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렘린광장의 소련 지도자들 묘지. 왼쪽에서 첫 번째가 스탈린 묘.
크렘린광장의 소련 지도자들 묘지. 왼쪽에서 첫 번째가 스탈린 묘.

지난 9월 미국의 성인잡지 ‘플레이보이’의 창립자인 휴 헤프너가 91세로 사망하였다. 그는 로스앤젤레스 웨스트메모리얼 파크에 위치한 여배우 마릴린 먼로의 묘소 옆에 안장되었다. 이 자리를 구입하느라 7만5000달러나 들였다고 한다. 마릴린 먼로는 ‘플레이보이’ 창간호의 표지모델이었다. 플레이보이 사업으로 억만장자가 된 휴 헤프너지만 이처럼 손바닥만 한 묫자리를 구하느라 거금을 들이는 일은 미국에서는 드문 일이라고 한다.

할리우드의 섹스심벌 마릴린 먼로 옆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려는 욕망이었을까? 그러나 휴 헤프너가 살아생전 마릴린 먼로를 영원한 사랑이라고 말했다고 한 보도를 본 적이 없다. 90세에 들어서도 젊은 여성을 아내로 두어 세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그가 저세상에 가서 새삼 마릴린 먼로를 일편단심으로 사랑하겠다고 추측할 수가 있을까? 혹시 사람들이 마릴린 먼로를 추억할 때마다 휴 헤프너를 떠올리고, 휴 헤프너를 떠올릴 때마다 마릴린 먼로를 상상하며 이야기해주기를 기대한 때문은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보기도 하였다.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인류사회에 계급이 생기면서 무덤에 차이가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일반 백성들은 사망 후에 마을 외곽 공동묘지에 묻혔다. 반면, 지배자들의 무덤은 마을 중심부에 위치하게 되었다. 누구라는 묘비도 설치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지배자들의 행적을 기록한 비문이 늘어나게 된다. 후세 사람들에게 묘지에 묻힌 사람의 업적을 알리는 것이 목적이다. 비문은 역사 연구의 기본사료로 중요하게 활용되며, 아름다운 비석이나 조각들은 예술품으로 보존된다.

대개의 나라들이 비석에는 이름과 생몰(生沒) 연도만을 표시하는 반면, 유럽 국가들 가운데에는 비석에 뜻깊은 조각을 하는 곳도 많다. 이탈리아 밀라노 여행객이라면 공립공동묘지 기행을 빠뜨릴 수 없다. 묘소들마다 비석과 함께 아름다운 조각상이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 빈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작곡가 모차르트, 체코 프라하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작곡가 드보르자크의 묘지를 찾는다. 러시아 여행에서도 도심에 위치한 공동묘지는 필수 관광코스가 되었다.

크렘린광장 자체가 묘소

제정러시아 시절 일반 백성이 사망하면 모스크바나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시 내부에 매장할 수 없었다. 오직 귀족이나 저명인사들만이 도시 내부에 매장되었다. 그리고 왕족이나 러시아정교 지도자들이 사망하면 성당 내부나 수도원 등에 매장되었다. 모스크바의 경우 크렘린의 주변이 온통 묘소이다. 크렘린의 알렉산드로프 정원으로 가면 2차대전 중에 전사한 무명용사들을 추모하는 묘소가 있다. 꺼지지 않는 불꽃이 타오르는 이곳은 소련군 의장대가 엄중하게 지키고 있다.

크렘린 내부의 성당에는 제정러시아 이전 중세 러시아 왕들의 묘소가 있다. 이반 뇌제(이반 4세)의 묘소는 대천사성당 내부에 있다. 성당 안에 들어가면 러시아 왕들과 중요 성직자들의 관이 많이 있는데, 그중에 ‘이반 4세’라고 쓰인 것이다. 이반 뇌제는 타타르제국을 정복하여 러시아가 그 후 강대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기초를 세운 인물이다. 지금은 러시아의 상징물이 된 유명한 바실리성당도 이반 뇌제가 타타르를 정복한 기념으로 세운 것이다. 그의 선대(先代) 차르들의 관도 대천사성당에 대부분 놓여 있다. 로마노프 왕가 최초의 차르인 미하일 1세의 묘지도 이곳에 있다. 크렘린 내 성모승천성당에는 러시아정교 지도자들의 묘소들이 있다.

