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종의 민물고기로 끓인 임진강 종합매운탕.
10여종의 민물고기로 끓인 임진강 종합매운탕.

소년은 틈만 나면 친구들과 임진강으로 천렵을 다녔다. 바구니 가득 물고기를 잡아오면 할머니는 아낄 것 없이 빡빡하게 매운탕을 끓여주셨는데, 그 뜨끈한 진국 매운탕 한 그릇에 부모님 안 계시는 소년의 외로움이 스르르 녹아내리곤 했다. 청년이 되어 서울서 큰 기업에 다닐 때도 어린 시절의 그 행복한 맛과 추억이 잊히지 않았다. 그래서 돌아온 것이 스물아홉. 고향의 맛을 사람들에게 전하기로 마음먹고 수백 년간 대대손손 살아왔던 집터에 한옥을 지었다.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임진대가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긴 세월 따라 ‘임진대가집’의 창업주 이선호(57)씨의 머리에도 서리꽃이 하얗게 피었다. 처음 손맛 좋은 동네 아주머니만 믿고 음식점을 시작했다가 일주일 만에 아주머니가 그만두어 낭패를 본 그는 직접 주방에서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임진강변에 송홧가루가 날릴 무렵 올라오는 귀한 황복을 제대로 요리하고 싶어 8번의 낙방 끝에 복조리사 자격증을 따기도 했다. 양식 물고기론 어린 시절 먹던 매운탕 맛이 나지 않아 배를 타고 강에 나가 직접 그물을 던졌다. 어부가 되어 강바람과 햇살에 그의 얼굴은 점점 구릿빛으로 익어갔고 손바닥은 그물을 끌어올리느라 굳은살이 마디마다 박였다.

“임진강은 제게 어머니예요. 매일 주시는 만큼 거둬와 아끼지 않고 정성으로 음식을 냅니다. 손님 마음에 흡족해야 제 맘도 만족하니까요.”

강에 나가 그물을 거둬들이는 수많은 시간들 속에 유유히 흐르는 임진강과 깊은 교감을 나누면서 시를 쓰기도 했다. 세 아이를 혼자 몸으로 키우면서 인생을 달관하게 되었고 자연에 순응하면서 그의 표정은 더욱 넉넉해졌다. 인정 많고 언변 좋은 주인장과 합석을 조르는 손님들도 많다. 그가 들려주는 임진강과 인생 이야기는 음식 못지않게 진국이다.

임진강은 민간인 통제구역이 많아 물이 맑다. 쏘가리, 어름치, 돌고기 등 1, 2급수에서만 서식하는 물고기들이 많이 잡힌다. 이선호씨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새벽 6시면 임진강으로 나선다. 강물이 꽁꽁 어는 날엔 얼음을 깨고 전날 드리웠던 그물을 거둬들인다. 오로지 임진강의 자연산 민물고기를 잡아 손님이 남기건 말건 그 옛날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물고기를 아낌없이 사용해 요리하는 것이 그의 낙이다. 그는 농부이기도 하다. 텃밭에 고추며 온갖 채소를 심어 손님상 반찬거리로 사용하고 매운탕에 들어가는 된장 하나도 직접 콩을 재배해 담근다. 어부 노릇에서 농사일까지 그의 하루는 늦은 밤까지 쉴 틈이 없다.

자연산 민물고기만을 사용하는 이 집의 메뉴는 철 따라 대표메뉴가 달라진다. 봄에는 황복이 유명하다. 임진강변에 철쭉이 곱게 필 무렵 알을 낳기 위해 바다에서 올라오는 황복은 맹독이 있어서 실제로 먹을 수 있는 양은 얼마 되지 않는다. 끓이면 딱딱해지는 일반 복과 달리 황복은 잇몸으로 씹을 수 있을 정도로 부드럽고 입안에 은은한 맛이 감돈다. 특히 탕이 압권으로 매년 봄철이면 황복을 먹으려는 손님들로 예약이 밀려든다. 여름에는 자연산 장어가 많이 난다. 가격은 비싸지만 맛과 힘이 양식 장어와 비할 바가 아니기에 찾는 손님들이 많다.

