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이 ‘혁명공약’을 내걸고 5·16쿠데타를 일으킨 5년 후의 일입니다. 중국공산당은 중앙정치국 확대회의를 열어 ‘5·16통지(通知)’란 문건을 통과시킵니다. 마오쩌둥의 정치비서 천보다(陳伯達)가 기초한 문건 하나가 그후 10년간 이어지는 ‘천하대란’의 시작일 줄은 그 누구도 몰랐습니다. ‘5·16통지’로 중국 대륙은 문화대혁명의 아비규환에 빠져들었습니다. 홍위병들이 벌떼처럼 들고일어났습니다. 학생이 선생을 때리고, 자식이 부모를 욕보이는 일이 정당화됐습니다. 홍위병들로부터 고문을 당해 죽거나 불구가 된 사람은 헤아릴 수조차 없었습니다. 학교는 문을 닫았고, 철도는 멈췄고, 경제는 마비됐습니다. 마오는 ‘모반을 일으키는 데는 이유가 있다’는 ‘조반유리(造反有理)’란 말로 홍위병을 오히려 격려했습니다.

당시 문혁의 최대 피해자 중 한 명이 덩샤오핑입니다.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실권파(주자파)’로 몰려 모든 공직이 박탈되고 공장으로 추방됐습니다. 1호 주자파 류사오치처럼 홍위병에게 맞아 죽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했습니다. 그의 아들 덩푸팡은 홍위병에게 조리돌림당해 창문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기도하다 반신불수가 됐습니다. ‘5·16통지’가 일으킨 문혁은 1976년 마오의 사망과 함께 막을 내립니다.

마오의 사망 후 덩샤오핑은 문혁을 주도한 ‘사인방’과 마오의 공식후계자 화궈펑을 차례로 물리치고 기적처럼 정권을 잡았습니다. 문혁 때 피해를 본 세력이 그에게 힘을 실었기 때문입니다. 자연히 마오의 격하 논의가 제기됐습니다. 하지만 승리자가 된 덩샤오핑은 마오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1981년 11기6중전회에서 ‘건국 이래 당(黨)의 역사적 문제에 관한 결의’를 통과시켜 ‘마오는 공적이 제1, 착오는 제2’라고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이른바 ‘공칠과삼(功七過三)’의 공식 버전입니다.

덩샤오핑이 관용을 베푼 덕에 마오의 둥그런 얼굴은 여전히 천안문에 걸려 있습니다. 마오의 시신은 특수처리돼 천안문광장 한복판에서 여전히 참배객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마오의 고향인 후난성 샤오산에는 마오가 사용했던 모든 물품을 모아둔 기념관이 있습니다. 샤오산에 있는 마오의 동상은 높이만 국경절(10월 1일)을 뜻하는 10.1m로, 박정희의 고향 구미에 있는 박정희 동상(높이 5m)의 두 배에 달합니다. 허난성의 한 농촌은 무려 높이 36m의 금색 마오 동상을 세우려다가 “이건 좀 과했다”는 지적에 멈춘 적이 있습니다. ‘5·16통지’로 대륙을 파탄낸 마오는 여전히 영웅 대접을 받는데, ‘5·16쿠데타’로 한국을 5000년 역사상 최초로 빈곤에서 해방시킨 박정희는 기념관에 동상 하나 세우는 것조차 어렵습니다. 중국이 정상입니까, 한국이 정상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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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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