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메르의 ‘저울을 든 여인’
베르메르의 ‘저울을 든 여인’

마침내 베르메르가 워싱턴에 상륙했다. ‘베르메르와 장르 페인팅의 대가들: 영감과 경쟁(Vermeer and the Masters of Genre Painting: Inspiration and Rivalry)’이란 제목의 초대형 전시회로 워싱턴국립예술관(www.nga.gov)이 무대다. 지난 10월 22일 시작해 내년

1월 21일까지 계속될 예정이다. 장르 페인팅이란 신화, 종교화, 풍경화, 정물화가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을 그린 작품을 의미한다. 16세기부터 200여년에 걸쳐 네덜란드에서 발전된 회화 영역이다.

전시회 일정이 알려진 지난해부터 기다리고 기다렸다. 워싱턴의 베르메르 특별전은 올해 초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여름철 더블린 아일랜드국립박물관에 이은 행사다. 글로벌 시대의 트렌드지만 미술 특별전은 한 장소만이 아니라 세상 구석구석을 떠돌며 순차적으로 진행된다. 비용절감과 예술의 글로벌화에 기여할 수 있다.

연초에 파리에 들렀을 때 베르메르 특별전에 갈까도 생각했지만 워싱턴에서 볼 생각으로 의도적으로 미뤄뒀다. 워싱턴과 베르메르 사이를 잇는 ‘특별한 연(緣)’을 고려해서다. 워싱턴 베르메르 특별전이 ‘초대형 이벤트’로 규정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주관적인 기준이지만 21세기 들어 가장 ‘뜨는’ 글로벌 스타 화가는 두 명이다. 빛과 어둠의 극명한 대조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카라바조(Caravaggio)와 네덜란드의 베르메르다. 이들은 현재 세계적인 갤러리의 특별전에서 아주 특별하게 취급되고 있다. 두 사람에 관한 특별전이 열리는 곳은 예외 없이 초만원이다.

워싱턴은 유럽 수준에 머물던 베르메르를 글로벌 스타 화가로 업그레이드해준 곳이다. 1995년 워싱턴국립예술관에서 열린 베르메르 특별전이 바로 그 현장이었다. 당시 30만 관람객이란 대기록을 세웠다. 이 특별전 이후 베르메르의 위상이 달라졌다. 베르메르는 전부 37점의 작품을 남겼다. 22년 전 특별전 당시 21점이 전시됐다. 초대 워싱턴 특별전 이후 간간이 거래되던 베르메르 작품의 가격이 최소 10배로 뛰었다. 베르메르 특별전을 원하는 갤러리들도 줄을 섰다. 1992년 40대 대통령 빌 클린턴이 등장하면서 시작된 글로벌리즘이 베르메르 인기의 배경으로 해석됐다. 따라서 올해 워싱턴 특별전은 22년 만에 금값으로 변한 글로벌 스타와의 ‘재회’쯤에 해당한다. 루브르가 아닌 워싱턴 전시회를 고집한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워싱턴 베르메르 특별전 입성은 세 번째 시도만에야 겨우 가능했다. 주말에 두 차례 찾았지만 무려 100m는 될 듯한 관람객 행렬에 압도돼 포기했다. 필자가 겪은 워싱턴국립예술관의 관람객 인파 중 가장 많은 숫자였다. 관람객이 가장 적게 몰리는 월요일 오전을 택해 달려갔다.

‘베르메르와 장르 페인팅의 대가들’에서 보듯 올해 특별전은 베르메르만이 아닌 동시대 화가들의 작품도 함께 선보이는 자리다. 이른바 네덜란드 역사의 황금기라 불리는 1650년부터 1675년까지 25년간에 걸친 작품들이다. 전부 65점으로 이 가운데 베르메르 작품은 10점이다.

‘루트를 연주하는 여인’
‘루트를 연주하는 여인’

작고 섬세한 그림들

베르메르 특별전에서 주목한 것은 두 가지다. 첫째 왜 베르메르인가라는 질문이다. 렘브란트는 17세기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화가로 통한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변하고 있다. 렘브란트가 아니라 베르메르의 인기가 한층 더 올라가고 있다. 생존 당시는 물론 19세기 말까지 무명에 머물렀던 화가가 베르메르다. 그러나 20세기 말부터 상황은 달라진다. 렘브란트에 비해 베르메르 특별전에 몰리는 관람객 수가 압도적으로 많아진 것이다. 베르메르의 대표작인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에 대한 관심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에 버금갈 정도다. 추정컨대 ‘모나리자’를 잇는 글로벌 인기 2위의 그림이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일 듯하다. 어떻게 해서 베르메르가 거장 렘브란트를 뛰어넘어 감히 다빈치마저 넘보는 화가가 될 수 있었을까. 그 같은 위상 변화를 동시대 다른 화가들과 비교하면서 확인하고 싶었다.

