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화
[2482호] 2017.11.13
관련 연재물

[역사기행]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 현장을 가다

‘나폴레옹 시대’ 종언 알린 현장에 100년 걸려 전승기념비 세운 이유

조성관  편집장  

▲ 라이프치히 전승기념비, 푈커슐라흐 뎅크말 전경. photo 홍지형
실제 직접 눈으로 보면 사진으로 본 것만 못한 경우가 더러 있다. 사진작가가 첨단의 디지털 테크닉을 총동원해 피사체를 실제보다 더 크고, 더 멋지고, 더 화려하게 찍어낸 결과다. 그런 사진에 익숙해져 있다가 실제로 직접 보면 감흥이 떨어지곤 한다. 널리 알려진 세계적인 역사유적이나 자연경관이라 할지라도.
   
   반대의 경우도 있다. 직접 현장에서 보니 사진에서 전혀 느낄 수 없었던 것을 오감각으로 맛보는 경우다. 카메라의 어떤 렌즈도 실제 모습을 담아내지 못한 결과다. 누구나 여행을 하다 보면 이런 경험을 한두 번씩은 하게 된다. 내게 라이프치히 전승기념비가 바로 후자(後者)에 해당했다.
   
   독일 기행을 하기로 했다면 라이프치히를 포함시키는 것은 당연했다. 요한 볼프강 괴테, 리하르트 바그너, 프리드리히 니체, 고트홀트 레싱과 같은 사람이 모두 18~20세기 라이프치히와 인연을 맺었는데, 어찌 라이프치히를 제외할 수 있겠는가. 라이프치히는 1945년부터 1990년까지 동독(DDR) 땅으로 공산체제를 경험했다. 현재 라이프치히 인구는 58만여명. 이제 60만명을 턱밑까지 쫓아왔다. 라이프치히의 최전성기는 세기말로 80만명을 넘기기도 했다.
   
   
   나흘간 전사자 8만~11만명
   
   라이프치히에는 세계사에 기록되는 전투 현장이 있다. 1813년 라이프치히전투(The Battle of Leipzig)다. 이 세계적인 전투는 10월 16일부터 19일까지 나흘간 벌어졌다. 불과 나흘간의 전투에서 나폴레옹 군대와 프로이센·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은 모두 8만~11만명이 전사했다. 이 중 나폴레옹군은 4만5000명이 전사했다. 얼핏 양측이 비슷한 전사자를 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라이프치히에 집결한 양측의 군대 수를 비교해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나폴레옹군은 22만5000명, 연합군은 38만명이었다. 나폴레옹 군대는 불과 나흘간의 전투에서 병력의 20% 이상을 잃어버리는 대패를 기록했다. 이 패배의 여파로 1814년 나폴레옹은 권좌에서 쫓겨나 결국 엘바섬으로 유배를 간다. 1813년 10월 라이프치히전투는 나폴레옹 시대의 종언을 선언했다.
   
   이에 앞서 1812년 여름 나폴레옹은 65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원정을 떠났다. 나폴레옹은 거침없이 진격해 모스크바를 점령했지만 쿠투조프 장군의 소개(疏開) 작전 함정에 빠진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추위와 굶주림 속에 그는 패퇴할 수밖에 없었다. 복싱에 비유하자면 나폴레옹은 러시아원정에서 난생처음으로 얕잡아보던 상대방에게서 다리가 휘청거릴 만한 강펀치를 맞았다. 쓰라린 패배였다. 그러나 그게 결정타는 아니었다. 비록 패배는 당했지만 훗날을 도모할 수가 있었다. 훗날을 도모한 전투가 바로 10개월 뒤 라이프치히에서 치러졌고, 나폴레옹은 여기서 결정타를 맞는다. 이렇게 나폴레옹의 위대한 시대는 끝이 나고 말았다.
   
