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화
[2470호] 2017.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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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人] 아르헨티나 동포 영화감독 배연석

서울의 밤에 탱고가 내리는 곳, 내 영화가 시작된다

photo 이경민 영상미디어 기자
‘보름이는 학교를 가는 대신 아버지가 운영하는 봉제공장에서 매일 미싱을 돌린다. 보름이의 아버지는 아들에게는 모든 것을 투자하면서 딸의 교육은 관심이 없다. 기계처럼 매일 공장만 지키는 보름이는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가 어떤 곳인지 알지도 못한다.
   
   야채가게를 하는 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형식.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거리로 뛰쳐나온다. 양아치처럼 살던 그는 부잣집 아들을 혼내주려다 그만 살인을 저지르고 만다.
   
   바이올리니스트를 꿈꾸는 티나는 한 번도 한 곡을 끝까지 연주를 한 적이 없다. 도중에 꼭 실수를 하고 만다. 티나는 그것이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이 있다고 믿는다.’
   
   이들은 모두 아르헨티나 이민 1.5세대이다. 한국인도 아르헨티나인도 아닌 경계의 삶,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불안과 소외감은 이들을 절망으로 몰아간다. 영화 ‘아르헨티나여, 나를 위해 울어주나요?’(2005)의 줄거리이다. 영화 속 이야기지만 실제로 아르헨티나 동포들 중엔 수많은 ‘형식’과 ‘티나’가 있다. 이 영화를 만든 배연석(44) 감독도 그중 하나다.
   
   
   한국 속 아르헨티나로
   
   배 감독은 12세 때 부모를 따라 아르헨티나 이민 길에 올랐다. 이민 세대 청춘들의 삶을 다룬 영화는 그의 삶을 바꿔놓았다. 영화는 토론토국제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 마이애미국제영화제 등에 초청되면서 그의 이름을 세상에 알렸다. 한국에서는 2008년 독립영화관에서 상영됐다. 한국영화진흥위원회 시나리오 공모전에 응모했다 덜컥 대상을 차지하기도 했다. 특이한 이력으로 영화계의 관심을 끌었지만 그는 곧 사라졌다. 충무로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20여년 만에 돌아온 고국에서도 그는 역시 이방인이었다. 그리고 10년, 그가 다시 세상으로 나올 준비를 알렸다.
   
   배 감독을 만나기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갔다. 아르헨티나의 수도가 아니라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있는 레스토랑 ‘부에노스아이레스’이다. ‘멘도자 와인 코리아’가 운영하는 곳이다. 그는 이 회사의 홍보팀장으로 레스토랑 운영을 맡고 있다. 이곳에서는 아르헨티나의 문화를 판다. 엠파나다(구운 만두), 파리야다(모둠 고기 스테이크)와 같은 아르헨티나 전통 음식과 함께 매일 저녁 탱고 공연이 열린다. 이날도 탱고의 본고장 아르헨티나에서 날아온 프로팀이 한낮 더위보다 뜨거운 열기로 무대를 누볐다. 공연팀은 3개월 단위로 바뀐다고 한다. 음식을 먹으면 공연은 공짜다. 아르헨티나 관련 행사도 많이 열리고 남미 쪽 외교관들이 많이 찾다 보니 아르헨티나 문화원 역할을 하고 있다.
   
   “너무 빨리, 쉽게, 성공의 맛을 본 후 오만해졌어요. 세상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은데 어린 나이에 성공하면 안 되더라고요. 혼자서 만든 첫 영화가 그렇게 주목받을 줄 몰랐어요. 지금 그 영화를 보면, 어휴~ 얼마나 부끄러운지.”
   