특별전 전시관에 들어서자 ‘한눈에’ 네덜란드 특유의 그림 분위기가 느껴진다. 작다. 그림의 크기는 대부분 30㎝ 내외다. 따라서 아주 바짝 다가서서 봐야만 한다. 작다는 것은 섬세하고 예민하다는 의미다. 작은 생선 먹기가 한층 더 힘들다. 예외도 있겠지만 대형 그림에 매달리는 화가일수록 세부적인 데생에 약하다. 그림의 가격은 크기를 기준으로 한다. 따라서 클수록 고가(高價)에 거래된다. 최근 중국 그림을 보면 예외 없이 초대형이다. 작은 부분에 소홀히 할수록 거꾸로 크게 간다. 물론 교회나 왕실에 주로 걸리는 종교적·신화적 그림은 크게 그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17세기 네덜란드 그림은 세심하고 세밀한 부분에 승부를 거는, 양이 아닌 질의 예술이다. 큰 그림은 보는 사람을 압도하면서 가치를 드높인다. 관람자를 수동적으로 만든다. 작은 그림은 관람자가 다가가 하나씩 뜯어보면서 살펴야 한다. 능동적 입장이 된다.

전시관에 들어가는 즉시 베르메르의 ‘레이스 뜨는 여자(Lace maker)’를 볼 수 있었다. 세로 24.5㎝, 가로 21㎝ 크기로 서른여덟 살 때 작품이다. 드레스에 바느질을 하는 여성의 초상화다. 당시 네덜란드 신교도 여성의 일상이기도 하다. 바늘을 응시하는 여성의 눈은 아래로 깔려 있다. 특별한 장식이 없는 노란색 상의가 특별하다. 원래 노란색은 유럽 화단에서 멀리하던 색상이다. 15세기 르네상스 화가를 비롯해 베르메르 이전에 노란색을 사용한 화가는 극히 드물다. 노란색 안료(pigment)의 대부분은 인도에서 수입됐다. 흥미롭게도 노란색은 네덜란드 종주국인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전용 색상이다. 피지배 국민들이 왕가의 색을 마음대로 사용한 셈이다.

지난 10월 22일부터 워싱턴국립예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베르메르와 장르 페인팅의 대가들’ 전시회를 찾은 인파.
지난 10월 22일부터 워싱턴국립예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베르메르와 장르 페인팅의 대가들’ 전시회를 찾은 인파.

간단·소박·청결이 특징

‘레이스 뜨는 여자’는 사실주의에 기초한 섬세함이 두드러진 작품이다. 배경인 벽면에 아무런 장식물을 두지 않고 있다. 베르메르의 특징인 간단·소박·청결이 와닿는다. 17세기 유럽 화단의 출발지는 이탈리아다. 화가를 지망한다면 일단 이탈리아에 가서 보고 배워야 한다. 당시 초상화의 대상이 된 인물의 대부분은 남성이다. 여성은 왕비나 그 주변 가족에 그친다. 화려하고 장엄한 옷으로 치장된 귀한 존재들이다. 평범한 여성을 주제로 한 베르메르의 ‘레이스 뜨는 여자’는 초상화에 관한 기존 관념을 180도 바꾼 작품이다. 베르메르의 작품 바로 옆에는 동시대에 활동한 화가 니콜라스 마스(Nicolaes Maes)의 ‘레이스 뜨는 여자’도 걸려 있다. 구도는 베르메르와 거의 동일하지만 검은색 상의와 뒷배경의 검붉은 커튼으로 인해 어둡고 무겁게 와닿는다. 베르메르의 여성이 파티에 나갈 드레스를 만든다고 할 때, 마스의 여성은 수도원 성찬식에서 입을 옷을 준비하는 듯하다. 보통 진지함은 어둡고 무겁게 느껴진다. 진지하지만, 어둡지도 무겁지도 않은 것이 베르메르 작품의 특징이다.

