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구멍가게는 어디에나 있다. 주인집 아들로 보이는 형제가 카메라를 든 이방인을 신기한 듯 바라본다.
골목 구멍가게는 어디에나 있다. 주인집 아들로 보이는 형제가 카메라를 든 이방인을 신기한 듯 바라본다.

아침저녁으로 한기가 느껴지는 완연한 가을이다. 필자가 실크로드의 고도 부하라(Bukhara)를 방문한 때는 35도를 오르내리는 기온에 살을 찌르듯 내리쬐는 햇살이 따가운 여름.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에서 중앙아시아 최초의 고속철 아프라시압(Afrosyab)을 타고 최고시속 220㎞로 달리면 사마르칸트까지 300㎞를 2시간20분 정도에 닫는다. 버스로 11시간이나 걸리던 종착역 부하라까지도 3시간 남짓에 주파하니 세상 참 좋아졌다.

이번 여행은 세계실크로드대학연맹(SUN·세계 75개 회원 대학으로 구성, 본부는 서울 한국외국어대학)이 주관하는 실크로드 중앙아시아 지역을 탐사하는 것이다.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의 실크로드 유적을 돌아보고 카자흐스탄국립대학에서 열리는 실크로드 학술대회 참관이 목적이다. 짧은 기간 여러 도시와 유적을 만났는데 부하라는 오아시스다운 모습을 가장 온전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부하라를 흔히 지붕이 없는 박물관이라고들 한다. 그만큼 도시 전체가 유적이다. 19세기에는 대상(隊商)들이 머물던 숙소인 카라반사라이가 38곳이나 되었다니 대상의 규모와 도시의 크기가 짐작이 간다. 교역장 6곳, 공중목욕탕이 16곳, 시장이 45곳이나 되었다니 도시 전체가 시장이나 다름없다. 200개가 넘는 모스크가 광고풍선을 띄운 듯 하늘을 향해 솟아 있고, 이슬람 신학교인 마드라사가 무려 100곳이나 있었다고 하니 중앙아시아 최대의 이슬람교 중심지다. 46m 높이로 우뚝 솟은 첨탑으로 유명한 칼란 미노르와 칼란 모스크는 아직도 건재한 대표적 사원 건축이다. 중앙아시아 최고의 첨탑인 칼란 미노르는 1172년에 지어졌는데 꼭대기에 불을 지펴 사막의 등대 역할을 했다고 하며 몽골의 침입 때도 파괴되지 않고 남았다.

낙타는 간데없고 고속철 관광객 맞는 카라반사라이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10세기 건축물 아스마일 샤마니 묘는 놀이공원 한가운데 있다. 화려한 색의 타일을 쓰지 않고 18종류의 구운 벽돌로 지었다. 벽 두께가 2m나 되는데 특별한 단열재가 없던 시기에 더위와 추위를 차단하는 지혜가 엿보인다. 낙타 젖으로 반죽해 만든 흙벽돌의 견고함은 천년을 단단하게 버텨온 것으로 증명된다. 또한 벽돌 쌓기의 온갖 다양한 기법과 아름다운 조형미에도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 밖에도 2400년 전의 고성 아르크성의 위용 등 유적과 볼거리는 지천이다.

곳곳에 옛 카라반사라이를 깔끔하게 복원한 레스토랑이 낙타 대신 고속철도와 자동차를 타고 온 여행자를 맞이한다. 기숙 신학교 같은 개념의 마드라사 가운데 일부는 깔끔하게 복원되어 상가와 레스토랑으로 변신했다.

부하라 중심가 대상들의 숙소였던 라비 하우스는 1477년에 심었다는 거대한 뽕나무가 아직도 남아 있다. 밤이 되어 선선해지면 못 주위 뽕나무 고목 아래는 초대형 레스토랑이 차려진다. 이곳을 중심으로 인근에 부하라 구시가의 시장통이 있다.

그리스식 샐러드에 잘게 썬 양고기와 함께 볶은 기름밥 ‘플럽(Plov)’은 우리 입맛에도 아주 잘 맞았다. 숯불로 구워낸 양고기 ‘샤슬릭’은 누린내가 전혀 나지 않았고 연한 육질이다. 맑은 육수에 토마토와 감자, 콩과 함께 소고기완자를 띄우고 소면을 말아내는 ‘오시옷’(오시는 수프, 옷은 밀을 뜻하는 타지크어)은 그냥 고급 잔치국수다. 해장국으로도 손색없을 정도로 담백한 별미였다. 만두와 사촌 격인 ‘만티’는 모양도 맛도 이북만두와 같았다. 이밖에도 말 창자에 내장을 넣어 만든 순대와 토마토, 완두콩과 당근을 고기와 함께 끓인 고기수프 ‘듬라마’도 좋다.