과거 러시아 시절 왕족이나 성직자들이 차지하던 크렘린 묫자리를 소련 시절에는 정치지도자들이나 군사지도자들이 주로 차지하게 된다. 당장 보이는 것이 커다란 레닌의 영묘이다. 소련이 붕괴한 이후 이를 이전해야 한다는 여론도 높지만 아직 구체적인 이전계획은 나오지 않고 있다. 레닌 묘지에 들어가려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 소련 공산당은 공산혁명 지도자인 블라디미르 레닌(1870~1924)이 사망하자 그의 사체가 썩지 않도록 방부처리하여 이 영묘에 영구보관하였다. 캄캄한 영묘 안에 들어가면 거대한 유리관 안에 방부처리된 레닌의 시신이 검은색 정장 차림으로 잠을 자듯 누워 있다. 두 팔과 두 주먹은 가지런히 발 방향으로 뻗어 있다. 레닌의 얼굴 모습을 보면 누구든 그가 아시아계였으리라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레닌 묘지를 나오면 소련에 공헌한 인사들을 기리는 기념비와 비석들이 놓여 있다. 2차대전 중 소련군의 전설적 인물인 게오르기 주코프(1896~1974) 원수의 명패도 이곳에 있다. 주코프 원수는 지금도 러시아인들이 존경하는 인물이다. 스탈린도 1945년 크렘린광장에서 거행된 승전 기념 군사퍼레이드를 그가 지휘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스탈린은 그를 시기하여 권좌에서 멀리하고 비밀경찰 책임자인 심복 베리아를 시켜서 늘 감시하였다. 스탈린 사망 직후 주코프는 베리아를 체포하였다. 베리아는 군사법정에서 사형판결을 받고 처형되었다. 주코프 원수의 동상은 지금도 크렘린 광장의 왼편에 있는 역사박물관 앞에 세워져 있다. 주코프 오른편 명판에 새겨진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1895~1977)는 2차대전 중 소련군 총사령관을 역임하며 나치스 독일에 대한 소련군의 공세전략을 지휘하였다. 그리고 소련 시절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사로 기록된 유리 가가린, 볼셰비키혁명을 취재보도한 미국 기자 존 리드의 명패도 이들 군사지도자들과 같은 반열에 있다.

이 성벽 앞에는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 최고 지도자였던 인물들의 묘소와 반신상이 설치되어 있다. 브레즈네프, 안드로포프, 체르넨코 등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무덤과 반신상이다. 관광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인물은 역시 스탈린이다. 항상 그 앞에서 기념사진 찍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좋아서라기보다는 가장 유명하기 때문일 것이다. 스탈린의 무덤은 한때 파헤쳐지는 보복을 당하기도 하였다. 비록 석상(石像)이지만 이제 편안하게 미소짓는 표정에서는 수백만 명을 학살한 독재자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마치 그 모든 잘못이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고 변명을 늘어놓는 듯하다. 이들과 더불어 소련 비밀경찰 창시자인 펠릭스 제르진스키, 스탈린과 가까웠던 안드레이 즈다노프, 미하일 프룬제 등도 같은 반열로 있다. 이들은 모두 현직에서 사망한 사람들이다.

(좌) 보리스 옐친의 묘역. (우) 고르바초프 부인 라이사 여사의 묘지. 오른쪽은 비어 있다.
(좌) 보리스 옐친의 묘역. (우) 고르바초프 부인 라이사 여사의 묘지. 오른쪽은 비어 있다.

개혁파 지도자 묘소는 노보데비치 묘지

독재자 스탈린에서 브레즈네프, 안드로포프에 이르기까지 이곳에 묻힌 사람들의 성향을 굳이 가르자면 보수파들이다. 스탈린 사후 공산당 서기장을 역임하며 스탈린 격하운동을 펼쳤던 니키타 흐루시초프나 소련 해체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의 묘소는 찾을 수 없다. 아마도 죽어서라도 서로 얼굴 붉히는 일이 없도록 한 배려가 아닐까 하는 우스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에 대해 현직을 떠난 상태에서 사망했기 때문에 크렘린 묘소에 묻히지 않았다고 러시아인들은 설명한다.

