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화
[2465호] 2017.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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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의 도시 이야기] 리버풀

비틀스의 음악이 강물처럼 흐르는 도시

정여울  작가·‘내가 사랑한 유럽 top 10’ 저자  

01 비틀스의 음악이 지금도 끊임없이 연주되는 캐번 클럽. 맥주와 함께 비틀스의 음악을 즐기려는 여행자들과 음악팬들로 관광명소가 되었다.
02 캐번 클럽 앞에 있는 존 레넌 동상. 기단 위에 있지 않고 도로 위에 세워져 있어 훨씬 친근하게 다가온다.
03 캐번 클럽에서 맥주를 마시며 음악을 듣고 있으면 1970년대로 시간여행을 떠나온 느낌이 든다.
04 비틀스 기념품 가게. 비틀스의 사진과 앨범, 서적과 기념품들이 총망라되어 있다. photo 이승원
영화 ‘비긴 어게인’을 보면서 길거리의 소음조차 자연스러운 음악으로 어우러지게 만드는 예술가들의 열정에 매료되었다. 그들은 길거리에서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 자동차 소리, 그리고 온갖 잡스러운 소리들이 섞여 만들어내는 도시의 온갖 소음 자체를 자신들의 음악과 어우러지게 만들었다. 어쩌면 모든 소음이 철저히 통제된 녹음실의 음악은 완벽하게 살균된 음식처럼 생명력을 잃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버스킹(Busking)’이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본질적인 소란스러움을 사랑한다. 소리란 본래 소란스러움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무거운 침묵 속에서 어떤 소리를 기대하겠는가. 누군가는 소란이라 느끼는 곳에서 누군가는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않는가. 그리하여 문제는 ‘소리를 소음으로 듣는 귀’와 ‘소리를 음악으로 듣는 귀’의 차이가 아닐까. 유럽의 밤거리를 걸을 때마다 버스커들의 음악을 들으며 나는 소란스러움이 아니라 제대로 된 음악을 만들어내기 위해 안간힘 쓰는 예술가의 열정을 듣는다. 물론 도저히 들어주기 힘든 음악도 가끔 있다. 하지만 그것조차 진정한 자기 안의 재능을 발견해내기 위한 지난한 과정이리라.
   
   비틀스의 음악이 공기처럼 흐르는 도시, 불멸의 비틀스를 태어나게 한 도시 리버풀에 가기 위해 기차를 타는 동안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비틀스도 한때는 저 거리의 순진한 버스커들처럼 ‘내가 무엇이 될지도 모르는 채로’ 음악을 하지 않았을까. 런던의 유스턴역에서 리버풀의 라임스트리트역까지, 열차로 2시간30분 정도 걸리는 그 여정 속에서 나는 이어폰을 끼고 존 레넌의 음악을 계속 들었다. 존 레넌의 음악에는 음악 그 자체를 사랑하는 예술가의 순수가 깃들어 있다.
   
   그는 마흔이 넘어서도 자신의 노래하는 목소리에 자신감을 가지지 못했다고 한다. 그건 단지 겸손해서가 아니라 ‘내 마음에 드는 소리’를 완벽하게 낼 수 없다는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결핍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음악가로서 최고의 자리에 올라갔을 때조차 그는 거리의 버스커처럼 음악을 향한 순수한 열정을 잃지 않았다.
   
   내가 ‘정말 멀리 여행을 떠나왔구나’ 하고 느끼는 순간도, 거리의 버스커들이 정말 거리낌 없이 자신의 음악을 연주해줄 때이다. 그들은 진정한 꾼들이다. ‘내 소리가 어떻게 들릴까, 내 음악이 타인에게 어떻게 다가갈까’라는 두려움 때문에 스스로를 파괴하지 않는다. 뛰어난 버스커들은 진정한 꾼들이기에, 음악을 연주할 수 있다는 것,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것 자체를 소중히 여기고 즐길 줄 안다.
   
   런던의 밤거리를 걷다가 ‘버스킹 금지(No Busking)’라는 커다란 푯말이 붙어 있는 곳에서 버스커들이 보란 듯이 떠들썩하게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보았다. 웃음이 나왔다. 왠지 통쾌했다. 이거다 싶었다. 버스킹은 금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유로운 창작의 열정은 금지한다고 통제되는 것이 아니다. 버스킹이 없는 유럽의 밤거리는 얼마나 썰렁할 것인가. 리버풀에 도착하자 과연 한겨울에도 기타 하나 달랑 들고 음악을 연주하는 버스커의 쓸쓸하고도 아름다운 뒷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비록 양손에 짐을 들고 있어 사진을 찍지는 못했지만, ‘그래, 여긴 음악의 도시구나’ 하는 반가움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 리버풀이 오래된 항구도시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알버트 독(Albert Dock)의 전경. photo 이승원