들판의 벼가 고개를 숙이기 시작하면 참게가 제맛을 낸다. 임진강은 수온이 다른 지역보다 낮고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기 때문에 최적의 참게 서식지다. 임진강의 참게는 일명 옥돌참게로 섬진강 쪽보다 껍데기가 얇고 부드러우며 속살이 통통하게 꽉 차 있다. 생선매운탕에 참게 몇 마리 넣으면 국물 맛이 달라진다고 할 정도로 그 맛이 깊다. 좀 큰 참게는 참게찜으로 내는데 속살이 고소하고 깔끔해 인기가 많다. 아구찜처럼 걸쭉한 양념에 버무려내는 참게범벅은 선호씨가 개발한 메뉴로 칼칼한 양념과 어우러져 참게 특유의 맛이 한층 올라간다. 참게가 한창 나는 요즘 선호씨는 부지런히 참게를 잡아 흐르는 물에 담가 해감시켜 흙 냄새를 없앤 뒤 급랭한다. 매운탕마다 몇 마리씩이라도 넣어주려고 비축을 해두는 것이다.

대표 이선호씨
대표 이선호씨

계절에 관계없이 손님들이 가장 즐겨 찾는 메뉴는 ‘임진강 종합매운탕’이다. “매운탕은 여러 종류가 들어가야 맛있어요. 한 가지로만 끓이면 맛도 단편적이죠.”

매일 아침 잡아온 자연산 민물고기를 아낌없이 한 냄비 가득 넣고 끓여낸 임진강종합매운탕엔 임진강의 풍요로운 맛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이곳만의 종합선물세트인 셈이다. 철 따라 조금씩 달라지긴 하지만 냄비 바닥에 참게 네댓 마리를 깔고 그 위에 돌고기, 모래무지, 붕어, 눈치, 쏘가리, 메기, 어름치, 피라미 등 임진강에서 잡은 9~10가지 종류의 민물고기를 듬뿍 올린다. 수제비를 얄팍하게 떠 넣고 마지막으로 미나리와 버섯을 푸짐하게 올려주는데, 국물은 좀 바특한 편이다.

“매운탕은 국물이 주인공인데 물을 많이 잡으면 제맛이 안 나요.” 건지가 풍성하니 국물이 한없이 진국일 수밖에. 이 집 매운탕의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상에서 팔팔 끓여 숨죽은 미나리와 버섯부터 건져 먹고 수제비를 떠먹다 보면 연한 민물고기 살이 국물에 풀어진다. 이때쯤 탕 맛을 보면 달착지근한 자연의 감칠맛이 기가 막히다. 국물과 어우러진 쏘가리는 특유의 탄력이 넘치고, 모래무지는 잇몸으로 으깨질 정도로 살살 넘어간다. 자연산 민물고기의 여러 가지 식감을 제대로 즐길 수 있으니 입이 즐겁다. 먹고 남은 매운탕을 포장해 갈 정도로 양이 넉넉하다. 민물고기만으로 이렇게 한껏 포식할 수 있는 집은 대한민국 어디 가도 드물지 싶다. 주인장이 어부라서 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곳에선 음식을 천천히 즐기면서 너른 창으로 한적한 강변 마을의 정취를 느껴 보길 권한다. 마당에서 들려오는 새소리, 뒷산에서 불어오는 가을바람이 이 집의 진솔한 음식만큼이나 마음을 끈다. 뜨끈한 매운탕을 먹은 뒤엔 마당 의자에 나와 앉아 차 한 잔 즐겨도 좋을 만큼 운치가 있다.

한국적인 분위기와 정성스러운 음식으로 일본의 NHK, 미국의 CNN 등 세계 유수의 방송을 탔다. 만화 ‘식객’의 실제 주인공 업소로 유명한 이곳은 국내 정재계 인사들과 유명 인사들의 단골집이기도 하다. 이곳을 찾은 이들의 손에는 뒷산에서 주운 토종밤이며 주인장이 직접 띄운 구수한 청국장 등이 주렁주렁 들려 있다. 오랜 단골들이 많아 누가 주인인지 손님인지 구별이 안 갈 정도로 허물없이 지내는 집, 주인장의 인정이 가득 느껴지는 한옥에서 대접 잘 받고 가는 이 느낌을 오래도록 이어갔으면 좋겠다 싶다. 이씨는 이 다음 더 나이 들면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세 자녀 중 누구라도 임진대가집을 이어주길 희망하고 있다.

정수정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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