베르메르는 1632년 네덜란드 델프트(Delft)에서 태어나 1675년 눈을 감았다. 43년 평생을 델프트에서만 보냈다. 제한된 지역에서 좁은 세상을 산 듯하지만 17세기 중반 네덜란드는 다르다. 네덜란드 자체가 바로 세상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당시 네덜란드는 16세기 베니스와 21세기 뉴욕을 합친 곳쯤에 해당한다. 베니스처럼 크고 작은 운하를 통해 개개의 도시들이 하나로 연결된 것은 물론 뉴욕처럼 전 세계와의 금융무역에 주력하던 글로벌 파워가 네덜란드였다. 놀라운 것은 당시 네덜란드 중심도시 암스테르담의 인구가 불과 3만명 선이었다는 점이다. 인구와 국가의 발전 정도는 반비례하는 경우가 많다. 16세기 대제국 베니스의 인구 역시 시민 10만명과 노예 20만명으로 형성돼 있었다. 베르메르가 평생 거주한 델프트의 인구도 1만5000명 선이다.

안으로 들어서자 베르메르의 31살 때 작품인 ‘루트를 연주하는 여인’이 눈에 띈다. 다른 네덜란드 화가들 그림도 걸려 있지만 한눈에 알아낼 수 있다. 특별히 심미안을 가진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간단히 베르메르의 그림을 알아챌 수 있다. 모차르트의 음악이 그러하듯 한 번만 봐도 베르메르 특유의 화풍에 익숙해진다. 창문을 응시하는 여성이 의자에 앉아 루트를 연주하고 있다. 여성의 귀에 걸린 큰 진주 귀걸이, 배경으로 들어선 벽면의 유럽 지도, ‘아프가니스탄 블루’로 통하는 울트라 마린(Ultra Marine) 푸른색 커튼…. 베르메르만이 가진 특유의 캐릭터가 전부, 그리고 선명히 드러난 작품이 바로 ‘루트를 연주하는 여인’이다.

이번 특별전에서 필자가 가장 감동한 작품은 이미 수차례 접했던 눈에 익은 그림이다. 프랑스나 네덜란드에서 공수된 그림이 아니라 워싱턴국립예술관 내에 상설전시돼온 작품이다. 베르메르가 서른한 살 때 완성한 ‘저울을 든 여인’이다. 잔잔하고도 부드러운 작품으로 이해해왔지만 바로 옆에 걸린 그림과 비교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모습을 발견했다. ‘저울…’ 속의 여성은 추의 양끝 저울에 아무것도 올리지 않은 채 허공에서 중심을 잡고 있다. 바로 옆에는 동시대 화가인 후치(Pieter de Hooch)의 ‘동전의 무게를 재는 여인’이 걸려 있다. 저울 한쪽에 동전을 올려 놓고 무게를 확인하는 모습이다. 허공 속에서의 균형에 주목하는 베르메르, 저울대를 통한 동전 무게에 정신을 쏟는 후치. 더불어 베르메르 그림의 배경은 ‘최후의 심판’과 관련된 성화(聖畵)다. 선과 악을 가르는 신(神)의 심판이다. 후치의 경우 진한 노란색이 벽면 전체를 채우고 있다. 노란색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상징이다. 권력과 부의 최정점을 상징하는 색상이다. 무(無)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성(聖)의 관점에 주목한 것이 베르메르, 속(俗)에서 살아가면서 속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후치의 작품인 듯하다.

베르메르는 창문의 화가다. 37점 작품 가운데 ‘루트…’ ‘저울…’처럼 창문이 직접 그려진 것이 16점, 빛을 통해 창문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작품도 4점이다. 작품의 절반 이상이 창문을 소재로 하고 있다. 동시대 화가들 가운데 베르메르만큼 창문에 집착한 인물도 없다. 창문이 주인공이고 초상화 속 인물이 조연처럼 느껴진다. 베르메르의 창문은 은은하고 잔잔하다. 결코 뜨겁지 않은, 5월 신록의 화사한 바람에 어울리는 빛을 담고 있다. 창문은 빛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다리와 같다.

“화가는 검은 세상을 깨끗하게 씻어낸 뒤부터 캔버스(그림)에 몰입해야 한다. 왜냐하면 빛이 비쳐지지 않는 세상은 전부 어둡기 때문이다.”

530여년 전 다빈치가 남긴 말이다. ‘검은 세상을 씻어낸다’는 것은 붓에 새로운 색을 입히기 전의 과정으로 풀이된다. 푸른색, 노란색을 칠하기 위해서는, 짙은 검은색으로 변해가는 물감통에 붓을 넣어 씻어야만 한다. 다빈치에게 예술은 검은 세상을 밝게 만드는, 빛을 되찾는 작업이었다고 볼 수 있다. 창문의 화가 베르메르도 결국은 빛을 갈구한 인물이다. 스스로는 물론 창문을 통해 초상화 속 사람들, 초상화를 대하는 모든 이에게 밝은 빛을 선사한 화가가 바로 베르메르다. 워싱턴 특별전에서의 열기를 보면 앞으로 베르메르의 인기가 한층 더 높아질 듯하다. 이념과 탐욕으로 점철된 추한 세상이 기승을 부릴수록 빛을 원하는 사람들은 점점 더 많아질 것이다.