   전쟁의 귀재로 불리던 나폴레옹은 왜 라이프치히전투에서 힘 한번 쓰지 못한 채 무릎을 꿇고 말았을까. 이미 많은 전쟁사 연구자들이 결론을 내렸다. 프로이센·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의 38만 병력은 결정적 요인이 아니다. 1812년의 러시아원정 직전까지 나폴레옹은 언제나 적군의 우월한 병력을 천재적인 전술·전략으로 깨부수면서 승리를 일궈온 사람이다. 그렇게 전 유럽이 나폴레옹이라는 이름 앞에 벌벌 떨었다. 그러니 병력만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 (좌) 나폴레옹(1769~1821·재위 1804~1815). (우) 나폴레옹이 사용하던 책상. photo 홍지형

   프로이센 主力, 나폴레옹군과 대결 회피
   
   여기서 잠깐 19세기 초반의 독일의 지정학적 배경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당시 독일은 프로이센, 작센, 뷔르템베르크, 바이에른 등 30여개의 크고 작은 왕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 중 북부에서 가장 큰 세력은 프로이센이었고, 작센·뷔르템베르크 등 세력이 다소 약한 도시국가들은 프로이센과 적대적 관계에 있었다. 라이프치히에서 작센, 뷔르템베르크 등은 나폴레옹 편에 섰다.
   
   나폴레옹군은 첫날인 10월 16일만 반짝했을 뿐 10월 17일부터 시종 밀렸다. 연합군의 주력(主力)은 프로이센군이었다. 연합군은 나폴레옹이 직접 지휘하는 주력부대와는 철저하게 대결을 회피하는 전략으로 일관했다. 대신 다른 장군들이 지휘하는 부대를 하나씩 격파해나가면서 마침내 나폴레옹군을 완전 포위하는 데 성공한다. 나폴레옹이 독일 원정에 나서며 재소집한 병력에는 10대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경험이 풍부한 전투병들이 절대 부족한 상황이었다. 이 점도 나폴레옹군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나폴레옹은 10월 17일 둘쨋날부터 후퇴작전을 구상했다. 안전한 퇴로(退路)만 확보된다면 병력 손실을 최소화하며 후퇴작전을 펼 수 있었다. 그런데 10월 19일에 나폴레옹을 지지했던 작센과 뷔르템베르크 부대가 마음을 바꿔 연합군 편에 서고 만다.
   
   1813년 전투 현장은 라이프치히 외곽의 들녘이었다. 라이프치히로 통하는 몇 개의 마을 사이에서 역사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이곳은 현재 라이프치히 시내로 편입된 지 오래다. 그 역사적인 현장에는 전승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라이프치히 중앙역 광장 건너편에서 15번 전차를 탄다. 전승기념비가 있는 정거장은 푈커슐라흐 뎅크말(Vl kerschlacht-denkmal). 주소로는 ‘10월 18일의 길’ 100번지다. 독일 정부가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10월 18일’이라는 도로명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전차는 정확히 15분 만에 푈커슐라흐-뎅크말 정거장에 섰다. 전차로 15분 거리에 불과한 이곳이 200년 전에는 라이프치히에서 도보로 얼마나 걸렸을까.
   
   전차에서 내리니 전승기념 공원으로 가는 길이 보였다. 푯말을 따라 기념공원으로 걸어 올라갔다. 공원에 들어서니 전쟁기념비는 100여m쯤 멀리 떨어져 있었고, 그 앞에는 직사각형 초대형 연못이 조성되어 있는 게 보였다. 연못은 기념비를 수면에 반영하며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고 있었다. 마치 워싱턴 국가상징도로 ‘내셔널몰’의 ‘리플렉팅 풀’을 연상시킨다. 겨울이 되면 이 연못은 거대한 스케이트장으로 바뀐다.
   
   여행안내서에는 전쟁기념비가 91m 높이에 피라미드 형상이라고 되어 있었다. 하지만 사진으로는 91m라는 위용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전쟁기념비를 향해 걸어갔다.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서서히 기념비의 실체가 느껴져왔다. 피라미드라기보다는 차라리 사원에 더 가깝게 느껴졌다.
   
   기념비 앞에 섰다. 이럴 수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베를린 중심가 티에르가르텐에 있는 전승기념비 지게스조일레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백문이불여일견(百聞以不如一見)이라는 말은 바로 이런 경우에 쓰는 말이었다. 기념비는 바닥부터 꼭대기까지가 수많은 화강암 조각으로 이뤄져 있었다. 꼭대기 부분, 돔 아래 기단에는 12명의 군인상(像)이 빙 둘러 서 있는 게 보였다.
   