   영화는 시나리오부터 편집, 촬영, 연출 모두 1인 작업이었다. 영화가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된 후 한국 활동 제의가 많아졌다. 그러나 막상 한국에 자리를 잡은 후 글을 쓸 수가 없었다. 그동안 그의 글쓰기는 자신의 경험을 소재로 한 것들이었다. 한동안 방황했다.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서는 한국에서 새로운 경험을 쌓아야 했다. 한국 속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자리를 잡고 10년, 그를 담금질하는 시간이었다. 그 경험을 그는 새로운 시나리오에 담았다. 하룻동안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 것으로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퍼즐로 엮었다. 이 외에도 구상 중인 시나리오가 몇 개 있다.
   
   “이젠 될 것 같아요. 시나리오가 좋으면 영화가 되는 거니까. 그걸 믿어야죠.”
   
   
   배수찬 야구감독의 아들
   
   그의 아버지는 유명한 야구선수였다. 한국 야구 초창기 ‘실업야구의 전설’로 불리던 재일동포 출신 배수찬(1937~1988). 포철·기업은행 감독을 거쳐 프로야구 출범 후엔 OB 베어스 2군 감독을 역임했다. 후배인 김성근 감독을 한국으로 끌어온 이다. 한창 선수로 날리던 시절 ‘일본에 있던 가족이 북송선을 탔다’는 이유로 정보당국에 끌려가 모진 고초를 겪었다. 그 후유증으로 선수생활을 그만둬야 했다. 은퇴 후 아르헨티나 이민을 선택했지만 잇단 사업실패 후 2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평생 이방인으로 살았던 셈이다. 그가 15세 때였다. 남은 가족은 일본으로 돌아갔지만 그는 아르헨티나에 남았다.
   
   그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이민 사회의 부적응자들이지만, 그는 달랐다. 공부도 잘했다. 스페인어 한마디 못하고 아르헨티나에 갔지만 2년 만에 반 1등을 했다. 학교에서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그러다 보니 스페인어도 빨리 익혔다. 혼자 남은 그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가족이 남겨놓고 간 이민 짐에 섞여 있던 한국 LP판이었다.
   
   “형이 모아놓은 LP판이 1000여장 있었어요. 음악평론가들이 곡에 대해 평론을 써놓은 속지가 들어 있었죠. 평론들이 고급 문장이잖아요. 국어사전 찾아가면서 평론을 열심히 읽었어요. 제 한국어 스승은 바로 음악평론가들입니다.”
   
   대학 입학 후 한국인들이 많이 다니는 성당에 다니면서 처음으로 교민사회를 경험했다. 그전까진 교류가 없었다. 아르헨티나 한인 이민 역사는 1965년이 시작이었다. 1970~1980년대 절정을 이루며 한때 4만명에 달했다. 이들은 무서운 생존력으로 유대인이 잡고 있던 섬유산업을 장악했다. 곳곳에서 성공신화가 들렸지만 이면에는 살인사건, 사기 등 어두운 그늘이 자리 잡고 있었다. 특히 그의 눈에 비친 이민 1.5세들의 모습은 흥미로웠다. 교민사회의 현실을 영화로 만들어 보여주고 싶었다.
   
   영화감독은 사실 형의 꿈이었다. 형 따라 영화 보러 다니다 그가 감독이 된 것이다. 대학에서 광고마케팅을 전공하고 다시 방송전문대를 들어갔다. 학교에 다니면서 방송국에 취업해 PD로 일했다. 2000년 전후 아르헨티나 경제가 추락할 때, 정작 그는 최고의 호황기였다. 한국 방송국들이 아르헨티나 경제를 취재하러 오면서 현지 촬영 코디네이터로 그를 찾아댔다. 그때 번 돈을 영화에 쏟아부었다.
   
   삶의 절반은 탱고의 나라 아르헨티나에서, 절반은 한국에서 살면서 두 문화를 겪은 그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그는 영화나 글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해왔는지 모른다. 시나리오든 소설이든, 그는 평생 글을 쓰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고 했다. 아르헨티나와 한국이 만나는 곳, 이곳에서 열정적인 탱고 리듬과 함께 다시 그의 영화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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