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차장대우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차장대우

‘타히티’의 화가 폴 고갱은 원래 증권맨이었다. 러시아 극작가 안톤 체호프의 본업은 의사. 트로이 유적을 발굴한 하인리히 슐리만은 고고학을 좋아하는 상인이었다. 최초로 증기선을 만든 로버트 풀턴은 본래 화가다. 취미활동으로 일가를 이룬 그들은, 때론 역사의 흐름을 바꾸며 자신들만 새길 수 있는 독특한 무늬로 인류사를 수놓았다. 그 흐름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본업과 취미를 병행하며 대가(大家)의 반열에 올랐거나 오르고 있는 네 명을 만났다. 특별한 비결은 없었다. 결국 관건은 ‘하루’. 매일 아침 출근길 풍경을 사진에 담은 호텔리어, 퇴근 후면 문향(聞香)에 심취해 30년을 보낸 은행원, 천체망원경 장인이 된 국사 선생님, 예술하는 직장인으로 사는 법을 전파하는 방송사 직원. 충실하게 보낸 ‘오늘 하루’가 그들을 만든 동력원이었다.

2년 전이었다. 기자는 어머니와 함께 도쿄를 찾았다. 한시라도 빨리 나리타공항을 벗어나려 발걸음을 재촉했다. 옆에서 가쁜 숨소리가 들렸던 것 같기도 하다. 그때 어머니는 환자였다. 그 순간이 갑자기 떠오른 건 한 장의 사진 때문이었다. 나리타 공항호텔 로비의 창문을 찍은 사진, 백승우(59) 작가(그랜드하얏트서울 상무)의 작품이다. 도록용 크기로도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사진작품은 오랜만이었다.

지난 10월 19일 서울 남산의 그랜드하얏트호텔에서 백승우 상무를 만났다. 호텔 안은 분주했다. 트럼프 미 대통령의 방한 준비가 겹친 탓인 듯했다. 미국 대통령들은 방한하면 주로 그랜드하얏트호텔에 묵는다. 백 상무의 전화기도 쉴 틈 없이 울렸다. 호텔리어에겐 일상일지 모른다. 그는 하얏트인터내셔널의 극동아시아 재무담당 이사도 맡고 있다.

시작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하얏트일본에서 일하는 동료가 어느 날 카메라를 주더라. ‘일만 하지 말고 사진을 배워 봐라.’ 처음엔 안 쓰고 두고 있었다. 나중에 결국 사진을 시작했다.”

그저 셔터를 누르며 사진에 입문한 건 아니다. 진동선 사진평론가를 찾아갔다. 몇 명이 모여 진동선 평론가에게 미학을 배웠다. 책 몇 권 읽은 수준이 아니다. 미학 학술지에 논문도 실었다. 카메라 조작법을 익히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회의, 출장, 강의로 일정이 꽉 차 있다. 사진만을 위해 할애할 시간이 없다. 출근길을 활용하자 생각했다. 약수동에서부터 호텔까지 걸어서 출근했다. 보이는 풍경을 카메라로 찍었다. 그전엔 틈틈이 걷던 걸, 2008년부터 본격적으로 걸어다녔다.”

그렇게 찍은 사진에 글을 곁들여 포토에세이집 ‘약수동 출근길’(2013)을 냈다.

‘호텔 창문’을 소재로 삼은 이유도 같았다.

“한 달에 한 번꼴로 해외 출장을 간다. 호텔리어다 보니 회의도 호텔에서 한다. 어느 날 회의실 창문 밖 풍경으로 눈길이 갔다. 그 후부터 회의에 10분 먼저 와 창문을 찍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전 세계 50여군데 호텔에서 찍었다.”

2008년부터 ‘윈도우 시리즈’를 시작했다. 이듬해 한국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반응이 좋았다. “작품이 많이 팔렸다. 자신감이 생기더라. 수입으로 좋은 카메라도 샀다.” 다양한 사람들이 백 상무 아니 백 작가의 고객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호텔들도 그의 작품을 구입했다. 재밌는 건 하얏트호텔도 그의 ‘고객’이라는 점이다. 돈을 받았냐는 우문(愚問)에 단호한 답이 돌아왔다. “그렇다. 나는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이다. 거래는 확실하게 한다.”

