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임영근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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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히티’의 화가 폴 고갱은 원래 증권맨이었다. 러시아 극작가 안톤 체호프의 본업은 의사. 트로이 유적을 발굴한 하인리히 슐리만은 고고학을 좋아하는 상인이었다. 최초로 증기선을 만든 로버트 풀턴은 본래 화가다. 취미활동으로 일가를 이룬 그들은, 때론 역사의 흐름을 바꾸며 자신들만 새길 수 있는 독특한 무늬로 인류사를 수놓았다. 그 흐름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본업과 취미를 병행하며 대가(大家)의 반열에 올랐거나 오르고 있는 네 명을 만났다. 특별한 비결은 없었다. 결국 관건은 ‘하루’. 매일 아침 출근길 풍경을 사진에 담은 호텔리어, 퇴근 후면 문향(聞香)에 심취해 30년을 보낸 은행원, 천체망원경 장인이 된 국사 선생님, 예술하는 직장인으로 사는 법을 전파하는 방송사 직원. 충실하게 보낸 ‘오늘 하루’가 그들을 만든 동력원이었다.

‘샐라티스트’, 샐러리맨과 아티스트를 합친 말이다. 말 그대로 ‘월급 받는 예술가’를 뜻한다. 본업은 따로 있으면서 예술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모임이 바로 한국샐라티스트협회다. 2011년에 결성됐다. 창립 첫해부터 매년 한 차례 전시회를 연다. 어느 직종의 사람들이 무슨 예술활동을 할까. 협회 회장인 최재용(49)씨에게 물었다. 지난 10월 18일 서울 YTN 사옥에서 만났다. YTN 홍보팀에서 일하며 꾸준히 작품활동 중이다.

- 어떤 사람들이 활동하나. “직업군, 연령대 모두 다양하다. 공무원, 의사, 교사, 회사원 등 30~40여명이 가입해 있다. 장르도 다양하다. 사진, 회화, 조각, 작곡 등이다.”

- 아마추어 동호회와 뭐가 다른가. “동호회는 기본적으로 친목을 위한 모임 아닌가. 샐라티스트협회 회원들은 일단 기본적인 수준 이상의 실력과 의욕을 갖고 예술활동을 한다. 직장에 있으면 예술활동을 평생 계속하겠다는 절실함은 아무래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단체에 소속되어 있으니 매년 작품활동을 해야겠단 의지가 생긴다.”

- 전업 예술가의 수준을 넘어설 수 있겠나. “중세나 르네상스시대 작가들도 샐라티스트였다. 용어가 없었을 뿐이다. 다빈치도 다른 일을 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고갱은 원래 증권맨이었다. 앙리 루소는 ‘일요화가’로 불렸다. 다른 일을 하며 독학으로 일요일마다 그림을 그려서다. 일정한 수입이 예술성에도 도움이 된다.”

- 전업 예술가들이 불편하게 볼 수도 있겠다. “사실 저 스스로도 전업 작가가 아니라는 자격지심이 있었다. 작가로서의 순수성을 포기했다는 생각에서다. 미대를 졸업하고 방송사에 바로 취직했다. 지금 돌아보면 직장생활 하길 잘했구나 싶다. 미대 동기 중에 작가로 남아 있는 이가 거의 없다. 생활고에 허덕이다 자살한 친구도 있다.”

- 월급을 받으며 예술활동을 하는 게 장기전엔 유리하단 얘긴가. “미술계 환경이 굉장히 열악하다. ‘화가의 길을 가고 싶으면 직장부터 알아봐라’ 후배들을 만나면 조언한다. 일찍부터 자급자족하란 얘기다.”

- 본업에 지장이 있진 않을까. “오히려 본업에 도움이 된다. 내일 당장 효과가 나타나는 건 아니지만 창의성이 고양되지 않나. 스티브 잡스도 취미로 캘리그라피를 배웠다. 애플의 혁신적인 디자인이 우연히 나온 게 아니다.”

-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단체 모토가 있다. ‘직장인에게는 예술을, 예술가에게는 직업을’. 예술 전공자 중에서도 기업에 취직해 역량을 발휘하는 이가 많다. ‘일하는 예술가’라는 타이틀을 대중화하고 싶다. 올해 12월엔 일곱 번째 정기 전시회를 연다.”

하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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