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화
[2475호] 2017.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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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人] 요르단 왕실 그릇 만든 재독작가 이영재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차장대우
독일 쾰른 성 베드로 성당은 또 다른 이름이 있다. 쿤스트 스타치온(Kunst-Station), 예술정거장이라는 뜻이다. 프랜시스 베이컨, 아니쉬 카푸어, 신디 셔먼 등 세계적인 작가들의 전시회가 열리고 수시로 음악회가 열린다. 의자도 평소엔 치워놓는다. 5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성당에 들어서면 텅 빈 공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흰 돌로 만들어진 제대이다. 어느 성당에서나 볼 수 있는 반듯한 제대가 아니라 추상 조각 같다. 현대조각의 거장으로 불리는 에두아르도 칠리다(1924~2002)의 작품이다.
   
   미사 때마다 이 제대에 올라가는 성작(聖爵·포도주를 담는 잔)이 독특하다. 허리가 잘록한 서양의 와인 잔 모양이 아니다. 동글납작 우리나라 막사발을 닮았다. 어떻게 독일 성당에서 한국식 도자기 잔을 사용하게 됐을까. 성당을 현대미술의 성지로 만든 사람은 프리델름 메네케스 신부이다. 예술사를 전공하고 요세프 보이스 등 예술가 친구가 많다. 칠리다의 제대도 그의 아이디어였다. 바티칸 교황청으로서는 못마땅한 일이었다. 파격적인 제대를 설치하는 대신 교황청이 내건 조건은 ‘제대에 금잔도 은잔도 놓지 말라!’였다. 해답을 찾지 못하던 신부의 고민을 해결해 준 사람은 재독 동포 이영재(66) 도예작가였다.
   
   독일 에센 졸버레인 탄광지대는 1970년대 초 우리나라 파독 광부 8000여명이 젊음을 바친 곳이다. 1986년 폐광이 된 후 200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라인강의 기적을 만든 역사는 이제 박물관에 전시된 채 세계 관광객을 만나고 있다. 졸버레인과 멀지 않은 곳에 ‘생활 속 예술’을 부르짖었던 바우하우스 정신을 잇는 도자기 공방이 있다. 1919년 출발, 독일의 대표로 자리 잡은 ‘마가레텐회에 공방’이다. 유서 깊은 공방의 대표가 바로 이영재 작가이다. 마가레텐회에는 ‘들국화 꽃이 피는 언덕’이란 뜻이다. 1972년 독일로 건너간 그는 이곳에서 30년 동안 물레를 돌리며 독일의 실용주의에 한국의 정신을 담아 생활자기를 빚고 있다.
   
   그는 독일 최고의 도예작가로 꼽힌다. 뮌헨 현대미술관(모던 피나코텍)에서는 동양인 최초, 도예가 최초로 대규모 초대전을 열었다. 미술관 꼭대기 유리천장으로 빛이 들어오는 전시관 바닥에 1111개의 크고 작은 사발을 뿌려놓은 전시는 독일 미술계에 충격이었다. 내년에는 유럽 최대 갤러리 중 하나인 칼스텐 그레브 갤러리에서 도자기작가로는 처음으로 초대전을 연다. 공예미술을 순수미술의 위치로 끌어올린 것이다. 독일에서 공예는 순수미술과는 괴리가 컸다. 특히 개념미술이 현대미술의 중심 무대를 활보하는 동안 기술에 치중한 도자기는 작품이 아닌 상품으로 취급받았다. 그는 가장 쓰임이 많은 그릇으로 ‘생활이 예술’이고 ‘삶이 예술’임을 증명해 보였다.
   
   “난 싸움쟁이예요. 손으로 구겨놓은 종이도 예술이 되는 시대잖아요. 예술은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규정 짓는 세상을 향해 진짜 예술이 뭔지 묻고 싶었습니다. 40년 동안 그 싸움을 벌여왔어요.”
   
▲ 이영재 작가가 대표로 있는 독일 에센의 ‘마가레텐회에’ 공방.

   지난 9월 11일 전시를 위해 한국을 찾은 이영재 작가가 말했다. 9월 6일 대구 신세계갤러리를 시작으로 광주(9월 13일~10월 10일), 부산 센텀시티(11월 7~26일)에서 전국 순회 전시 중이다. 전시를 앞두고 설치 작업이 한창인 광주 신세계갤러리에서 그를 만났다. 흰색, 감색, 청색 등 6가지 색깔의 크고 작은 사발, 항아리, 접시가 갤러리 바닥에 펼쳐져 있었다. 하나같이 담백한 것이 군더더기가 없다. 부드러운 사발의 곡선은 한국의 선을 닮았다. 막사발 두 개를 엎어놓은 듯한 달항아리는 바람에 붕 뜬 한복의 치맛자락을 연상시킨다. 1과 1이 더해져 1이 되는 달항아리는 분단 조국의 하나됨을 염원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1000번의 유약 실험을 거쳐 찾아냈다는 그릇의 빛깔은 은은하면서 깊었다. 1350도 이상의 고열에서 구워내 가볍고 견고하다. ‘아름다움보다 기능에 충실한 그릇이 부엌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이 그의 공방의 철학이다. 그는 ‘보고 감상하는 도자기가 아니라 식기세척기에 돌려도 끄떡없는, 생활 속에서 쓰임이 있는 도자기가 진짜’라고 믿고 있다. 그는 ‘쓰임’이라는 단어를 여러 번 강조했다.
   
   “쓰임에 충실한 한국 도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습니다. 우리 막사발은 쓰임에 따라 다양하게 만들어지며 발전해왔습니다. 예술은 그것이 무엇이든 시대에 맞게 항상 재해석돼야 합니다. 그걸 가장 정확하게 말해준 최고의 철학이 다산 정약용의 실학입니다.”
   
