(物性)을 드러낼 수 있는 디자인이 되었을 때 그 가치가 발생한다. 또한 빛에 의해 표면의 질감이 변화하는 방법을 찾아냈을 때 그 가치는 더욱 상승한다. 특히 내부 공간에 있어 빛은 공간의 성격을 결정 짓는 가장 핵심적 요소이다. 은은함에서부터 강렬함, 쏟아지는 빛의 폭포수, 빛의 선과 그림자, 빛점의 연속적 리듬 등 수없이 다양한 빛의 연출에 따라 시간에 의한 공간의 성격은 변화한다. 따라서 빛은 인간의 의식과 감성을 형성하는 공간의 영혼인 것이다.

이처럼 요리나 건축 작업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중에서도 과거 서민들이 즐겨 먹던 배추된장국의 단순한 재료가 빚어내는 맛의 시원함은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가 크다고 생각한다.

우경국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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