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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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나깨나 강다니엘’ ‘내 사랑 방탄소년단’을 외치는 아이돌 광팬들은 50년 전에도, 100년 전에도 있었다. 시골 5일장에 광대패들이 떴다 하면 구름처럼 팬들이 몰려들었다. 흙마당에 세워진 가설무대였지만 흥만큼은 잠실경기장 아이돌 콘서트 못지않았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장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광대들의 친구 김철호(71)씨도 그중 한 명이었다. 평생 광대들을 쫓아다닌 그의 ‘덕후질’은 요즘 세대들도 두 손 들 만큼 유난스럽다. 다시 태어나면 소리꾼이나 굿 무당이 되고 싶다는 그의 삶은 신명에 울고 웃는 광대와 다름이 없었다. 이 바닥 용어로 말하자면 ‘귀명창’이다. 광팬을 넘어 반 소리꾼을 이르는 말이다.

소년 시절 꽹과리, 북 장단이 그의 고향인 정읍 장마당을 휩쓸고 가면 소리 광대들이 뽑아내던 노랫가락이 입에서 저절로 흘러나왔다. 겨울 농한기가 시작되면 진한 화장의 젊은 기생들이 읍내 주막에 찾아들고, 저녁마다 걸쭉한 술판이 벌어졌다. 육자배기, 쑥대머리…. 얼쑤얼쑤 추임새와 어깨춤 들썩이는 사내들 사이에서 소리 뽑아내는 기생을 훔쳐 보던 그의 가슴도 콩닥거렸다.

소 판 돈 들고 야반도주

집에서 읍내 학교까지 왕복 10여㎞, 등하굣길 그의 길동무는 장마당에서, 주막에서 주워 들은 판소리였다. 면장 친구를 둔 아버지는 아들이 농고를 졸업하고 면서기가 되기를 바랐지만 뜻대로 되진 않았다. 아버지가 철석같이 믿고 있던 면장 친구가 돌연 세상을 뜬 것이다. 농고를 졸업한 그는 논밭으로 나갔지만 농사일이 영 손에 붙지 않았다. 기회가 왔다. 아버지가 기르던 암소를 팔았다. 송아지 두 마리를 살 돈이었다. 그중 절반인 1만5000원을 훔쳐 서울로 야반도주했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을 졸업하고 경향신문 기자로 들어가 MBC 해설위원으로 퇴직했다. 사회부·정치부 기자로 격동의 시대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틈만 나면 국악 공연장을 쫓아다녔다. 북 하나 놓고 청중들을 들었다 놨다, 혼을 빼놓는 소리의 매력에 본격적으로 빠져들었다. 관련 자료를 찾아 고서점을 뒤지고, 공연 뒤풀이에 끼여 광대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국악 이야기로 밤을 샜다. 광대들의 삶을 압축한 말이 있다. ‘북머리 10년, 산중 10년, 주유천하 10년’. 그들의 소리는 다름 아닌 삶을 토해낸 것이었다. 숱한 사연들이 소리 안에 숨어 있었다. 그들의 처절한 과거사를 들으며 손 붙잡고 눈물도 많이 쏟았다. 광대판 뒷이야기는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귀한 이야기였다.

‘덕질’을 넘어 설장구, 장단북, 가야금도 배우고 판소리도 배웠다. 조상현·김수연 명창 등이 그의 소리 스승들이다. 가야금을 가르쳐준 한 명창은 50년 한 몸이던 가야금을 그에게 남겨주고 은퇴했다. 북반주를 전수해준 스승은 타계하면서 40년 수족 같던 탱자나무 북채를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김청만 명인이 만든 전통타악대학에서 2년간 고수 수련을 받았다. 술자리나 모임이 있을 때면 어김없이 그는 흥겨운 소리꾼으로 변신한다. 동편제와 서편제를 넘나드는 국악 강의도 이어진다. MBC 퇴직 후 독립 프로덕션을 할 때는 회사 앞 단골 국밥집에 아예 북을 가져다 놓고 수시로 즉석 공연을 열었다.

