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관 이번 주에는 ‘원초적 본능’(1992)을 감독한 폴 버호벤이 프랑스의 국민여배우로 불리는 이자벨 위페르와 만든 ‘엘르’를 하기로 했지요. ‘엘르’ 얘기를 하기 전에, 우리가 애써 시간을 내어 대담을 나눈 봉준호 감독의 ‘옥자’가 주간조선의 영화평 기사와 겹치는 바람에 빠지게 됐다는 점을 먼저 말하고 싶네요.

배종옥 그러게요. 일반 영화평이 아니라 넷플릭스 스트리밍 영화로서 ‘옥자’가 갖는 영화사적 의미에 대해 꽤 심도 깊게 이야기를 나눴는데, 아쉽게 됐네요.

신용관 미국의 문화 패션 전문지인 ‘배너티 페어’가 얼마 전 ‘2017 상반기 최고의 영화 10편’에 ‘옥자’를 선정했어요. ‘겟아웃’ ‘라이프’ ‘너의 이름은’ ‘잃어버린 도시 Z’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한 거지요.

배종옥 오, 그거 대단하네요. 외국인들에게도 ‘옥자’의 정서가 먹힌다는 얘긴데.

신용관 “떠들썩한 추격 장면과 조용한 내적성찰 장면 등이 딱 들어맞는 순간 그야말로 엄청나다”라고 극찬을 했어요. 미자를 연기한 안서현에 대해서는 “봉준호의 기발한 도전을 가능하게 도와주는 강렬하고 활기 넘치는 주연”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배종옥 아역 연기는 압권이었어요. 물론 그 영화의 주연급 연기는 ‘옥자’가 펼쳤지만.(웃음)

신용관 한국인 감독이 미국 자본으로 만든 ‘미국 영화’ ‘옥자’를 강조하고 싶었어요. 노벨 문학상이 요원한 대한민국에 아카데미 작품상이나 감독상을 안겨주기를 기대하는 의미에서 저는 별 5개 만점을 주었습니다.

배종옥 배우인 나는 아무래도 연기가 먼저 눈에 들어오는데, 틸다 스윈튼이나 제이크 질렌할 같은 톱클래스 배우들의 연기가 모두 겉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어요. 스토리나 캐릭터는 할리우드 영화인데, 줄거리를 풀어가는 감성은 한국 감성이라 그랬던 게 아닌가 싶어요. 하지만 봉준호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만드는 잘 만든 영화라는 측면에서 나는 별 4개를 주었지요.

신용관 국내 영화 최초로 온라인 스트리밍과 극장 개봉을 동시에 펼친 ‘옥자’의 선전을 기대하면서 이 ‘문제적’ 영화(웃음) ‘엘르’ 얘기를 시작하지요.

배종옥 문제적 영화, 맞아요. 영화 크레딧 올라갈 때 든 첫 느낌이 ‘대체 감독이 뭔 얘기를 하고 싶은 거야?’였으니까요.

신용관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를 아직 보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줄거리를 요약해 보지요. 잘나가는 게임회사의 CEO이자 언제나 당당하고 매력적인 여인 ‘미셸’(이자벨 위페르)의 집에 어느 날,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이 침입합니다. 스키 마스크를 쓴 괴한은 그녀를 무자비하게 성폭행하고 유유히 사라지지요.

배종옥 폭행을 당한 미셸은 아무렇지 않은 듯 깨진 접시를 치우고, 자신의 옷을 버린 뒤 거품 가득한 욕조에서 피를 흘리며 목욕을 하고요. 그녀는 경찰서에 신고도 하지 않은 채 병원에서 성병 검사를 하고, 더구나 절친이자 동업자인 ‘안나’(앤 콘시니) 부부와 전 남편 ‘리처드’(샤를스 베를링)가 함께한 식사자리에서 태연하게 성폭행당한 사실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신용관 예측할 수도, 이해도 안 되는 미셸의 일련의 행동 뒤에는 ‘39년 전 이유 없이 이웃 주민 27명과 개 6마리를 죽인 연쇄살인마의 딸’이라는 과거의 상처가 있지요. 아버지의 가석방 신청으로 옛 살인사건이 언론에 재조명되면서 악몽 같은 그녀의 과거는 다시 그녀를 괴롭힙니다.

배종옥 미셸은 같은 중년 여성인 내가 봐도 정말 ‘비범한’(웃음) 인물이에요. 그녀는 젊은 요가강사를 쫓아다니는 전 남편과도 가끔 섹스를 하는데, 동업자이자 절친인 안나의 남편과는 불륜관계이지요. 위페르가 1953년생이니 우리 나이로는 65세예요!