   
▲ ‘들국화 핀 언덕’이란 뜻을 가진 ‘마가레텐회에’ 공방 입구.

   한국 도자기는 ‘쓰임’의 철학
   
   그는 한동안 한국을 찾기가 두려웠다고 말했다. 그의 도자기는 독일에서도 한국에서도 이방인이었다. 독일에서는 한국 도자기라고 했지만, 한국에서는 독일 도자기라고 할 것이었다.
   
   “무서워서 한국에 못 왔어요. 도자기의 본고장에 웬 독일 도자기를 들고 왔느냐고 야단맞을까봐.”
   
   그는 2002년에야 용기를 냈다. 갤러리현대 초대로 한국 첫 전시를 열었다. 한국을 떠난 지 30년 만이었다. 그가 독일로 건너간 것은 어머니의 결단이었다. 이북 출신인 어머니는 당시 대학을 졸업한 인텔리였다. 아이들이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길 바랐던 어머니는 파독 간호사를 지원, 3남매의 손을 잡고 독일 비스바덴으로 떠났다. 수도여자사범대에서 생활미술학과를 마친 그는 비스바덴미술대학에 들어가 도자기와 디자인을 전공했다. 그런데 독일의 도자기는 너무 기술 중심이었다. 순수미술계에서는 공예를 인정하지 않았다. 도대체 회화, 조각이 뭐기에. 그는 하이델베르그대학에 다시 들어가 서양미술사부터 시작해 동양미술사에 빠졌다. 공부 끝에 건져낸 화두가 ‘쓰임’이었다. 바우하우스의 정신도 우리의 막사발도 결국 ‘쓰임’으로 이어져 있었다.
   
   쾰른 성베드로 성당의 사발 모양 성작도 ‘쓰임’의 철학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메네케스 신부로부터 제작 의뢰를 받고 처음엔 거절했다. 길쭉한 서양 잔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어느 날 할머니가 새벽이면 정한수 떠놓고 빌던 사발이 떠올랐다.
   
   “토속신앙이든 하느님이든 신을 위한 간절한 마음은 같잖아요. 신부님께 사발 모양 성작을 만들겠다고 말했죠. 한국의 토속신앙이 담겨 있는데 괜찮냐고 여쭤 보니 좋다고 하세요. 매주 성당에 가서 신부님 손을 보고 쓰임을 고민했습니다.”
   
   크고 작은 사발 모양의 성작 777개를 만들어 공방 바닥에 진열해놓고 메네케스 신부를 불러 고르도록 했다. 독일에서 까다롭기로 유명한 미술평론가 바바라 카투와가 함께 왔다. 쓴소리 많이 하는 바바라 카투와가 “내가 본 어떤 전시보다 아름답다”며 감탄했다. 그때의 경험이 뮌헨 현대미술관 ‘1111’ 전시로 이어졌다.
   
   
▲ 기능에 충실한 그의 도자기가 쓰인 식탁. photo 신세계갤러리

   독일 가정의 3대가 쓰는 그릇
   
   그의 그릇을 사 모으는 컬렉터 중에는 골수 팬들이 많다. 요르단 왕실도 주요 고객이다. 연극계의 뒤샹이라 불리는 미국의 무대연출가 로버트 윌슨은 그의 첫 전시 때부터 팬이 됐다. 독일 공연과 맞물려 전시가 있을 때는 작품이 설치되기도 전에 빨간 딱지(판매 완료)를 붙이고 사라지곤 한다. 독일 제국의 바이에른 왕족 후손인 헤르촉 프란즈 폰 바이에른의 집에도 그의 그릇이 진열돼 있다. 바이에른은 독일 최고의 미술 컬렉터로 뮌헨 피나코텍 미술관이 그의 기증 작품으로 채워져 있다고 한다. 일본에서도 ‘한국 여성이 바우하우스 공방에서 만든 생활자기’로 유명하다. 3대가 쓰는 집도 많다. 할머니부터 그의 그릇을 사온 집에서는 가톨릭 영세를 받는 손자의 대모가 되어 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했다.
   
   지난 봄 그는 아주 의미 있는 전시를 했다. 한 수도원이 독특한 형태의 갤러리를 만들었다. 까만 상자 모양의 공간이었다. 천장부터 바닥까지 수직 유리창이 마치 천장에서 물결이 내려오듯 사방 벽을 채우고 있었다. 창을 통해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갤러리 측에서는 오픈 전시를 위해 회화작가들을 섭외했다. 그런데 전시를 약속한 작가들이 공간을 본 후 전부 “못 하겠다”며 돌아갔다. 공간 자체가 자연이 만든 작품이었다. 공간 때문에 그림이 죽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갤러리가 구원투수로 찾은 사람이 그였다. 은은한 빛깔의 그의 도자기는 창을 통해 들어오는 자연과 환상적으로 어울렸다. 공간도 살고 작품도 살았다. 이 전시는 ‘생활 속 예술’을 부르짖은 ‘40년 싸움’에 대한 대답이었다. 그 싸움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그의 피에 흐르는 한국의 정서였다.
   
   ‘쓰임’의 예술만큼 그의 삶은 소탈하다. 한국을 찾을 때면 대학교 앞 분식집에 가서 5000원짜리 밥을 먹으며 ‘최고’라고 손가락을 치켜든다. 회색을 유난히 좋아해 옷장에 회색 옷이 가득한 그는 한국에 올 때면 동대문으로 달려간다. 우리나라 회색 빛깔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면서 천을 끊어 근처 바느질 가게에 옷을 맡기곤 한다. 지금도 매년 메주를 가져다가 독일에서 직접 된장을 담가 먹는다는 그가 말했다.
   
   “오늘의 나를 만든 것은 그리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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