현직에서 물러난 뒤에 사망한 소련 최고지도자들의 묘소는 모스크바 남부에 위치한 노보데비치 수도원 공동묘지에 가면 볼 수 있다. 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였던 흐루시초프 부부의 묘지가 가장 먼저 들어섰으며, 소련이 붕괴한 뒤 탄생한 러시아연방의 보리스 옐친 대통령의 묘소도 이곳에 조성되었다. 옐친의 묘소는 노보데비치 묘역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다. 적·청·백 3색으로 구성된 커다란 러시아 국기가 돌로 장식되어 있다. 청색과 백색은 모자이크로 처리되어 있다. 소련의 마지막 최고지도자였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공산당 서기장 겸 대통령의 묘역도 이곳에 이미 조성되어 있다. 고르바초프가 사망하면 부인 고(故) 라이사 여사의 묘지에 함께 묻힐 예정이다. 라이사 여사의 묘역에는 아리따운 조각상이 한쪽에 설치되어 있다. 옆에는 고르바초프의 조각상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노보데비치 수도원 묘지에는 문화예술인들의 묘소가 많다. 소설가 겸 극작가 안톤 체호프와 니콜라이 고골의 묘소에는 러시아인들이 가져다 놓은 꽃들이 사라지는 날이 거의 없다.

(좌) 솔제니친의 묘역. (우) 언론인 안나 폴리트콥스카야의 묘역.
(좌) 솔제니친의 묘역. (우) 언론인 안나 폴리트콥스카야의 묘역.

솔제니친은 돈스코이 묘지 선택

소련 시절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2008년 사망했을 때 사람들은 당연히 그의 시신도 노보데비치 수도원 묘지에 묻힐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솔제니친은 희망한 대로 돈스코이 수도원에 매장되었다. 돈스코이 수도원은 스탈린 시절 공산당에 의해 무신론박물관 및 소년원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비밀경찰은 무고한 정치범들을 학살한 다음 이곳에서 화장해 버렸다.

소련 최고의 전략가로 꼽히는 미하일 투카체프스키(1893~1937)도 이곳에서 처형된 뒤 화장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돈스코이 묘역에는 스탈린 시절 이곳에서 억울하게 처형된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들을 추모하는 비석들이 밀집되어 있다. 솔제니친이 매장지로 돈스코이 수도원을 택한 이유는 이 장소가 소련의 종교탄압을 상징하는 장소이기 때문이었다. 죽은 뒤에도 스탈린과 공산주의의 무지와 잔인함에 저항하겠다는 의지의 표출인 듯하다.

2015년 2월 모스크바 크렘린 부근을 산책하다 괴한의 총격을 받고 사망한 반체제 지도자 보리스 넴초프는 노보쿤체보(트로예쿠로보)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푸틴 대통령의 최대의 정적(政敵)이었던 그는 등에 4발의 총탄을 맞고 즉사했다. 그의 묘비에 새겨진 4발의 총탄 자국을 보면 넴초프의 육신이 떠올라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

노보쿤체보 공동묘지에는 저명한 언론인들도 묻혀 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푸틴이 주도하는 체첸전쟁에 반대하던 여성 언론인 안나 폴리트콥스카야. 그녀는 2006년 10월 아파트 승강기 안에서 괴한의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그녀의 묘비에는 신문을 상징하는 돌판에 총탄 흔적이 새겨져 있다. 그녀에 대한 총격은 언론을 향한 총격과 마찬가지라는 의미인 듯하다. 또 러시아 사람들에게 이들의 생명을 앗아간 자들의 만행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는 듯하다.

노보쿤체보 공동묘지에는 소련 시절 군사지도자들의 묘소가 많다. 흥미로운 사실은 소련을 위해 일했던 외국 스파이들의 묘소도 이곳에 모여 있다는 점이다. 냉전시대 서방 최대의 간첩으로 평가되는 영국인 킴 필비의 묘소가 대표적이다. 영국의 명문 케임브리지대학을 나온 킴 필비는 영국 정보국의 터키지부장을 지내면서 미군과 영국군이 실시하는 작전 정보를 모두 소련에 건네주었다. 이로 인해 미군과 영국군 병사들과 정보요원들이 소련군에 살해당했다. 나중에 정체가 발각되자 킴 필비는 소련으로 망명했고 소련 여자와 결혼하여 살다 죽었다.

노보쿤체보 묘소에는 트로츠키 암살범인 스페인 카탈루냐 출신의 라몬 메르카데르의 묘소도 있다. 그는 스탈린에 밀려나 멕시코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트로츠키를 살해하고 체포돼 20년형을 살다가 석방돼 쿠바에서 사망하였다. 소련 정보국이 그의 유해를 모스크바로 공수하여 이곳에 묻었다.