왜 네덜란드 그림인가?

17세기 황금기의 결과물… 화가들도 초상화로 돈 벌어

네덜란드 그림은 서양 유명 갤러리를 채우는 인기 목록 중 하나다. 스페인·독일·영국·러시아 전시관은 따로 없어도, 네덜란드 전시관은 유명 갤러리 어딘가에 들어서 있다. 왜일까? 양적으로 엄청나기 때문이다. 더불어 질적 수준도 높다. 예술은 돈을 필요로 한다. 네덜란드 그림의 양적·질적 수준은 해양국가 네덜란드의 영광과 부(富)에서 비롯된다. 세계 곳곳에 들어선 네덜란드 전시관에 걸린 그림의 대부분은 바로 17세기 반짝했던 ‘시대적 특수(特需)’의 결과물이다.

17세기 네덜란드는 통상·금융을 기반으로 글로벌 대제국으로 급성장한다. 지금의 미국과 같은 존재다. 1492년 스페인 여왕 이사벨라(Isabella)의 도움으로 콜럼버스가 출항한다. 인도 후추를 얻기 위해 서쪽으로 떠났지만 얼떨결에 신대륙 아메리카를 발견한다. 흥미롭게도 신대륙과 인도 발견의 최대 수혜자는 스페인이 아니라 네덜란드였다.

16세기 말 신교를 기반으로 한 네덜란드공화국은 합스부르크제국과 결별한다. 이어 구교의 질서와 무관한 유럽 밖 새로운 세상으로 눈을 돌린다. 스페인이 닦아놓은 신대륙으로 향하는 길을 ‘소수정예 공화체제’인 네덜란드가 재빨리 낚아챈 것이다. 더불어 15세기 말 스페인의 무슬림 추방 후 불어닥친 이베리아반도 내 유대인 탄압의 반사이익도 흡수한다. 박해를 피해 유대인이 네덜란드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유대인이 닦아놓은 상권이 그대로 넘어온다.

베르메르가 살았던 17세기 중반은 ‘해양국가’ ‘세속도시’ ‘신세계’라는 시대정신이 최정점에 달했던 시기다. 1606년에 태어나 1669년에 세상을 뜬 빛의 마술사 렘브란트도 네덜란드 황금기를 경험한 ‘운 좋은’ 화가다. 원래 20세기 이전까지 유럽의 화가는 극소수를 제외하면 육체노동자 정도로 취급됐다. 그림으로 돈을 벌어 인생을 즐길 정도의 화가는 드물었다. 그림의 수요처가 교회나 귀족 정도였기 때문이다. 17세기 네덜란드는 다르다. 그림으로 성공할 경우 인생을 즐길 수준까지 간다. 잘만 하면 평생을 풍족하게 살 환경이 렘브란트를 비롯한 네덜란드 화가들에게 제공된다. 일단 그림 수요가 엄청났다. 외국으로 떠나거나 전쟁터로 향하는 사람들이 경쟁적으로 초상화를 주문했다.

당시 그림값은 수입에 의존하던 재료비 때문에 결코 싸지 않았다. 그러나 해외에서 쌓은 엄청난 부(富) 덕분에 비싼 그림값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창이 넓고 길쭉한 모자에다 검은 벨벳 옷으로 멋을 낸 시민군 초상화가 보통 가정집을 장식했다. 고급스럽고 화려한 의상도 경쟁적으로 만들어졌다. 렘브란트는 전 세계로 떠나는 수많은 장사꾼과 군인들을 위한 초상화 전문 화가로 돈을 벌었다. 귀족에게만 허용되던 그림이 시민 모두에게 ‘평등’하게 퍼져나간 것이다. 당시 개인 초상화 유무는 신교와 구교를 가르는 증거이기도 했다. 고대 그리스가 그러했듯 평등해질수록 예술의 수요와 질적 수준도 올라간다. 서로 비교하고 경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같은 시대적 열기는 17세기 말 한순간 추락했다. 영국과의 해전(海戰), 프랑스와 육전(陸戰)에서 패하면서 네덜란드의 황금기도 끝났다. 돈에 쪼들린 베르메르의 말년은 네덜란드 황금기의 종언(終焉)과도 직결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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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 퍼시픽2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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