지난해 7월엔 프랑스 파리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파리 갤러리스트(gallerist)에게 어느 날 메일이 왔다. 내 사진을 우연히 봤단다. 이후 1년 동안 메일로 의사소통하다 전시를 하기로 했다. 7월은 유럽 예술 시장의 비수기다. 그래서 별 기대를 안 했다. 그런데 유럽 예술 잡지에 ‘7월에 봐야 할 주요 전시 4개’ 중 하나로 소개됐다. 오프닝에 프랑스 예술계 유명 인사들이 왔다. 누가 와서 묻더라 ‘이 갤러리 전속작가인가?’ ‘아니다.’ 그 다음날 갤러리로 오라고 하더라. 그 자리에서 전시 계약을 맺고, 지난 4월 파리 샹젤리제 거리의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The Window, Service Residence at Narita Airport, Japan, December 2007 ⓒphoto 백승우
The Window, Service Residence at Narita Airport, Japan, December 2007 ⓒphoto 백승우

오는 11월 7일부터 세 번째 파리 개인전을 연다. 갤러리의 성화에 못 이겨서다. 나리타 공항호텔에서 찍은 사진은 이미 완판됐다. 큰 크기로 사진을 인화하기 위해 1000만원이 넘는 고가의 카메라도 갖췄다. 이쯤되면 더 이상 취미가 아니다.

그의 사진은 묘하게 눈길을 끄는 힘이 있다. 정갈한 구도와 정돈된 아름다움이 먼저 눈에 띈다. 한편엔 일정한 슬픔, 혹은 고독이 서려 있다. 호텔이라는 장소의 특성에 기인하는 듯하다. 누구도 정주(定住)하지 않는 장소의 태생적 가련함이라고 할까. 사진을 응시하다 보면 정주라는 건 어디에서도 불가능하구나, 쓸쓸한 깨달음이 뒤를 잇는다. 비슷한 구도의 윈도우 시리즈를 발표했던 미국의 사진작가 존 팔(Pfahl)보다는 화가 에드워드 호퍼가 떠오르는 이유다.

사진작업 기술이나 학문적인 부분을 계속 공부하는지 궁금했다. “공부한다. 유튜브(Youtube)로 한다. 전문가들의 미학 심포지엄이나 사진작가들의 강연을 듣는 식이다. 출퇴근길에 그냥 듣기만 하면 되지 않나. 사실 도제식으로 배워야 하는 부분도 있는데 시간이 없으니 유튜브로 공부한다. 반 고흐가 미대를 나온 건 아니다. 독학했다. 유튜브에 없는 게 없다. 창문을 10년 보니까 이제 보인다. 작품이 될지 안 될지, 인간의 내면을 보여줄지 아닐지 느낌이 온다.”

작년엔 사진과 글을 엮어 영문 도서 ‘마이 코리아(My Korea)’를 냈다. “호텔에 묵는 외국 정상들이나 기업 회장들이 한국에 관한 책을 찾는다. 영문책이 막상 적당한 게 별로 없더라. 틈틈이 영어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2년 동안 준비했다. 그때부터 궁궐과 자연 사진을 찍었다. 고궁을 자유롭게 출입하려 궁궐문화역사 해설사 자격증도 땄다. 1년 동안 강의 듣고 땄다.”

‘마이 코리아’는 외국인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내용을 담았다. ‘남자 이발은 미용실이 잘한다’ ‘결혼식 갈 땐 축의금을 준비해라’ 같은 지극히 실용적인 내용이다.

사진 작업이 본업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궁금했다. “업무 관계로 만나는 외국인에게 책에 사인해 선물로 주면 정말 좋아한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업무 사이 시간이 남을 때 허비하지 않고 할애할 수 있는 일이 있으니까 좋다.”

그는 “하다 보니 국내외 합쳐 개인전만 7번째다. 이렇게 될 줄 몰랐다.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다음 연작은 ‘사물’이다. “호텔 내부의 사물을 담으려 한다. 비슷한 것처럼 보이지만 방마다 제각기 표정이 있다.”

하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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