신용관 정말? 탤런트 박정수씨와 동갑이네요. 영화 ‘도둑들’에 나온 김해숙씨보다는 2살이나 더 많고!

배종옥 그런데도 폭력적 강간 장면을 찍고, 가슴도 드러내며 심지어 자위를 하는 장면까지 찍었다니 같은 배우로서 정말 대단하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을 거 같아요. 우리나라는 나이 50만 넘으면 할머니 취급을 받아요. 여자가 아닌 거지요.(웃음)

신용관 그래선지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나는 ‘피아니스트’(감독 미카엘 하네케·2001) 이후 최근 ‘다가오는 것들’(감독 미아 한센-러브·2016)까지 본 입장에서 ‘기시감’이 너무 강한 연기던데….

배종옥 하지만 위페르가 아니었다면 과연 누가 저 역할을 저렇게 할 수 있었을까 싶어요. 워낙 극중 미셸이 특이한 캐릭터라. ‘대체 불가능한 연기’까지는 아니더라도, 무심한 표정에 실린 위페르 특유의 ‘무미건조한’ 연기는 높이 살 만하다고 봐요.

신용관 일단 영화에 정상적인 인간이 없지요.(웃음) 이 영화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장면은 주요 등장인물이 크리스마스를 맞아 모두 한자리에 모여 대화를 주고받는 신이에요. 미셸의 엄마는 손주뻘 한량과 함께 나타났고, 결혼을 발표하지요. 이 자리에 초청받은 앞집 사는 부부는 종교적인 이유로 ‘섹스리스’ 상태고. 미셸은 매력적인 앞집 남자 ‘패트릭’(로랑 라피트)을 바로 그 자리에서 적극적으로 유혹합니다. 미셸의 외동아들은 흑인 친구의 아이를 임신한 분노조절장애의 여자친구와 살림을 차리겠다고 성화를 부리고.

배종옥 내가 짜증이 나는 측면도 그 점이에요. 아무리 영화가 별난 걸 다룬다지만 어떻게 평균적인 캐릭터가 하나도 없냐는 거지요. 영화 보고 나와서 ‘그 장면은 무슨 의미지? 그 줄거리의 숨은 의도는 뭐지?’ 생각하다가 원작을 찾아 읽고 싶어지더라고요. 자유분방한 로맨스 ‘베티 블루 37.2’(감독 장 자크 베넥스·1986)의 원작을 쓴 필립 지앙의 장편소설 ‘오…(Oh…)’가 원작이더군요. 영화가 좋아서 원작이 보고 싶은 게 아니라 영화가 하도 황당하니 원래 소설은 어떻게 묘사해 놓았는지가 궁금한.

신용관 그런데 이 영화가 골든글로브 외국어작품상도 받고, 프랑스 최대 영화상인 세자르 작품상을 받았다고 하네요. 거참.

배종옥 굳이 주제를 찾자면 현대인의 비뚤어진 성의식을 표현하고자 했다고나 할까요. 여러 비틀어진 관계, 그들의 성생활을 보여줌으로써. 하지만 설득력이 떨어져요. 미셸 앞집 부부만 해도, 남편의 잇단 강간 범행을 알게 된 아내가 미셸에게 자기 대신 남편을 상대해줘서 고맙다고 그러잖아요. 아무리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설정했다지만 너무 현실성이 떨어지는 거 같아요.

신용관 ‘엘르’를 두고 한쪽에선 ‘아이러니 가득한 페미니즘’을, 다른 쪽에선 ‘왜곡된 여성 혐오’를 읽어내고, 이와 맞물려 “다층적 해석을 가능케 하는 열린 결말의 영화”라고 치켜세우고 있기도 합니다. 나는 전혀 동의하지 않지만.(웃음)

배종옥 감독이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다루려다 이도 저도 아닌 영화가 된 거 같아요. 원작이 있는 영화는 통상 양극단으로 갈리거든요. 원작에서 쳐낼 건 쳐내고 무시할 건 무시하면서 큰 줄기를 갖고 가야 하는데, 까딱 전부를 영화에 녹이겠다는 유혹에 쉽게 빠지지요.

신용관 역시 폴 버호벤은 ‘로보캅’(1987)과 ‘토탈리콜’(1990)이 최고였어요. ‘원초적 본능’도 섹스스릴러 장르의 한 장을 장식했고. 어쨌든 내 별점은 ★☆. 한 줄 읽기는 “ ‘엘르’에 외국어작품상 준 골든글로브 집단 착란에 빠진 거 아니야?”

배종옥 나는 ★★. “도통 뭔 얘긴지…. 정말 그것이 알고 싶다.”

신용관 조선pub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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