   ‘윈터 블루스’가 비껴간 도시
   
   여행자의 신경은 예민한 촉수를 뻗어 ‘그 도시가 낯선 이들에게 얼마나 열려 있는지’를 가늠해 본다. 은근한 인종차별이 느껴지는 곳도 있고, 노골적인 이방인 배척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도 있지만, 여행자는 어디서든 빨리 적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가 여행자라는 이유만으로’ 우리를 반겨주는 도시야말로 여행자들의 천국이다. 영국인들은 대체로 이방인에게 먼저 말을 건다거나 먼저 웃어주는 일이 극히 드물었지만, 리버풀은 내가 방문한 영국의 많은 도시들 중에서 가장 ‘열려 있는 도시’로 느껴졌다.
   
   겨우내 찌뿌둥한 날씨와 적은 일조량 때문에 ‘윈터 블루스(Winter Blues·겨울우울증)’라는 말이 흔히 쓰일 정도인 영국의 악명 높은 날씨는 리버풀에는 별로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리버풀은 겨울인데도 불구하고 활기찼고, 팝 음악이나 뮤지컬 공연 포스터가 가장 많이 붙어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나를 첫눈에 반하게 만든 리버풀 도서관이 있는 곳이었다. 볼펜 한 자루 떨어지는 소리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조용한 도서관이었지만, 책을 읽는 사람들의 눈부신 열정으로 끓어오르던 아름다운 리버풀 도서관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도시는 내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의 공간으로 거듭났다.
   
   단지 ‘비틀스를 탄생시킨 도시’여서만이 아니라, 리버풀은 그 자체로 경이로운 음악의 도시이기도 하다. 리버풀은 팝음악의 세계 수도(World Capital City of Pop)로서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로 수많은 뮤지션들을 탄생시킨 도시다. ‘넘버 원 싱글’을 무려 56개나 배출한 최고의 음악도시가 바로 리버풀이다. 1960년대에 비틀스의 음악이 세계를 강타했을 때, 사람들은 이를 일컬어 ‘브리티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 그러니까 ‘영국의 침공’이라는 말을 쓸 정도였다. 비틀스가 영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오는 동안, 미국인들의 심장은 이미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당시의 가장 유명한 오락프로그램이었던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했을 때, 미국의 거리에는 10대 청소년들의 범죄가 단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모두들 비틀스의 음악에 맞추어 흥겹게 춤을 추고 머리를 흔들어대느라 그 흔한 ‘청소년 범죄’를 저지를 짬조차 나지 않았던 것이다. 음악이 지닌 기적 같은 치유의 힘을, 비틀스는 온몸으로 증명해 보인 것이다.
   
   이렇듯 내딛는 발걸음마다 대중음악의 역사를 다시 쓰던 비틀스, 나아가 ‘문화라는 것이 갖는 엄청난 위력’을 보여준 비틀스가 태어난 도시는 도대체 어떤 곳인지, 나는 오래전부터 궁금했다. ‘오 마이 러브’와 ‘렛 잇 비’, ‘헤이 주드’와 ‘예스터데이’를 수도 없이 ‘리와인드’하여 듣고 또 들었던 학창시절, 나는 언젠가는 비틀스의 도시 리버풀에 가서 그들의 온기와 체취를 느낄 수 있기를 바랐다. 그 꿈이 드디어 이루어졌다. 리버풀은 영국에 체류하는 두 달동안 살짝 겨울우울증에 걸려 있었던 나의 어두운 마음을 말끔히 씻어주었다.
   
▲ 알버트 독 근처의 해양박물관. 바로 근처에는 리버풀 테이트 뮤지엄이 있어 훌륭한 현대미술 컬렉션을 만날 수 있다. photo 이승원

   가수 한대수는 ‘영원한 록의 신화 비틀스 vs 살아 있는 포크의 전설 밥 딜런’이라는 책에서 비틀스의 공연을 처음으로 봤을 때의 엄청난 충격을 이렇게 그려낸다. “1963년 2월 7일. 온 가족이 오밀조밀 모여 즐겁게 텔레비전을 보는 순간 갑자기 네 명의 영국 청년이 기타와 드럼 하나로 ‘I wanna hold your hand, ooh(당신 손을 잡고 싶어요)’라고 절규를 했다. 걸레 같은 장발과 함께 몸을 마음껏 흔드는 이 율동에 따라 미국의 10대 청소년들은 눈물을 흘리며 비트에 맞춰 미치광이처럼 고함을 질렀다. 약 7300만명이 이 희귀한 장면을 목격했다. 미국 텔레비전 사상 가장 높은 시청률이었다. 드디어 비틀스가 세계 정복의 첫걸음을 뗀 것이다.” “그 후 히트곡이 줄지어 나왔다. 이것은 음악이 아니라 혁명이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그들의 사운드에 매료되었고 신비함, 열정 그리고 알 수 없는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
   
