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 로버트 스티븐슨. (우)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의 이상한 사건’ 초판
(좌) 로버트 스티븐슨. (우)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의 이상한 사건’ 초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놓고 끊임없이 갈등한다. 하지만 선악이 분별되지 않아 그러는 경우는 드물다. 거의 대부분은 선과 악을 확실히 분별한 경우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악(惡)이 우리 내면에 얼마나 끈질기게 작용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러한 우리 내면의 취약성을 인상적으로 파헤친 고전적 근대소설이 있다. 바로 로버트 스티븐슨(1850~1894)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의 이상한 사건’(Strange Case of Dr. Jekyll and Mr. Hyde·1886)이다. 오늘날 ‘지킬과 하이드’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고유명사라기보다 아예 대립적 자아를 가리키는 일반명사로 자리 잡았다.

스티븐슨은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당시 영국은 빅토리아 여왕 치세의 화려한 번영을 한껏 구가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위선과 가식도 독버섯처럼 무성했다. 그는 이러한 모순적 시대상을 배경으로 인간의 내면적 위선을 폭로한 소설을 잇따라 발표했다. 그중에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의 이상한 사건’이 그의 대표작이다.

일찌감치 ‘지킬과 하이드’는 친숙한 일상어가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이 소설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 또는 ‘지킬과 하이드’라는 축약된 제목으로 불리고 있다. 정작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의 이상한 사건’이라는 원제(原題)는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본래 어터슨이라는 변호사가 ‘이상한 사건’을 추적해 가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어터슨은 그의 사촌의 ‘이상한’ 경험담을 듣는다. 얼마 전 사촌은 밤거리에서 어떤 상해범(傷害犯)을 붙잡아 피해자에게 100파운드를 보상하도록 했는데, 상해범은 자신이 ‘에드워드 하이드’라고 말하면서 ‘헨리 지킬’이라는 서명이 들어 있는 수표를 내놓았다는 것이다. 순간 어터슨의 머리에 불길한 예감이 스친다. 지킬은 그의 오래된 고객이자 저명한 의사이다.

지킬은 얼마 전 어터슨에게 맡겨둔 유언장에 이상한 조항을 추가한 적이 있다. ‘지킬이 석 달 이상 종적을 감추거나 부재할 경우, 그가 소유한 모든 재산은 하이드가 상속받는다.’ 어터슨은 그동안 하이드에 대해 전혀 들은 바가 없었다. 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지킬은 막무가내로 유언장 변경을 고집한다.

어터슨은 지킬의 친구인 의사 래니언을 찾아간다. 래니언은 “지킬이 미친 과학이론에 심취했다”고 비난한다. 실제로 지킬은 요즘 자신의 실험실에 틀어박혀 무엇인가 심각한 실험에 골몰하고 있다. 래니언도 역시 하이드가 누군지 전혀 몰랐다. 어터슨은 사촌이 알려준 거리로 나가, 여러 날을 잠복한 끝에 드디어 하이드를 만난다. 하지만 하이드는 지킬과의 관계에 대해 일절 함구한다.

일 년가량 흐른 어느 날.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귀족 출신 의원인 유명인사가 런던의 밤거리에서 지팡이로 머리를 난타당해 참혹하게 살해된다. 목격자는 하이드를 범인으로 지목한다. 더구나 범행 도구로 사용되다가 부러진 지팡이는 어터슨이 오래전에 지킬에게 선물했던 것으로 밝혀진다. 또한 하이드의 집에서 부러진 지팡이의 나머지 반쪽 부분이 발견된다.

어터슨은 곧바로 지킬에게 달려간다. 그 사이 놀랍도록 늙어버린 지킬은 하이드가 그에게 보냈다는 편지를 내민다. 그것은 어디론가 영영 떠나겠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필적 감정 결과, 그 편지는 지킬이 쓴 것으로 밝혀진다. 더구나 하이드는 추가로 여섯 건의 살인을 더 저지른 것으로 드러난다. 경찰은 지킬의 집을 에워싸고 감시한다.

이때 래니언은 지킬의 갑작스러운 전갈을 받는다. 지킬은 래니언에게 자신의 실험실에 가서 어떤 서랍을 통째로 래니언의 진료실로 가져다 놓으라고 간청한다. 래니언은 투덜대면서도 친구의 약속을 들어준다. 서랍에는 약들이 어지럽게 담겨 있다. 약속시간이 되자, 작은 체구의 괴상한 사내가 들이닥친다. 순간, 래니언은 그가 하이드임을 직감한다.

그는 심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이를 갈며 비틀거린다. 그는 가까스로 약을 몇 가지 혼합하여 마신다. “사내의 눈동자는 눈두덩이 안에서 위로 돌아갔고… 경련을 일으키며 머리가 좌우로 흔들렸다.” 그러더니 사내는 이내 지킬로 변한다. 래니언은 깜짝 놀라 “그 사내와 자네는 한 사람이군!”이라고 외친다. 지킬은 저간의 사정을 고백한다.

처음에 지킬은 하이드로 변했다가, 자기 뜻대로 지킬로 돌아왔다. 그러나 차츰 하이드의 존재가 커져서 지킬로 돌아오는 것이 점점 힘들어졌다. 본래 ‘숨는다(hide)’라는 발음을 가진 하이드(Hyde)는 더 이상 고분고분 숨지 않았다. 급기야 하이드는 아무 때나 제멋대로 등장하게 되었다. 마침 그가 지킬로 돌아와 보니 경찰이 그의 집을 포위하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 하이드가 튀어나올지 몰라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래니언을 찾은 것이다.

지킬과 래니언은 이 일을 비밀로 하기로 약속한다. 래니언은 이러한 사정을 자세히 적어 어터슨에게 보내며, 자신이 죽은 뒤에 열어 보라고 부탁한다. 얼마 후 래니언이 죽자, 그의 서신을 꺼내본 어터슨은 곧바로 지킬에게 달려간다. 최근에 지킬은 연구실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가자, 어두운 골방에서 누군가 비틀거리며 쓰러져 죽는다. 자세히 보니, 얼굴은 하이드이고 몸은 지킬이다.

지킬은 쾌락을 탐닉하면서도 도덕적인 삶을 살고자 했다. 그리하여 자신이 만든 약을 먹고 하이드로 변신해 욕망을 맘껏 발산하고 다시 지킬로 돌아오곤 했다. 그러다가 하이드는 차츰 지킬의 통제를 벗어나 제멋대로 행동하게 되었다. 이럴 때마다 점점 더 많은 양의 약이 필요했다. 결국 지킬은 실험실을 벗어나지 못한 채 ‘이상한’ 모습으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악은 선보다 훨씬 더 충동적이고 활동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악행도 불사하며, 그로 인해 죄의식에 시달리게 된다. 이때 가장 쉽게 떠오르는 해결책이 선과 악의 ‘분리’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리’는 오히려 악에 자유를 제공할 뿐이다. 이를 통해 고삐 풀린 악은 자신만의 증식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존재 기반 자체를 파괴한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의 이상한 사건’에서 주인공은 ‘약’을 먹고 선악을 넘나든다. 그러나 일상 속의 우리는 ‘약’을 먹지 않고도 얼마든지 선악을 넘나들고 있다. 우리야말로 소설 속의 주인공보다 훨씬 더 위험한 존재이다. 그럼에도 이런 사실을 외면한 채 자신이 절대로 옳다고 강변하는 사람이나 세력이 적지 않다. 절대선은 절대 타락하게 마련이다.

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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