광대판을 쫓아다닌 지 50여년, 그가 잊혀진 광대들을 다시 불러냈다. 우리 민족 신명의 원조는 광대들이다. 한류의 뿌리이다. 그들을 기록하는 일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생각하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광대들의 이야기를 책(‘광대, 타임머신을 타다’·이지출판)으로 엮어냈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에서 우수출판 콘텐츠로 제작지원을 받았다. 그의 삶에 흥을 주고 위로가 돼주었던 광대들에게 바치는 선물이다. 서울 종로구 흥선대원군의 사가인 운현궁에서 그를 만났다. 흥선대원군은 소문난 판소리 광팬이었다. 최초의 여류광대 진채선을 총애했던 대원군은 떠나간 그녀를 잊지 못해 눈물로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걸그룹·비보이 원조는 광대

“이유는 모르겠어요. 그냥 좋아요. 명창들이 어려운 대목을 죽 치고 올라가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요. 우리 민족의 정서인 한(恨)과 흥(興)을 표출하는 대표적 수단이 판소리입니다. 사실 한과 흥은 다르지 않습니다. 한이 흥이고 흥이 한입니다. 연희 속에서는 하나예요. 비보이·걸그룹의 태생적 뿌리가 바로 광대들입니다. 광대는 원래 비천한 직업이었지만 요즘엔 최고 스타가 됐잖아요. 그 이유를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는 ‘왜 판소리냐’는 ‘우문’에 숙제를 던지면서 한국인보다 더 판소리를 사랑한 아주 특별한 이방인의 이야기를 전했다.

“한국전쟁 참전 군인이었던 앨런 헤이먼(1931~2014)을 아십니까? 컬럼비아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헤이먼은 전쟁터에서 빨치산이 불어대던 태평소, 꽹과리 소리에 매료돼 한국에 귀화했습니다. 국악예술학교에 입학하고 임방울 국창에게 판소리를 배우고 국악 교수가 됐지요. 뉴욕 링컨센터, 카네기홀 공연을 주선하고 국악을 세계 무대에 알리는 일에도 앞장섰습니다. 선생은 생전에 우리 사회의 국악천시 풍조를 개탄했습니다. 우리 음악도 제대로 모르면서 어찌 남의 음악만 배우려 매달리느냐고요. 책을 내려고 하면서 헤이먼 선생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광대들의 삶과 예술은 바로 우리의 맨얼굴과 같은 것입니다.”

서른 살에 요절한 소설가 김유정은 당대 명창 박녹주(1906~1979)에게 혈서로 사랑을 구했다 퇴짜를 맞고 가슴에 품은 채 세상을 떠났다. 소설가 이효석의 임종을 지킨 이는 평양기생 왕수복(1917~2003)이다. 왕수복의 1937년 SP음반은 120만장이 팔리고 공연 때는 ‘오빠부대’를 몰고 다녔다. 왕수복은 이효석이 죽은 후 시인 노천명의 약혼자였던 김광진과 월북했다. 6·25전쟁 후에는 여성국극이 인기를 끌었다. 그중 남장을 맡았던 임춘앵의 공연이 있는 날은 기마경찰이 동원될 정도로 북새통이었다. 남자배우로 착각한 극성 여성팬들의 애정공세는 대단했다. 한 여배우는 팬의 요구에 못 이겨 남장을 한 채 가짜 결혼식을 올려준 일도 있었다. 아편에 의지해 고단한 광대 인생을 견딘 이들도 많았다. 도쿄 유학까지 다녀온 명고수 김명환(1913~1989)은 아편을 끊기 위해 교도소 앞에 가서 “투옥해달라”면서 생떼를 쓰기도 했다.

그가 우리 앞에 불러낸 광대들의 이야기는 소설보다 재미있다. 그는 국악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면서 말했다.

“누구나 마음속 깊은 곳에 뜨거운 울림을 기다리는 가야금을 한 대씩 지니고 삽니다. 마음속의 가야금, 심금(心琴)입니다. 심금을 울리는 소리야말로 예술의 한 경지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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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은순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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