   비틀스 멤버들은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즉흥적으로 음악을 만들고,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내면의 소리로 가사를 붙이고, 노래와 연주까지 모두 해내며 ‘싱어송라이터’라는 존재 자체가 없던 시대에 그 모든 것을 누구의 도움도 없이 해냈다. “우리는 악보를 쓸 줄도 읽을 줄도 모른다. 그냥 존이 코드를 치며 멜로디를 흥얼거리면 내가 받아서 다시 코드를 배열하고, 그냥 서로 기타를 잡고 마주 보고서 노래를 만들어낸다.” 음대를 나오지도 않았고, 악보도 읽을 줄 모르는 사람들이 그저 ‘음악이 좋아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만들어낸 노래가 전 세계 음악의 역사를 바꾸었다. 비틀스는 대중음악 역사상 처음으로 작사·작곡 뿐만 아니라 연주와 노래까지 하는 완벽한 싱어송라이터라는 존재를 탄생시킨 것이다.
   
   존 레넌은 가슴속 깊은 상처를 예술로 승화시킨 음악가이기도 하다. 존 레넌의 노래 중에 ‘마더(Mother)’라는 곡이 있다. 나는 이 곡을 들을 때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절벽 위에서 뛰어내리는 것 같은 공포를 느낀다. 이 노래를 부를 때의 존 레넌은 ‘이매진’처럼 맑고 투명한 몽상가도 아니고, ‘러브’처럼 감미로운 로맨티스트도 아니다. 이 노래를 부를 때의 존 레넌은 한 번도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아이처럼 날이 서 있다. 이 노래는 이미 어른이 되었지만 아직도 한밤중이면 또다시 어머니에게 버려질까봐 공포에 떠는 아이의 절규 같다. “어머니, 어머니는 저를 가졌지만, 저는 어머니를 한 번도 가진 적이 없어요.(Mother, you had me, but I never had you.)” 완벽한 화음과 영롱한 울림으로 감동을 주는 다른 곡들과는 달리, 이 곡은 방금 칼에 베인 상처처럼 쓰라리다.
   
▲ 리버풀의 밤거리는 겨울에도 활기가 넘친다. photo 이승원

   그는 어른이 되어서도 아직 극복하지 못한 자신의 상처를 이 노래를 통해 토해내고 싶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 버려진 존을 키워준 사람은 강압적이고 엄격한 미미 이모였다. 10대 시절에 어머니를 비로소 다시 만난 존 레넌은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어머니에게 한눈에 반했고, 이제야 어머니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꿈에 부풀었지만, 그 재회의 기쁨은 너무도 짧았다. 1958년, 존 레넌의 어머니는 경찰관이 운전하는 차에 치여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당시 비번이었던 그 경찰관은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경찰관의 음주운전을 의심했다. 한 번도 어머니다운 어머니를 가져 보지 못했던 존 레넌의 뼈아픈 트라우마는 이때 생긴 상처의 지속이기도 했다.
   
   하지만 존은 끝내 자신의 상처를 극복했다. 신시아 레넌과의 이혼 이후 오노 요코와 새로운 가정을 꾸리면서 그는 영원한 소울메이트를 비로소 찾았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오노 요코의 반복되는 유산과 존 레넌의 외도와 약물 복용으로 두 사람의 결혼생활에 위기가 찾아왔지만, 두 사람은 숀 레넌을 낳은 이후 최고의 행복을 누렸다. 존 레넌은 요코와의 사이에서 아들 숀 레넌이 태어난 뒤 5년 동안은 외부활동을 거의 하지 않으며 오로지 육아에 전념했다. 사람들은 존 레넌의 ‘공백’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아들 숀에게 정성스레 삼시 세끼를 챙겨주고 아들과 놀아주는 재미에 푹 빠졌고, 숀만은 ‘버려질 것 같은 공포’에 내맡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사람들은 존 레넌의 외부활동이 뜸해지자 그가 ‘일’을 그만둔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 하지만 존 레넌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기를 키우는 게 일이 아니라면, 도대체 뭐가 일이란 말인가.” 존 레넌의 팬들은 그의 콘서트나 앨범에서 오노 요코의 노래하는 목소리가 들리면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리기도 했지만, 존 레넌의 영원한 뮤즈이자 음악적 동반자는 누가 뭐래도 오노 요코였다. 비틀스 멤버들과의 결별 이후 솔로로 독립하면서 비틀스는 한동안 커다란 공백을 느꼈지만 존 레넌은 오히려 자신의 음악적 개성을 더욱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었다. 비틀스는 아직 존 레넌을 필요로 했지만, 존 레넌은 더 이상 비틀스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 리버풀 도서관. 아름다운 도서관 내부와 방대한 장서, 저렴하고 맛있는 카페테리아로 관람자들을 즐겁게 해준다. photo 이승원