화덕 속에 붙어서 구워지고 있는 빵. 요즘은 나무를 때는 곳은 없고 가스불을 쓴다.
화덕 속에 붙어서 구워지고 있는 빵. 요즘은 나무를 때는 곳은 없고 가스불을 쓴다.

그런데 사실 우즈베키스탄 전통음식이 대부분의 중앙아시아와 중국, 중동 국가들이 먹는 음식과 유사하여 어느 나라 음식이라고 하기보다는 비슷한 문화권의 음식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았다. 일조량이 풍부한 이곳은 당도 높은 과일과 신선한 채소에 치즈를 곁들인 샐러드가 일품이다. 예나 지금이나 다양한 문화의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어서인지 음식은 특별히 거부감을 느낄 만큼 자극적이거나 강한 향이 없다. 필자가 방문했던 6월은 수박과 멜론이 제철인데 꿀맛이라고 하는 게 바로 이 맛을 두고 하는 것 같았다.

한낮의 햇살도 피하고 광선이 좋을 때 사진을 찍을 요량으로 부하라 뒷골목으로 아침 산책을 나갔다. 종일 달궈져 뜨거웠던 대지가 밤새 식어서인지 청량감이 든다. 집 앞에 내어 놓은 등받이 없는 긴 의자에 3대가 함께 나란히 앉아 해맞이를 하는 할아버지와 아들 손자, 포도넝쿨 아래서 아침 수다를 떨고 있는 동네 아주머니들과 유모차에 손주를 태우고 마실 나온 할머니들, 빗자루와 부삽을 들고 골목 청소를 나온 철부지 형제, 집 앞 골목길에 세숫대야로 물을 뿌리는 아저씨…. 새마을노래가 나오는 청소차만 지나가면 우리나라의 옛 시골 풍경과 별반 다를 게 없다.

동네 골목에서 옛 소련 시대에 만들어진 연식이 제법 오래된 라다(Lada·러시아말로 돛단배) 자동차를 흔하게 볼 수 있다. 낡은 차여서 그런지 낙타가 주요 교통수단이던 시절의 고대유적 앞에 세워져 있어도 어쩐지 잘 어울린다. 이탈리아 피아트와 합작으로 생산한 모델이라 피아트 DNA가 디자인에 묻어 있다. 1970년대 우리나라에 들어왔던 피아트124 모델이 연상된다.

말끔하게 수리해 레스토랑으로 이용되는 카라반사라이가 있는가 하면 그냥 폐허가 되어가는 곳도 있다. 그 규모를 보면 대상들의 규모가 짐작이 된다.
말끔하게 수리해 레스토랑으로 이용되는 카라반사라이가 있는가 하면 그냥 폐허가 되어가는 곳도 있다. 그 규모를 보면 대상들의 규모가 짐작이 된다.

다국어 통역과 중개무역의 달인 유대인과 소그드인

동네 곳곳에 오래된 건물이다 싶어서 다가가 보면 영락없는 마드라사 유적이다. 건조한 사막기후이다 보니 흙벽돌 건축물인데도 수세기가 지난 현재까지 비교적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옛 부하라 사람들의 벽돌 축조 기술과 다양한 기법은 건축가가 아닌 필자의 눈에는 세계 최고 수준으로 보였다. 골목은 낙타와 말과 같이 드나들어서인지 우리네 골목에 비해서는 아주 넓은 편이고 건축 재료로 나무와 흙벽돌이 주로 사용되었는데 뉴멕시코의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집인 아도비 하우스(Adobe House)와 양식이 아주 흡사했다. 나무 들보가 벽 밖으로 삐져나와 있는 평지붕 구조에 진흙과 벽돌이 주 자재인 것까지 빼닮았는데 아마도 두 지역 모두 사막기후인 것도 관련이 있을 것 같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부하라에도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모여 살았던 동네가 있다고 한다. 고대부터 유대 상인들은 동서를 잇는 장거리 교역에 적극적으로 활약했다. 당나라 기록에는 유대 상인들이 아랍어·페르시아어·라틴어·프랑크어·안달루시아어·슬라브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고 한다. 이들은 지중해에 근거지를 두고 인도와 중국을 다니며 사향, 침향, 장뇌, 계피 등 동방의 산물을 가져와 유럽 여러 도시에 팔았다. 중국과 페르시아 사이에서 활약했던 소그드(Sogd)인들과 닮은꼴이다. 소그드인들은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제프리샨강 유역에 살면서 동서교역에 종사한, 상술과 언어에 뛰어난 이란계 민족이다. 이들이 중국은 물론 신라에까지 드나들었다는 주장도 있다. 유대인과 소그드인들은 실크로드를 누비면서 중개무역과 다국어 통역을 했던 뛰어난 장사꾼들인 것이다.

