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 알렉시스 드 토크빌. (우) 미국의 민주주의 제1·2권.
(좌) 알렉시스 드 토크빌. (우) 미국의 민주주의 제1·2권.

우리는 오래전에 민주화를 달성했다. 하지만 민주주의 없는 민주화 상태가 무작정 지속되고 있다. 요즘은 아예 정부가 나서서 촛불 민주주의를 독려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이처럼 우리는 민주화를 과식하면서도 정작 민주주의는 제대로 향유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기형적 현실에 대해 상당한 시사점을 던져주는 묵직한 고전이 있다. 바로 알렉시스 드 토크빌(1805~1859)의 ‘미국의 민주주의’(De la dmocratie en Amrique·제1권 1835, 제2권 1840)이다. 이 책은 당시 미국에서 전개되던 민주주의의 양상을 주의깊게 관찰한 현장보고서이다. 하지만 시대를 뛰어넘어 민주주의의 본질을 예리하게 포착한 것으로 유명하다.

토크빌은 프랑스 귀족 가문 출신의 사상가요 정치가이다. 그의 가문 중 다수가 프랑스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기요틴의 제물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도 처형 직전에 로베스피에르의 실각으로 어렵사리 목숨을 건졌다. 토크빌은 이처럼 기구한 시대적 트라우마를 몸에 지닌 채 태어났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응시하며, 그것의 본질을 이해해 보려고 발버둥쳤다.

19세기 초반 프랑스는 혁명의 여파로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그는 가문의 후광으로 관리가 되었으나, 그것은 그에게 별로 매력적이지 못했다. 감수성 예민한 귀족 청년이 이런 격동기에 무심하게 관직생활에만 몰두하기 어려운 노릇이었다. 1831년 그는 적당한 구실을 둘러대고 미국으로 향했다. 당시 미국은 희망이 꿈틀대는 미지의 땅이었다.

그는 절친한 친구와 더불어 9개월 동안 미국을 두루 여행하며 미국의 정치·사법·행정·언론·결사 등을 날카롭게 관찰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그의 문제의식은 점점 분명해졌다. “프랑스혁명은 피를 흘리고도 민주주의를 이룩하지 못한 반면, 미국에서는 어떻게 민주주의가 사회 깊숙이 순조롭게 뿌리내리고 있는 것일까?”

당시 유럽에서 민주주의는 다수가 주권을 행사하는 정치제도를 뜻했다. 그러나 그가 미국에서 목격한 민주주의는 제도나 법률을 넘어 사회 곳곳에 스며든 관례와 습속이 되어 있었다. 이를 통해 그는 프랑스혁명처럼 갑자기 제도나 법률을 바꾼다고 해서 곧바로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고 깨달았다. 특히 그는 미국인들이 향유하는 평등한 생활조건을 주목했다. 아직도 귀족사회의 잔재가 강한 유럽의 귀족 출신 청년에게 이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없었다.

그렇지만 곰곰이 돌이켜보면, 유럽에서도 평등화는 오래전부터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며 차근차근 진척되고 있었다. 심지어 프랑스에서는 그로 말미암아 미증유의 유혈혁명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런 성찰을 통해 그는 사회마다 속도와 양상은 달라도 평등화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섭리’임을 간파했다. 바로 그것이 민주주의의 핵심적 실체인 것이다.

당시 미국은 앙시앙레짐(구제도)이 없는 신세계였다. 따라서 유럽처럼 갈등이나 혼란 없이 민주주의가 순조롭게 정착되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는 미국의 민주주의가 완전한 것이라고 보지 않았다. 그는 무엇보다 ‘다수의 폭정’을 우려했다. 모든 공직이 선거로 선출됨에 따라 미국의 통치와 행정의 기반은 다수의 지배 아래 놓인다. 일단 다수가 되면, 거의 무제한의 권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관찰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미국에서는 행정의 분권화나 강력한 사법제도 등이 다수의 폭정을 제어하는 안전판 역할을 한다. 무엇보다 미국은 타운·카운티·주(州)·연방의 순으로 자치가 확장된 나라이다. 따라서 비록 상위 권력일지라도 섣불리 전횡을 하기 어려운 생래적 조건을 가지고 있다. 결국 그들은 불가피하게 협치를 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미국 정치의 강점으로 꼽힌다.

하지만 민주주의에서 다수의 폭정은 보다 근원적인 문제이다. 정치인들은 다수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인기영합적 공약을 남발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언제나 우민(愚民)정치나 포퓰리즘으로 흐를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더구나 조건의 평등화에 따라 사람들은 개인주의와 물질주의에 매몰되어 정치나 공익에 무관심하게 된다.

이로 말미암아 민주주의는 언제든지 ‘민주적 전제정치’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폭정은 전통적인 폭정과는 달리 ‘보다 광범위하고 보다 부드러운 것’이며 ‘인간을 가혹하게 다루지 않으면서도 품위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그것은 평등하고 서로에게 무관심한 수많은 대중에게 보호와 안락을 약속하면서 군림하는 가부장적 권력이다. 또한 불법이 아닌 합법적인 지배이며, 강압하기보다 유혹하는 권력이다.

민주적 전제정치는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를 통해 성립된다. 사람들은 투표하는 순간에만 주권을 누릴 뿐, 투표 즉시 주권은 대표자에게 위임된다. 일단 성립된 전제정치는 국민의 동의 없이도 국민의 이름으로 모든 권한을 행사하게 된다. 이처럼 그는 민주주의의 맹아를 보고 이미 그것이 결코 지고지순한 제도가 아니라는 점을 간파한 위대한 선각자였다.

사람들은 전통적 폭정에 맞서 자유를 주장했고, 이를 통해 평등을 쟁취했다. 그러나 특권이 타파되고 어느 정도 평등이 실현되자 이제 자유에 대한 열정이 식어 버렸다. 하지만 토크빌은 민주주의의 본질이 평등보다 자유에 있다고 역설한다. 그에게 자유란, 외부의 억압을 막는 소극적 자유를 넘어 자기 스스로 결정하려는 자율, 즉 적극적 자유인 것이다. 그런 자유가 참여와 감시로까지 이어질 때, 민주주의가 튼튼히 담보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에 비추어 보면 우리의 민주주의는 취약하기 이를 데 없다. 무엇보다 다양한 공동체 차원에서 충실한 자치의 전통이 부재하다. 그레고리 핸더슨이 ‘소용돌이의 한국정치’에서 지적했듯이, 중앙권력과 원자화된 개인만 존재한다.(주간조선 2466호 참조) 이런 환경에서 대통령은 저절로 ‘제왕적’ 권력이 되고 만다. 또한 평등의 개념은 강고한 반면, 정작 자유·자율·책임의 개념은 박약하다. 이처럼 우리의 민주주의는 크고 작은 장애물로 둘러싸여 있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다양한 통찰을 제공한다. 무엇보다 민주주의는 생래적으로 불완전한 제도이다. 따라서 그것은 완결된 절대 선이 아니라 우리가 애지중지 가꾸어 나가야 할 생물(生物)이다. 이러한 사실을 외면하고 나만이 옳다는 도그마에 빠지는 순간, 민주주의는 생동감을 잃고 타성에 빠진다. 이것이 바로 진영 논리에 갇힌 우리 민주주의의 딱한 현실이다.

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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