   기념비의 외관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어디서 본 듯하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무엇이 연상되지는 않는다. 왜 그럴까. 건축가 브루노 슈미츠가 메소포타미아 건축물, 이집트 사원, 프랑스 앵발리드 등에서 부분적인 요소를 참고했고 고전주의·르네상스·바로크 양식의 장점을 한데 모은 결과다. 브루노 슈미츠는 파사드를 비롯한 전승기념비 곳곳에 상징과 기호를 배치해놓았다. 일례로, 파사드에 부조된 비상하는 두 마리의 독수리는 자유의 쟁취를 상징한다.
   
   
▲ 2층 크리프트(crypt)와 3층 명예의전당. photo 홍지형

   나폴레옹 책상 전리품으로 전시
   
   현재의 기념비를 본격적으로 건설하기 시작한 것은 1898년부터. 라이프치히전투 100주년이 되던 1913년에 완공했다. 1913년이면, 324m의 에펠탑이 세워진 지 24년 뒤의 일이다. 화강암을 만져 보았다. 백년의 비바람을 맞으며 풍화된 화강암의 거친 표면 때문일까. 철골 구조의 에펠탑보다 훨씬 더 웅혼하게 다가왔다.
   
   그렇다면 그전까지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을까. 최초의 기념비는 1814년 초대형 십자가로 나타났다. 그러나 십자가는 전쟁의 의미와 희생자를 추모하기에 적절치 않다는 의견이 제기되면서 몇 가지 시안이 제시되었다. 하지만 85년간 기념비 건설은 아무런 진척을 보이지 않았다. 건설 주체와 비용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는 대역사(大役事)를 밀어붙일 강력한 권력이 등장하지 않은 게 결정적 요인이었다. 지지부진하던 기념비 건설이 전환점을 맞은 것은 1871년 프로이센이 독일을 통일한 이후부터다. 화강암 덩어리를 운반하려 인근의 채석장까지 케이블카를 설치해 운용하기도 했다.
   
   매표소에서 8유로를 내고 입장권을 산 뒤 기념비 입구 쪽으로 갔다. 표를 받는 곳은 계단을 올라가야 나온다. 계단을 오르는데 가파른 경사로 인해 다리가 후들거렸고 아찔했다. 난간을 잡지 않을 수 없었다. 136개의 계단을 조심스럽게 올라가니 입구가 나왔다. 입장권을 보여주고 실내로 들어섰다. 전승기념비 관람의 하이라이트인 크리프트(crypt)다. 크리프트는 보통 교회나 성당의 지하공간을 의미하기도 하고 탑의 2층을 뜻하기도 한다. 기념비 관람순서는 두 가지다. 하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맨 위층으로 올라가 전망대에서 라이프치히 시내를 둘러본 뒤 내려오며 내부를 관람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크리프트에서 올라가면서 전망대까지 구경하는 방법이다.
   
   크리프트에는 장엄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레퀴엠처럼 들렸다. 구스타프 홀스트의 ‘플라네’라고 직원이 알려준다. 벽면 전시실에 탁상시계가 붙어 있는 화려한 목조책상이 보였다. 이게 뭐지? 안내판을 보니 나폴레옹 책상이라고 적혀 있다. 전쟁의 와중에도 진중(陣中)도서관을 운영했던 황제의 실체를 뜻밖에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이야!
   
   이 책상은 나폴레옹이 전투를 준비하며 라이프치히에 사는 귀족의 책상을 징발한 것이다. 안내문 맨 아래에 있는 ‘이 책상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전투의 패배를 가져온 명령을 내린 책상이다’라는 글귀가 발길을 사로잡았다. 나흘 동안 나폴레옹의 고뇌와 결단을 지켜보았던 책상! 이 물건으로 인해 1813년 10월 그날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비로소 가상현실(VR)로 눈앞에 떠오르는 듯했다.
   
   크리프트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비통한 표정의 거대한 석조 마스크 8개가 원형을 이루고 있고, 각각의 마스크 앞에는 2명의 군인이 고개를 숙인 채 서 있다. 가운데에 근조화가 놓여 있는 게 보였다. 높이가 6m에 달하는 거대한 마스크는 하나같이 눈을 거의 감거나 반쯤 감고 있는 침통한 표정들이다. 막 영면에 들어간 망자(亡子)의 얼굴 같다. 마스크를 호위하는 병사들은 모두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앙다물고 있었다. 화강암 호위병들은 오열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호위병의 표정에서 비로소 나는 이 들판에서 죽어간 병사들의 숫자를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불과 나흘 동안에 전사자가 10만명에 이른 그 참혹한 상황을 우리가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겠나.
   