소그드인의 대표 유적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사마르칸트의 아프라시압궁전 벽화가 있다. 이 벽화에 등장하는 인물 중 고구려 특유의 복식인 깃털이 달린 조우관(鳥羽冠)을 쓰고 손잡이 끝에 둥근 고리가 달린 큰 칼을 찬 사신 그림이 한반도와의 교류가 있었음을 말한다. 소그드인의 유전자에 탁월한 언어 능력이 있는지 현재도 우즈베크어, 러시아어, 타지크어에 영어, 한국어까지 구사하는 언어의 달인들을 흔히 만날 수 있다.

못 주변을 돌아가며 차려진 거대한 야외 레스토랑은 밤이면 자리가 없을 정도다. 나방, 모기, 하루살이가 없는 것이 생소했다.
못 주변을 돌아가며 차려진 거대한 야외 레스토랑은 밤이면 자리가 없을 정도다. 나방, 모기, 하루살이가 없는 것이 생소했다.

화덕에서 구워낸 담백하고 쫀득한 아침빵

아침 식탁에 빠지지 않는 둥근 빵은 진흙 화덕 탄디르에서 굽는다. 물과 소금과 약간의 이스트를 넣고 반죽해 숙성한 담백하고 고소한 맛이 일품인 통칭 넌(Non)이라고 불리는 크고 둥근 빵이다. 특히 아침에 먹는 노니찹착(Noni Chap Chak)이라고 하는 빵은 얇은 큰 접시만 하고 참깨를 솔솔 뿌려 놓았다. 화덕에서 구워낸 다음 목화씨 기름이나 해바라기씨 기름을 살짝 발라 반들반들 윤기를 낸다. ‘노니’는 빵이라는 뜻이고 ‘찹착’은 붙는다는 뜻인데 손으로 빵을 뜯어먹을 때 얇은 빵이 납작하게 속이 달라붙는 현상 때문에 그렇게 불린다고 한다.

부하라 뒷골목 18세기 대저택 유적의 담벼락에 붙여서 지은 작은 빵집 ‘아미리 넌(Amiri Non)’. 짧은 머리를 한 젊은 아버지가 초등학생 어린 딸과 함께 이른 아침부터 빵을 굽는다. 화덕 속으로 머리를 디밀어 화덕 내부에 반죽을 붙이고 다 구워진 빵을 꼬챙이로 떼어내는 작업을 해야 하니 그의 얼굴도 열기로 빵처럼 벌겋게 익었다. 티셔츠는 온통 땀으로 젖었고, 시큼한 빵 반죽 냄새와 함께 치열한 삶의 현장임을 웅변한다. 아버지가 구운 빵을 포대에 담아 자전거로 배달을 가는 어린 딸은 유난히 둥글고 큰 코가 아버지를 빼닮아서 영락없는 국화빵 부녀다.

손발이 척척 맞는 부부 빵집. 역시 화덕 담당은 남편의 몫. 긴 쇠꼬챙이로 다 익은 빵을 꺼낸다.
손발이 척척 맞는 부부 빵집. 역시 화덕 담당은 남편의 몫. 긴 쇠꼬챙이로 다 익은 빵을 꺼낸다.

땀을 뻘뻘 흘리며 정신없이 촬영을 하고 나니 빵 두 개를 내민다. 빵값을 내려고 하니 그냥 주는 것이라며 손사래를 친다. 갓 구워낸 빵처럼 따뜻한 인심이다. 문 밖에까지 따라나와 배웅을 하는 부녀를 뒤로하고, 숙소로 돌아와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 일행에게 빵을 내밀었더니 한국에서 가져온 컵라면을 제쳐두고 빵으로 달려든다. 다음날도 호텔에서 가까운 넓은 대로변에서 유쾌한 총각 넷이서 하는 빵집을 쉽게 만났다. 셋이 빵을 만들고 한 명은 배달을 맡아 했다. 숙성된 반죽을 떼어 흡사 투포환 정도 크기로 동글동글 뭉치는 1단계, 얇고 동글납작하게 펴서 가운데를 참빗처럼 생긴 쇠로 만든 도구로 무늬를 찍은 다음 참깨를 둘러 뿌리는 2단계, 세 번째는 완성된 반죽을 동그란 방석 모양의 쿠션에 얹어서 화덕 내벽에 붙인다. 당연히 세 번째 단계를 맡은 친구가 핵심이고 붙였다 떼어내고 가스불 조절까지 하는 제빵 기술자다. 이 집에서 빵 두 개를 사서 맛을 봤는데 역시 겉은 바삭하고 고소하고 속은 촉촉하고 쫀득한 것이 예술이다.