   비틀스 음악을 매일 공연 ‘캐번 클럽’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공부하는 것이 좋았지만, 사실 좋은 음악일수록 ‘공부하면서’ 듣기는 어려웠다. 존 레넌의 ‘이매진’ ‘러브’ ‘우먼’ ‘뷰티풀 보이’ 등을 들으면서 나는 ‘역시 음악을 들으면서 공부한다는 것은 음악을 너무 사랑하는 사람들의 하얀 거짓말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부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음악에 푹 빠져들 수밖에 없었으니까. 음악이 너무 좋아서 자꾸 교과서의 ‘읽던 줄’을 놓쳐버리곤 했으니까. “아침에 곡을 쓰고, 점심에 녹음을 하고, 저녁에 발표를 한다”고 말해 전 세계 음악인들을 기함시켰던 존 레넌의 천재성은 시간이 가도 빛이 바래지 않는 것 같다.
   
   리버풀 곳곳에서 나는 존 레넌의 음악적 향기를, 그리고 비틀스의 여전히 식지 않은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존 레넌은 이렇게 말했다. “전쟁을 선포하듯 평화를 선포하라. 그것이 우리가 평화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이다. 우리는 평화를 선포해야만 한다.” “요코와 나는 아직도 우리 둘의 아기를 갖기를 원합니다. 만약 안 된다면 입양을 하고 싶어요. 어떤 아이라도 좋아요. 유대인, 아랍인, 흑인, 백인, 심지어 물방울 무늬 아이라도 좋아요.” 그가 남긴 문장들을 읽고 있으면, 그는 훌륭한 작가이기도 했음을 느낄 수 있다.
   
   비틀스가 재주 많은 청소년들의 지역 밴드를 뛰어넘어 세계적 음악가로 변신한 곳이 리버풀이기도 하다. 그 음악의 중심지가 바로 캐번 클럽(Cavern Club)이다. 지금도 비틀스의 음악을 매일 공연하는 캐번 클럽 앞의 존 레넌 동상은 전 세계 여행자들의 ‘포토존’으로 유명하다. 존 레넌의 실물 크기로 제작된 동상은 삐딱하게 벽에 기대어 서서 ‘세상의 시선 따윈 아무 상관없다’는 듯 무심히 골목길을 응시하는 모습. 틀에 박힌 기념사진을 찍기 싫어하는 나조차도 존 레넌만은 반가워 그의 팔짱을 낀 채 사진을 찍었다.
   
   사람들은 리버풀을 ‘유럽의 뉴욕’이라든지 ‘영국의 베니스’라는 식으로 ‘칭찬’하지만, 나는 리버풀이 그저 리버풀이라서 그것만으로 그저 좋았다. 뉴욕처럼 모든 대중문화의 무지갯빛 흐름이 교차하는 곳, 베니스처럼 아름다운 항구와 마치 호수처럼 바닷물이 흘러드는 탁 트인 풍경을 간직한 곳. 그러나 세상 어디에도 없는, 이 세상 하나뿐인 비틀스를 낳은 도시 리버풀에서 나는 존 레넌이 속삭이는 ‘이매진(Imagine)’의 유토피아를 상상하며 내내 꿈꾸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국경도, 전쟁도, 종교도, 소유도 없는 곳에서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꿈꾸고, 사랑하는 꿈의 이상향을.
   
   ‘이매진’의 아름다운 가사 중에서도 ‘Above us only sky’라는 대목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진다. 우리들 위엔 오직 하늘뿐이니까. 아무것도 겁낼 필요가 없지 않을까. 권력도, 돈도, 그 무엇도, 우리들 위에 있어서는 안 되지 않을까. 어떤 권력에도 무릎 꿇지 않았던 존 레넌의 용기가 느껴지는 노래다. 힘들 때마다 ‘이매진’을 들으면 단발머리 고교시절 정말로 곧이곧대로 ‘국경도 종교도 소유도 없는 그런 나라’를 꿈꾸었던 그 시절의 순수가 함께 떠오른다. 우리 위에는 오직 하늘밖에 없으니까. 어떤 권력도 우리들 위에 있지 않으니까. 두려워할 것은 하늘, 즉 자연뿐이니까. 사람이 사람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그 모든 권력과 싸우는 것, 그것이 예술의 임무, 젊음의 임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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