   크리프트 위층(3층)은 명예의전당이다. 거대한 좌상(坐像) 4개가 홀을 둘러싸는 형상이다. 석상 4개는 전쟁을 치른 독일 국민을 상징화했다. 두 팔로 어깨를 감싼 석상은 용기를 상징한다. 다리 사이에 어린이를 안고 있는 석상은 신념의 힘을 뜻한다. 양팔로 갓난아기를 안고 있는 석상은 국민의 힘을 의미한다.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눈을 감고 있는 석상은 희생을 암시한다. 죽음을 철학과 미학으로 빚어낸 석상이었다.
   
   
▲ 돔(dome) 아랫부분의 모습. photo 홍지형

   당당한 모습의 기병들
   
   돔을 올려다보았다.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돔 정중앙을 향해 동심원 10여개가 그려져 있었고, 동심원과 동심원 사이의 공간에는 말을 탄 기병들이 일렬로 행진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 기병들은 크리프트와 명예의전당에서 보았던 사람들과는 달리 당당한 모습이었다. 기병들은 모두 324명으로 실물 크기다. 아래에서 올려다봐서는 기병의 실제 크기가 감이 오지 않았다. 전쟁에서 이긴 뒤 영예롭게 귀향하는 기병들의 모습이다.
   
   전승기념비가 준공된 1년 뒤에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이후 독일이 각기 다른 체제를 경험하면서 전승기념비는 시대에 따라 각기 다른 평가를 받았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19년 탄생한 바이마르공화국에 이 전승기념비는 비민주적인 상징물로 여겨졌다. 국가사회주의정권, 즉 나치가 집권하던 시기에는 몰개성의 상징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동독(東獨) 시절에는 독일의 국가 정체성을 재확립하는 노력의 상징으로 간주되었다. 이 시기 동독은 이를 소련과의 긴밀한 우애관계를 상징하는 기념물로 활용했다. 실제로 1953년, 140주년 행사에는 소련군이 참석하기도 했다.
   
   전승기념비를 안팎으로 살펴보면서 터져나오는 탄성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솔직히 의아했다. 독일제국이 이렇게까지 거대한 기념비를 세워야 했을까.
   
   그때 문득 트라팔가해전이 떠올랐다. 넬슨 제독이 트라팔가해전에서 나폴레옹 연합함대를 격파한 게 1805년. 대영제국은 이 해전을 계기로 제해권(制海權)을 장악, 나폴레옹을 유럽대륙에 묶어놓을 수 있었다. 런던 트라팔가광장 한가운데에 있는 승리의 탑 꼭대기에는 넬슨 제독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데, 이 탑의 높이는 50m다.
   
   라이프치히의 전승기념비는 규모 면에서 트라팔가 승전탑과 비교도 되지 않았다. 비로소, 알 것만 같았다. 1806년 신성로마제국을 무너뜨리고 독일을 점령한 이가 나폴레옹이었다. 독일 입장에서 보면 나폴레옹이 그만큼 무시무시하고 거대한 존재였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 나폴레옹을 물리치는 데 독일인 수만 명의 희생이 필요했을 만큼.
   
   공원을 걸어나오면서 대한민국 서울을 생각했다. 6·25전쟁은 자유진영이 합심해 공산진영의 침략에 맞서 자유대한민국을 지켜낸 위대한 전쟁이었다. 그 36년 뒤인 1989년 자유세계는 공산주의를 무너뜨렸다. 6·25전쟁 동안 한반도에서 자유를 지키다 산화한 유엔군은 미군 3만6492명 포함 모두 4만896명.
   
   우리는 지금 그들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나.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LG V30

맨위로

2484호

2484호 표지

지난호보기 정기구독
유료안내 잡지구매

로그인 회원가입   아이디·비번찾기
호르반
삼성전자 갤럭시 s8
부산엑스포
경기안전 대동여지도
조선토크 브로슈어 보기

주간조선 영상 more

이어령의 창조이력서 연재를 마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