빵집은 아침 일찍 빵을 사러 오는 부지런한 동네 아주머니와 심부름으로 온 어린이까지 붐빈다. 빵 만들기 바쁘니 비닐봉투에 담아 가는 것은 손님들 몫이다. 가장 어린 티 나는 직원은 갓 구워낸 빵을 손수레에 실어 어디론가 배달을 나간다. 고소한 빵 냄새와 시큼한 밀가루 반죽 향에다 화덕을 맡고 있는 청년의 땀 냄새까지 더해 빵 가게는 열기와 냄새로 가득하다. 지름이 약 30㎝ 정도 되는 빵 1개에 1000숨(Sum·약 150원)이니 굽는 이가 흘리는 땀이 미안할 정도로 싼값이다.

라비 하우스 옆의 마드라사. 조명을 받은 밤 풍경이 신비감을 더한다.
라비 하우스 옆의 마드라사. 조명을 받은 밤 풍경이 신비감을 더한다.

음식은 만드는 옆에서 바로 먹어야 제맛

이 골목 저 골목길을 누비다 운 좋게도 빵 냄새를 따라 골목 깊이 들어가게 되었는데 한 지붕 밑에 빵집이 두 개 있는 게 아닌가. 한 집은 부부가, 다른 집은 남자 둘이서 빵을 굽는다. 납품을 하는지 제법 양이 많아 보인다. 빵에 찍는 문양은 빵집마다 다른데 맛과 크기는 비슷했다. 빵 맛이라는 게 별거던가. 물과 소금이 특별할 리 없고, 밀가루와 발효 기술, 화덕과 불 조절에 특별한 노하우가 있는 것인가. 아니면 뭣 때문에 맛이 특별한가. 제사에 올릴 전을 부치는 어머니 옆에 쪼그려 앉아 손으로 집어 먹던 부침개 맛처럼, 즉석에서 뜯어먹어서 그런가. 버터나 잼도 바르지 않고 그냥 맨 빵을 먹어도 무심하게 계속 손이 가는 그런 중독의 맛.

아주 오래전 처음 방문했던 파리에서 이른 아침 금방 구운 바게트를 사들고 선배 집으로 아침을 먹으러 갔던 적이 있었다. 입천장을 찌르는 바삭한 껍질과 고소하고 쫄깃한 맛이 생각난다. 그 식감의 빵을 뛰어넘는 맛을, 기대하지도 않았던 중앙아시아 한가운데 고도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그것도 거의 공짜나 다름없는 싼값에 이런 맛이라니. 여러 나라에서 온갖 빵을 먹어봤지만 이게 바로 횡재 아니겠는가.

밀가루가 특별한가 아니면 빵 만든 역사가 오래여서인가? 1만~2만년 전인 신석기 유적에서 밀이 발견된다니 밀은 재배 역사가 오랜 작물이다. 원산지도 중앙아시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코카서스 남부 아르메니아 지방이라고들 추정한다니 이 지역은 오래전부터 밀을 재배해서 먹었던 것 같다.

기원전 2000년경에 벌써 오븐 안쪽에 반죽을 붙여 직접 구웠다고 한다. 진흙 오븐에서 구워낸 이곳 빵은 오랜 역사만큼이나 축적된 기술의 산물임에 틀림없다. 좋은 밀가루를 얻기 위해서는 제분 기술도 필수인데 풍부한 물을 이용해 물레방아를 돌려 뽕나무 껍질을 빻는 사마르칸트의 제지공장에서처럼 수력을 이용한 제분소가 있었을 것으로 막연한 짐작을 해본다.

우즈베키스탄 여행을 계획하시는 분들께는 아침 일찍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볼 것을 추천한다. 사람 사는 냄새를 맡으며 인적 드문 유적도 둘러보고, 싸고 맛있는 빵 ‘노니찹착’을 뜯으면 절로 입꼬리가 올라간다.

대저택 유적에 붙여서 지은 빵집 ‘아미리 넌’. 거슬리지 않는 작고 소박한 간판을 붙였다.
대저택 유적에 붙여서 지은 빵집 ‘아미리 넌’. 거슬리지 않는 작고 소박한 간판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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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특집 Ⅲ
조의환 디자이너·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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