제정러시아의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황실의 묘지는 페트로 파블롭스크 성당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러시아의 수도가 모스크바였을 때 왕들이 죽으면 유해가 담긴 관은 대개는 크렘린 내부의 대천사성당에 봉안되었다. 로마노프 왕가의 표트르 대제가 수도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긴 뒤 황제들의 유해는 페트로 파블롭스크 성당에 보관되었다. 이 성당에는 공산당에 학살당한 제정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 일가족의 유해를 보관한 별실이 마련되어 있다.

(좌) 넵스키 수도원 묘지에 위치한 셰레메테프 가문의 묘역. (우) 셰레메테프 궁전에 있는 니콜라이, 프라스코비야, 드미트리의 초상화.
(좌) 넵스키 수도원 묘지에 위치한 셰레메테프 가문의 묘역. (우) 셰레메테프 궁전에 있는 니콜라이, 프라스코비야, 드미트리의 초상화.

농노 출신 프라스코비야 백작부인 묘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저명인사들이나 귀족의 공동묘지로 활용되던 장소는 넵스키 수도원 공동묘지이다. 모스크바의 노보데비치 수도원 공동묘지처럼 넵스키 수도원 묘역도 여행객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이곳에는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 작곡가 차이콥스키·무소르그스키·보로딘·림스키-콜사코프 등의 묘지가 한자리에 모여 있다.

제정러시아의 궁정 운용을 도맡아하던 대부호 셰레메테프 가문의 가족묘역도 이곳에 있다. 셰레메테프 가족묘는 별도의 건물로 구성되었다. 이곳에는 셰레메테프 가문의 농노 출신으로 니콜라이 셰레메테프 백작과 결혼하여 백작부인이 된 프라스코비야 셰레메테바의 묘지도 있다. 프라스코비야는 18세기 말 러시아 최고의 미녀이자 오페라 가수였다. 러시아 최고의 귀족이던 니콜라이 백작은 프라스코비야의 아름다운 외모와 빼어난 지성과 성품에 반해 1801년 프라스코비야에게 자유를 선사하고 비밀리에 결혼하였다. 두 사람의 결혼 사실은 20세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공식 확인되었다. 프라스코비야는 아들 드미트리를 낳고 곧 사망하였다. 하지만 러시아 귀족들은 농노 출신인 그녀를 조문하지 않았다. 니콜라이 백작은 아내가 사망하자 아내의 뜻이라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러시아에서 가장 큰 병원을 설립하고, 아무도 모르게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니콜라이 백작과 프라스코비야 부부, 그 아들 드미트리는 가족묘 안에 나란히 누워 있다. 아름다운 프라스코비야의 실제 모습을 담은 초상화들은 폰탄카 강변에 위치한 셰레메테프 궁전 2층에 가면 볼 수 있다.

러시아정교의 바티칸이라 불리는 ‘세르기예프 포사트’에 가면 러시아 황제들 가운데 유일하게 몽골계 타타르 출신의 차르 보리스 고두노프 가족묘가 특별히 설치되어 있다. 고두노프 가족묘는 세르기예프 포사트의 삼위일체 수도원의 대성당 입구에 있다. 이반 뇌제(이반 4세)가 사망한 다음 차르가 된 보리스 고두노프는 1604년 돌연사했다. 그리고 아들이 대를 이어 표도르 2세가 되었다. 표도르 2세는 비상한 과학 재능을 갖춘 인물로 오래 집권했으면 상당한 업적을 남겼을 만한 인물로 평가된다. 정상적인 죽음을 맞았다면 이들의 유해가 담긴 관은 크렘린 내 대천사성당에 보관되어야 한다. 그런데 폴란드의 지원을 받은 드미트리라는 인물이 나타나 스스로 이반 4세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였다. 사람들의 지지를 받은 그는 차르가 되자 고두노프 일가를 모조리 학살하였다. 친폴란드 정책을 쓰며 러시아정교를 무시하던 드미트리는 곧 다시 축출되어 처형되었다. 그후 러시아인들은 억울하게 처형된 보리스 고두노프 일가의 원혼을 달래려는 듯 세르기예프 포사트의 대성당 입구에 가족묘를 만들어 추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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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태영 인터넷뉴스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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